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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Jul 25. 2021

감자에 싹이 나서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여름철 조그만 시골 동네. 작열하는 여름 태양 빛이 온 들판을 뜨겁게 쏘아붙였다. 동네 아이들이 무더위를 피해 마을 어귀 시원한 추자 나무 밑 응달진 곳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짝을 만든 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감자”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 


보통 여자들끼리 하는 놀이지만, 가끔 하는 일 없이 무료할 때는 나도 누나 틈바구니에 끼어 같이 놀았다. 가위바위보에서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뜨겁게 달궈진 시골의 한여름을 함께 어울려 보내는 것 자체가 그저 좋았다.


감자 노래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잘 모른다. 여름철 시골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농작물이 감자이기 때문에 어린이들 손 놀이 게임에 부담 없는 감자가 선택되었을까? 시냇가의 조약돌 같이 부드러운 모양. 손안에 쏙 들어오는 부담 없는 크기. 눈에 전혀 거슬리지 않은 살색의 껍질. 


줄기 하나를 뽑아 보면 땅 속 뿌리에 크고 작은 감자들 여러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마치 시골집 대가족 식구들 한 무리가 우르르 떼를 지어 나오는 것 같다. 가족처럼 친숙한 감자이기에 귀엽고 순진한 어린이의 입술에 오르내렸을 것이다.


한 여름에 본격 수확되는 감자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던 그 시절에는 중요한 대체 음식이었다. 나지막한 야산 자락에 있는 감자밭고랑에 줄지어 심어 놓은 감자가 여름이 가까워지면 줄기마다 하얀 꽃이 정갈하게 피었다. 때가 되어 수확할 시기가 되면 여기저기 밭들마다 온 가족들이 모두 함께 나와 힘을 합쳐 신나게 감자 걷이를 했다.  


밭고랑 앞쪽에서 땅에서 감자줄기를 힘껏 뽑아 대는 사람, 실타래처럼 얽힌 감자 줄기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사람, 거무튀튀한 흙 위에 수줍은 듯이 드러누워 있는 살색 감자들을 가마니에 넣는 사람. 대가족 식구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을 알맞게 분담하며 한여름의 감자밭 잔치를 벌였다.


마침 국가 유공자인 아버님은 국가에서 지원되는 원호 자금으로 새 리어카를 샀다. 동네 일대에 거의 유일한 리어카였다. 가족들이 밭에서 캔 감자들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 앞에서는 형이 끌고 나는 뒤에서 밀며 흡족하게 집으로 운반했다.


4남 1녀의 자녀를 둔 어머님은 시시때때로 큰 무쇠 솥에 감자를 삶았다. 어머님이 쟁반에 감자를 가득 담아 마루로 가지고 나오면 5명의 형제자매의 손들이 쟁반으로 돌진했다. 뒤질세라 뜨끈뜨끈한 감자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잘못하면 막내인 내 차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일단 얼른 감자를 집어 들었다. 황급히 작은방에 들어가 좌식 책상 서랍을 열고 그 안에 감자 2~3개를 숨겨 놓았다. 가장 힘 약한 막내의 생존법이었다. 바로 내 손위 형까지도 그랬다. 그 위의 형이나 누나는 우리가 이렇게 반칙을 해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어머님은 감자로 갈치 찌개를 잘 만드셨다. 어머님이 손수 만든 고추장을 충분히 풀어 넣고 감자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었다. 뜨거운 물에 풀어진 감자는 갈치국물을 걸쭉하게 만들었다. 생선보다 얼큰하고 걸쭉하게 변한 감자가 더 맛있었다. 


품앗이로 우리 논에서 일을 하던 동네 사람들은 논두렁에 푹석 앉아 어머님이 만든 갈치찌개를 맛있게 먹고 힘을 얻었다. 어머님의 일품요리는 감자 수제비, 감자 깻국도 있었다. 감자는 이렇게 나에게 포근한 추억이 되었다. 


