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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Jul 09. 2021

시간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

“여보, 여기가 그 가게 맞아? 아무래도 다른 길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냐, 이 길이 맞아. 조금만 더 가면 돼. 나만 따라와 봐”


아내와 종로 5가에 있는 경동시장의 약재상 가게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아내는 아리송한 듯 두리번거리며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에 방문했던 그 가게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 날씨가 무척 덥다. 작년 이맘때도 오늘처럼 더웠었다. 


경동시장까지 온 것은 아내의 생각 때문이다. 생수를 먹는데 아내는 아무 영양가도 없는 맹물을 그냥 먹느니 건강에 좋은 약재들을 물에 넣고 끓여 먹으면 좋겠다며 경동시장을 가 보자고 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어, 이곳이 맞은 것 같은데. 그런데 웬 할머니가 계시지? 그때도 할머니가 계셨었나?”


80대가량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가게 밖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처음 뵌 분이었다. 가게 안쪽을 살펴보니 짧게 스포츠머리를 한 50대의 남자가 다른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낯이 많이 익었다. 다행히 작년에 온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누구세요? 작년에는 안 계셨던 것 같은데.”

“아, 저희 어머님이요? 제가 막내인데 어머님이 집에 혼자 계시면 적적하실까 봐 시장에 나와서 저랑 같이 일해요. 바로 앞쪽에 있는 가게 보이시죠? 제가 어머님이 쉬엄쉬엄 일하시면서 용돈도 버시라고 조그맣게 차려주었어요. 집에 있는 것보다는 일하니까 건강도 좋은 것 같아요.”


어머님과 함께 일하는 그 남자의 표정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아들이 우리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어머님은 다시 맞은편 본인의 가게에 앉아 묵묵히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 평안해 보였고 건강도 좋아 보였다. 아들은 어린아이가 된 어머님의 든든한 보호막이 된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노쇠해진 어머님을 모시고 건장한 체격의 50대 아들이 함께 장사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정말 훌륭한 효자이시네요”아내가 그 남자의 효심에 감탄하며 말했다. 내년이면 90세가 되는 고령의 부모님을 둔 아내 눈에는 그 가게 주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비쳤을 것이다.


아내가 아는 어떤 지인은 연세가 70대 중반이다. 그녀의 어머님은 90대 후반이라고 했다. 두 분 모두가 고령의 노인이다. 그런데 딸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점심때 어머님을 찾아가 점심 식사를 같이한다. 음식은 모두 딸이 준비해서 가지고 간다. 


주말에는 손아래 남동생이 방문한다. 본인 집 근처에 어머님이 생활할 공간을 따로 마련하고 자녀들이 번갈아 가며 어머님을 돌보는 것이다. 본인도 나이가 들어 자신의 몸 추스르기도 만만치 않을 텐데 가까이에 힘없는 어머님을 모시고 정성스레 돌보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90세가 넘는 어머님을 손수 모시고 살기 위해 소송도 불사하는 고객도 있었다.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시골 지역의 땅을 샀는데 그 땅에 문제가 생겨서 나에게 찾아온 고객이었다. 다행히 그 소송에서 승소했다. 


고객과 그 가족이 모두 매우 기뻐했다. 90대 중반의 노모를 자기가 편안히 모실 수 있어서 한시름 놓았다며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고객뿐만 아니라 며느리인 그 아내와 자녀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을 보고 큰 보람을 느꼈다.


오래전에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이다. 영화에서 태어난 주인공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외모는 80대 노인의 모습이다. 영화로 처음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조금 끔찍해 보이기까지 했다. 피부가 쭈글쭈글한 아기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의 외모는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점차 젊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현실에서 우리는 외모가 아닌 마음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며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 모두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였을 때 부모님과 주고받은 소중한 추억들이 마음속에 곱게 간직되어 있다. 


장성한 자녀는 이제 힘없고 약해진 부모님을 정성스레 보살피며 어린 시절의 사랑과 은혜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장성한 자녀의 지극한 효성을 받아 누리는 부모님의 눈에 비치는 자녀의 모습은 여전히 어린 시절 자기 품 안에서 귀엽게 자라던 꼬마 어린이의 모습일 것이다. 자녀와 부모님 안에 있는  마음의 시계는 거꾸로 흘러간다. 그들의 영혼의 피부는 갈수록 젊어지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저명한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는 100세가 넘은 노인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기도 한다. 젊은이가 따로 없다. 책의 표지에 나온 얼굴 사진을 보니 고령의 노년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 100세가 된 육체는 혹 들풀처럼 시들지라도 그 영혼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 젊은이가 되어 간다.


황혼의 아름다운 잉꼬부부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젊었을 때부터 가꾸어 왔을 둘만의 소중한 시간들이 부부의 가슴속에 한 움큼 모여 있다. 기쁨과 슬픔의 조각들이 두 사람이 손잡고 거닐어 온 길가에 아름답게 뿌려져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노년이 된 부부의 영혼은 봄날의 따뜻한 빛이 되어 간다.  


시끌벅적한 시장터이지만 가까운 가게에서라도 노모를 모셔놓고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하는 경동시장의 가게 주인, 본인도 이미 노인이 되었음에도 거의 100세에 가까워지는 노모와 한 끼 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딸,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이더라도 한적한 시골 땅에 어머님을 편안히 모시고 싶어 하는 나의 고객, 나이를 뛰어넘는 노년의 왕성한 삶, 아름다운 노년의 부부. 


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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