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의 북 콘서트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마침 독서모임에서 이슬아의 신작 '끝내주는 인생'을 읽기로 했던 터라, 작가님이 직접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코 앞에서 들을 생각에 다소 설레기까지 했다. 연말인지라 밖은 꽤 쌀쌀했다. 집 안에서도 들리는 '휭휭' 세찬 바람 소리에 그 추위를 직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좋아.' 겨울의 추위를 코트라는 낭만으로 감싸면 되지. 장롱에 보관돼있던 검정 맥코트를 꺼내 입고 회색빛 캐시미어 목도리로 중무장했다. 연말 느낌 가득, 그렇게 낭만을 걸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약 300명의 열렬한 독자들이 스파르타 300의 군단처럼 질서 정연히 행사장에 들어섰다. 마치 연예인 팬미팅을 온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은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젊은 여성 팬들이 많았고 생각보다 중년의 독자분들도 눈에 띄었다. 주인공의 등장에 아이돌 콘서트마냥 그의 신간을(형광봉 대신) 흔들었다. 그런 분위기였다.
이슬아 작가와 그의 남편 이훤 작가가 함께 북토크를 진행했는데, 아니 이 남자 틈만 나면 눈시울이 빨개지는 것이 아닌가. 시를 낭송하다가도 한 번, 본인의 자작곡을 부르다가도 또 한 번. 나도 MBTI 검사를 할 때면 높은 F점수(감성점수)를 받곤 하는데, 그의 F앞에서 나는 빈약한 f일 뿐이었다. 이슬아 작가는 그런 남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서 꿀이 떨어지듯 그를 바라보며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 했다. 그러고선 시선을 돌려 관객들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잘 울지 않는 것 같아요. 점차 소년성을 잃는 것만 같아요. 저는 울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소년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년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끔 마음속에 요동치고 있는 어떤 무형의 고민들이 책이나 영화를 접하고선 그 실체가 무엇인지 형상화되곤 하는데 이번 북토크가 그랬다. 연봉과 자동차 그리고 자가를 더 궁금해하는 세상에서 소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말하면 누군가는 혀를 찬다. 지금도 그런 감상에 빠질 때냐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이 궁금하고, 사랑을 정의하고프며, 자주 웃고 가끔은 눈물을 콸콸 쏟아내고 싶은 걸.
어릴 적에는 모든 것이 생기있었다. 방과 후 흙먼지를 덮어쓰고 공을 차며 뛰어다녔던 운동장, 어머니가 친구들과 맛있는 것 사먹으라며 손에 쥐어준 만 원짜리 지폐, 소풍으로 처음 경주월드에 갔을 때 그 설렘, 선생님의 회초리에 삐져나왔던 눈물, 첫 연애의 이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친구들 앞에서 꺼이꺼이 울었던 일 그 모두.
학교와 집 그리고 웃음과 울음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았던 그 시절을 훌쩍 지나왔다. 그때보다 풍족한데 사는 재미는 글쎄다. 타성에 젖은 어른이 되어 챗바퀴를 굴리는 무력한 햄스터 같이 지내진 않았는지. 현실이 그만큼 버거운 것이어서 우리의 소년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이내 마음에 굳은 살이 박여, 감성과 상상은 점점 더 무뎌지게 된 것일까. 해가 저물 때면 삐죽거리며 늘어지는 그림자는 외로운 소년의 마음일까.
그렇다고 해서 남은 인생을 타성에 젖어 그렇듯 빤히 흘러가게 두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끝내주는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나의 소년에게 손을 내민다. 세상의 희로애락과 저마다 고유한 매일을 기꺼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기위해. 내 창으로 보이는 세상이 당신의 마음에도 담길 수 있기를.
오늘은 그런 날이다.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을 느껴볼 수도 있고, 원동에서 열리는 미나리 축제에 다녀올 수도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읽어볼 수도 있고,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로수길을 걸어 다닐 수도 있다. 또는 직장에서 수십 명의 민원을 마주하고서 기력이 탕진되어 버릴 수도 있고, 최선의 행동이 최악의 결과를 빚어낼 수도 있다. 오늘은 헤어진 연인이 꿈에 나올 정도로 외로움에 사무칠 수도 있고, 퇴근 후에 삼겹살집에서 보는 대학 동기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피어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들에 망설이지 않고 다가서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넘실거리는 감성을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에게 나눠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내일도 무용한 것들을 반기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과 잎으로 계절을 헤아리고 괜스레 사진을 찍어보기도 할 테다. 사람에게 다가가고 때론 다치며 새로운 하루를 마주하는 나날. 웃어도 좋고 울어도 괜찮다. 소박하지만 '끝내주는 인생'이다. 어느새 겨울이 지나갔다. 눈이 녹으면 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