어느 날 딸들이 감자탕을 먹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감자탕을 무척 싫어한다. 기름진 것을 싫어하는 나는 감자탕에 있는 감자를 좋아한다. 감자탕에 있는 고기를 좋아하는 딸들을 위해 사무실 근처의 감자탕 집을 찾았다. 식당 이름은 원당 감자탕이었다. 


고기가 붙어 있는 큼직한 돼지 뼈 덩어리에 주먹만 한 감자 서 너 개를 넣고 끓인 감자탕이 나왔다. 역시 고기보다는 감자가 더 맛있다. 아내가 감자를 맛있게 먹으라고 쟁반에서 감자를 하나씩 꺼내 나와 딸들 접시에 사랑스럽게 놓아준다.


감자탕을 먹으면 떠오르는 아쉬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감자탕 자매간에 벌어진 민사 사건이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 세 자매가 살고 있었다. 막내는 감자탕 식당을 운영했다. 감자탕 맛이 좋아 그 지역에 소문이 자자했다. 장사가 잘 되어 돈을 좀 벌었다. 근처에 건물을 하나 임차하여 일종의 체인점을 냈다. 마침 바로 손위 언니가 형편이 좋지 않았던 차라 그녀에게 체인점의 식당 운영을 맡겼다.


체인점 식당도 손님이 많아지고 운영이 매우 잘 되었다. 자매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건물 주인이 은행 빚을 많이 졌는지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다. 이참에 막내가 아예 건물을 주인으로부터 직접 사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막내는 이미 다른 부동산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을 자신 명의로 등기하는 것이 곤란했다. 그래서 손위 언니에게 부탁하여 건물 등기는 언니 명의로 해 놓기로 했다. 막내가 언니 명의를 빌리는 것이었다(명의신탁). 매매대금은 막내가 모두 지불했다. 매매 계약서는 막내 대신에 언니 이름을 매수인 란에 기재했다. 서류상으로는 언니가 매수한 것처럼 된 것이다.


이렇게 등기를 다른 사람 앞으로 해 놓는 명의신탁은 일단 위험하다. 부동산실명법에 위반되어 형사처벌, 과징금 부과는 물론이고 잘못하면 민사상으로도 등기를 찾아오지 못할 수 있다. 


언니의 감자탕 운영은 여전히 잘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언니에게 욕심이 생겼다. 언니는 이제 감자탕 건물이 자기 소유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매 사이도 많이 나빠졌다. 결국 막내는 건물 등기를 찾아오기 위해 언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막내가 원고, 언니가 피고가 된 것이다. 이미 둘 사이는 루비콘 강을 건넌 셈이었다. 


막내가 건물 등기를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막내가 건물 주인과 직접 매매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입증되어야 했다. 둘째는 건물 주인이 막내와 언니 사이의 명의신탁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둘 중의 어느 하나라도 입증되면 등기를 찾아 올 가능성은 있었다. 


과연 건물 주인은 누구와 매매계약을 체결한 것인가? 막내와 체결한 것인가, 언니와 체결한 것인가? 건물 주인은 명의신탁 사실을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그런데 이 사건이 한층 복잡해진 것은 막내가 건물 주인과 직접 만나서 매매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오빠와 매매 절차를 진행한 점이었다. 정작 건물 주인은 막내의 존재에 대해서나, 명의신탁 사실에 대해서나 모를 수 있었다.


서류상에는 매수인 란에 언니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막내의 이름은 매매계약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막내가 매매계약을 체결할 때 만난 사람은 건물 주인이 아니라 그의 오빠이다. 따라서 서류를 기준으로 보면 막내가 불리했다. 


설상가상으로 증인으로 나온 건물주인의 오빠가 막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진술을 했다. 소송이 치열하게 진행되었지만 재판부는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서류를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다. 결국 막내는 소송에서 패소했다. 


막내는 건물의 소유권을 찾아오지 못했다. 나에게도 아쉬움이 많이 남은 사건이었다. 소송 중에 두 자매는 막내와 완전히 등을 돌아섰다. 막내에 대해 인신공격도 마지않았다. 막내는 노모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 소송이 끝난 후에 감자탕 자매의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는 그 후 전혀 알 길이 없다. 


