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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영변호사 Aug 05. 2021

가장 힘센 약속

“ 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완다) (라틴어)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 표현은 Agreement(Pacta) should be(Sunt) kept(Servanda)이다. 서양의 계약법(contract law)에 나오는 법률 용어이다. 


법의 세계는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계약(contract)은 두 개의 약속(promise)이 만나서 이루어진다. 약속이 계약의 기초 단위이다. 따라서 약속을 깨뜨리면 계약이 무너지고, 계약이 무너지면 계약에 토대를 둔 사회질서도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법은 약속이 깨어지면 약속을 강제적으로 이행시키게 한다.  강제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이와 같이 법의 세계에 존재하는 약속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매매도 계약이다. 매매계약을 하면 이행이 강제된다. 다만, 특별히 매매에서는 계약금만 지불된 초기 단계에서는 위약금을 배상하고 서로 계약을 자유롭게 해약하는 것을 법이 허용하고 있다.


어느 날 사무실에 찾아온 고객은 이제 막 결혼한 젊은 부부였다. 아내는 매우 화사한 모습에 미래를 향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고, 남편도 매우 성실하고 든든해 보였다. 


최근에 그들은 서울 아파트를 분양받으려고 계획했다. 그러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분양 대신에 수도권의 아파트를 직접 매수하기로 했다. 요즈음은 부동산을 보기 위해 직접 중개사 사무실로 가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부동산 매물을 검색했다. 서울에 가까운 인접 도시에 적당한 가격의 아파트 매물이 나왔다. 


드디어 온라인에 매물을 올려놓은 양쪽 중개사를 통해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 내용은 직접 만나지 않고 카톡으로 주고받았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계약금의 일부를 이날 먼저 지불했다. 나머지 계약금은 1개월 후에, 중도금과 잔금은 2개월 후에 지불하기로 정했다. 이후 부부는 안심하고 여느 때처럼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 이 당시에는 아파트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급등하던 때였다. 중도금 지급기일이 가까워지자 매도인의 말이 자꾸 바뀌기 시작했다. 결국 매도인은 계약을 파기해버렸다. 매도인은 가계약에 불과하다, 공유자인 매도인의 처의 동의가 없었다는 둥 여러 가지 이유를 댔다.


매수인 부부는 황당했다. 아무리 아파트 값이 오른다 해도 이미 매매계약을 하고 계약금까지 송금까지 했는데 갑자기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매매에서는 계약금만 지불한 상태에서는 서로가 계약을 해약할 자유를 준다. 계약금 단계에서는 아직 계약의 이행이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신에 해약을 하는 사람은 계약금에 버금가는 위약금을 상대방에게 배상해야 한다. 


이 사건에서도 매수인 부부는 아직 중도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도인에게 계약의 이행을 끝까지 추궁할 수는 없었다. 결국 지불한 계약금을 돌려받고 계약 파기에 대한 책임으로 매도인에게 위약금을 청구하기로 했다. 


매수인 부부는 결국 매도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중에 재판장은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조정을 권유했다. 매도인은 조정할 의사를 비쳤다. 매수인 부부도 이에 동의했다. 결국 지불한 계약금은 그대로 돌려받고, 위약금은 계약금의 70%를 받는 것으로 최종 합의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어떻게 하면 매도인이 매매계약을 파기하지 못하도록 방지할 수 있었을까? 매도인이 계약금을 받은 후에 계약을 파기할 조짐이 보이면, 매수인은 중도금 지급일자가 돌아오기 전에 먼저 중도금 전부나 일부를 매도인에게 송금하면 된다. 중도금의 전부나 일부 지불은 계약의 이행 착수가 되기 때문에, 매도인은 이제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 


단, 중도금을 선지불 하는 것을 금지하는 특약이 있으면 이 방법도 불가능하다. 만약 자금이 충분하다면 계약금을 많이 지불하여 매도인이 함부로 계약을 파기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이 사건은 계약금만 지불되었기 때문에 계약 파기가 가능한 경우였다. 만약 중도금이 지불되었으면 “Pacta Sunt Servanda”원칙에 의해 계약을 파기하지 못하고 이행이 강제될 것이다.


하여튼 이 사건에서 매도인은 계약 파기 이후에도 아파트 가격이 계속 상승하여 결국 이익을 보았을 것이다. 매도인은 위약금을 물어 주고도 그보다 더 많은 가격 상승 이익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수인 부부는 약간의 위약금을 챙기기는 했지만 이 사건 때문에 시간만 낭비하고 결국 실질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힘이 센 법도 보호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깨어지지 않은 약속은 어디에 있을까? 법에서 강제하는 약속보다 더 힘이 센 약속이 있을까?


늦은 오후였다. 한두 시간 더 지나면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강아지 버니와 뒷산을 산책했다. 하늘은 아직도 파랗게 맑은데 가랑비가 오락가락한다. 험하지 않은 산길을 걸어 오르며 몸이 좀 후덥지근했다. 


높은 나무들 사이로 우거진 녹음 아래를 버니와 한가로이 걸었다. 잠시 후에 야트막한 평평한 땅이 나타났다. 황토색 원형 평지이다. 하늘이 나무 주위로 동그랗게 보인다. 


“와, 무지개다!”


오랜만에 반가운 무지개를 만났다. 파란 하늘에 누군가 손을 좌우로 짝 펼치며 예쁜 색을 칠해 놓은 것 같았다. 서울 하늘 아래서 무지개를 본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갑자기 만난 무지개로 잊었던 동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 같다. 산책하던 사람들이 마음속에 저마다의 탄성을 지르며 여기저기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인공의 세계에 살다 잠시나마 원초의 세계로 빨려갔다.  


무지개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는 노아의 대홍수이다. 노아가 홍수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다시는 물 심판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의 표시로 절대자가 하늘에 무지개를 그려주었다. 


파란 하늘에 그려진 예쁜 무지개를 바라보며 노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감쪽같이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물 심판이 없는 걸 보면 어쩌면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은 가장 오래된 약속이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깨어지지 않은 무지개의 약속은 어디에 있을까? 


18세의 꽃다운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6. 25 전쟁 직전인 1949년에 남편과 결혼했고 곧 아기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6. 25. 전쟁이 터졌다.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북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때 그 남편을 65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이미 북한에서 재혼한 상태였다. 83세가 된 그녀는 결혼식 때 신은 신발을 이때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아들도 65세 노인이 되었다. 65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재가도 하지 않고 혼자 아들을 키웠다. 그 아들을 데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남편을 다시 만나는 그녀의 심정을 어느 누가 알 수 있을까?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65년의 긴 세월은 바로 엊그제 같았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도 남편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저지할 수 없었다. 65년 전 남편은 그녀의 마음에선 항상 그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부부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여 평생 동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무지개의 약속을 가장 닮은 삶이 아닐까?


존 핸더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2019년도 현재 106살이고 그의 부인 살롯은 그 보다 한 살 어린 105살이다. 그들은 대학 재학 시절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39년에 결혼하였다. 2019년도가 결혼 80주년이다. 정말 오랫동안 같이 살았다. 


이들은‘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2019. 11. 13. KBS 보도). 부부행복의 비결을 묻자, "항상 절제하는 삶과 배우자를 따뜻한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무지개의 약속으로 살아간 부부이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약속은 종이에 쓴 법률 계약문서가 아니다. 말이나 글로도 표시하지 않은 약속. 파란 하늘에 아름답게 칠해 놓은 무지개처럼 부부의 가슴 판에 깊숙이 새긴 “무언의 약속”. 


이 약속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지 않을까? 단 한번 가슴에 찍은 그 약속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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