이후 길거리에 감자탕 간판을 보면 그 자매들이 떠올랐다. 막내가 승소했더라면 언니가 막내에 대해 원망을 했을 것이다. 누가 승소하든 감자탕 건물을 둘러싸고 자매 사이의 의는 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감자탕 식당이 차라리 운영이 잘 안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니에게 식당 운영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언니와 이렇게 소송으로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족 간에는 돈 문제로 얽히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었다.


가족들과 감자탕 식당을 간지도 꽤 오래되었다. 집에서는 아내가 보통 찌개 요리를 할 때 감자를 넣어 만든다. 찌개 만들기가 귀찮으면 감자 20여 개 정도를 씻어 그냥 냄비에 삶는다. 포근포근하게 익은 감자를 꺼내 둘로 쪼개면 김이 모락모락 나며 한껏 맛을 풍긴다. 다른 양념도 필요 없다. 그냥 삶은 감자 그대로 맛이 참 담백하다. 


며칠 전 앞집에 사는 분이 감자를 선물로 주었다. 시골에서 친척이 직접 재배한 것이라며 시장에서 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감사하게 받았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나도 친척으로부터 직접 재배한 감자를 한 상자 받아 놓은 상태였다. 갑자기 감자가 넘쳐났다.


냉장고에 보관하기에는 공간이 좀 부족했다. 아내가 한참 고민하더니 “감자를 전부 믹서기에 갈아버리자”라고 했다. 그러면 냉장고에 넣을 공간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믹서기에 간 감자가루를 헝겊에 넣고 짜서 그 찌꺼기를 원료로 감자부침을 해 먹자고 했다. 역시 성격 급하고 단순한 아내의 묘책이었다.


그런데 전에도 감자를 이렇게 믹서기에 간 적이 있는데 손이 매우 많이 갔다는 기억이 났다. 복잡하고 귀찮은 과정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냉장고에 감자를 쑤셔 넣고 빠른 시간 내에 감자를 쪄서 먹자”라고 했다. 감자를 넣은 냄비를 전기레인지에 올려놓고 물로 끊이면 그냥 그걸로 요리 끝이었다. “찐 감자는 전혀 질리지 않고 내가 모두 무한 리필로 먹을 수 있다”라고 말하여 아내를 안심시켰다.


결국 내 의견은 그냥 의견일 뿐 살림에 책임을 진 아내의 방법대로 감자를 전부 믹서기에 갈았다. 감자 껍질을 깨끗이 씻는 과정부터 힘이 들었다. 저녁 내내 감자와 씨름했다. 아내는 믹서기로 갈아 짠 감자 찌꺼기를 냉동칸에 보관하였다. 지금도 아내가 만든 감자전 부침 재료가 냉장고에 남아 있다. 


가끔 반찬이 없고 입이 출출하면 아내는 감자전 부침 원료를 냉동칸에서 꺼내 해동시킨 후, 양파, 부추, 고추를 넣고 버무려 프라이팬에 부쳐 먹는다. 맛이 꽤 좋다. 밀가루가 아니기 때문에 몸에 좋은 건강식품이라 생각하고 맛있게 먹는다.


돌이켜 보면 유년시절부터 60세가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감자는 내 주변을 떠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두리뭉실하게 생긴 감자. 삶으면 맛이 포근포근한 감자. 크기와 색깔도 참 부담 없는 감자. 우리의 삶도 그런 감자를 닮았으면 좋겠다. 


갈등과 다툼이 많은 모난 인생을 한 꺼풀 벗겨 내고, 찐 감자처럼 포근포근한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소송하며 다투었던 감자탕 자매도 세월이 지나면 그간의 미움을 다 씻어버리고 감자처럼 부드러운 관계를 회복할 것으로 생각한다.


시골 어린이들이 불렀던 감자 노래처럼, 미움과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와 화해의 감자의 싹이 나고, 잎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평화, 용서, 화해~ 

가위바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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