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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Apr 23. 2024

사랑을 말하는 남자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책과 영화를 통해 온갖 사랑의 비유와 은유를 훔쳐보고 서랍 속에 간직하곤 한다. 헤어지자 했던 그녀의 말을 그녀의 마음으로 톺아보고 싶어서. 앞으로 마주할 사랑의 갈래길에서 나침판처럼 꺼내보기 위해서.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의 숲>, 양귀자의 <모순>, 스콧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또는 영화 <콜미바이유어네임>, <우리도 사랑일까> 그리고 <500일의 썸머> 같은 영화를 해마다 곱씹어보면서 말이다.


대학생이었을 시절부터 사랑을 자주 더듬어보곤 했다. 역후 복학생일 무렵 이스북에 시를 종종 올렸다(지금은 흑역사다). 이를 테면 장석남의 <배를 매며>같은. 여튼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 얼큰하게 취해버려 기숙사 통금 시간을 놓칠 때면, 종종 학교 근처 친구 자취방에서 자곤 했다. 5평 남짓한 아늑했던 그의 자취방 바닥에서 도톰한 이불을 덮어쓰고 어둔 천장을 바라보며, 종종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사랑이 뭘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뭘까, 왜 사랑은 식고야 마는 걸까, 어쩌면 내게 던지는 혼잣말들. 친구는 "또 센치해졌노" "자자"같은 경상도 남자의 무심함으로 답을 하다 등을 돌리고선 잠을 잘 뿐이었다.


그가 그랬듯 보통 남자들은 이런 얘기에 자신의 마음을 꺼내놓기 쑥스러워한다. 하지만 사랑을 말하기 주저하지 않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성일 수도 있고 첫사랑이 남겨준 유산일 수도 있다. 당신이 날 보며 발그랗게 웃어주었을 때 기억의 조각. 희미 내 존재가, 내 시간이 당신 덕분에 선명해졌던 경험이 있어서.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다음번엔 사랑을 더 잘하고 싶었으니까.


사랑을 정의하기 귀찮아하던 녀석들이 어느덧 하나둘 먼저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고 있다. 이제는 나보다 전문가들일테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말로 꺼내놓지 않는다. 이들은 삶으로 사랑을 체득해가고 있고, 철학이라는 복잡한 학문으로 구태여 그 의미를 번역하고 싶지 않을 테니. 우리가 결이 비슷해서 친구가 된 것은 아니니까. 학교라는 울타리는 서로를 우연으로 엮어준다. 네가 내 짝꿍이어서,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따위의 것들. 우연이 만들어 토대 속에서 우리는 함께의 순간을 만들어 나가면서 단단해졌다.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겪으며. 애초부터 감정의 선이 비슷해서 우리가 만난 것이 아닐 뿐.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다.


선택지가 주어진 요즘은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곤 한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이들과 만날 때면 항상 요즘은 무슨 책을 읽는지로 운을 뗀다.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본인이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최은영, 아베 코보, 룰루 밀러, 조지 오웰 등 다양한 작가의 책들이 언급된다. 언어와 문장에 열려있는 사람들은 감정의 문틈도 열어놓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어느새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표정 하나 안 바뀐 채, 개똥 철학자가 되어 이것저것 인생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사랑, 이별, 성장, 실패, 인연, 행복, 불행. 각자의 서랍장에 보관돼 있던 영감들꺼내어 자신과 섞인 이야기로. 최근에도 남자 셋이서 새벽까지 와인을 마시며 그런 이야기들만 잔뜩 한 적이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만난 D에게서 연락온 날이었다. 4월 20일이 S생일인데 별일 없으면 저녁이나 함께 먹지 않겠냐고 D가 물었다. D는 나보다 몇 살 많은 형인데 워낙 다정다감한 사람이라, 작년 내 생일에도 미역국을 챙겨준 사람이다. D가 나와 S가 살고 있는 동네로 직접 넘어오겠다고 했다. 대연역 밑에 정갈한 김치찌개 식당이 떠올라 어떠냐고 물었다.

"여기 근처에 김치찌개 잘하는 정갈한 식당이 있는데 어때요? S한텐 제가 말해놓을게요."

"좋아, 그럼 7시에 보자."


당일 오후에 집에서 가볍게 칠레산 소비뇽을 마시며 영화 <대부2>를 봤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

알파치노의 눈빛과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3시간의 강렬한 러닝 타임이 지나니 어느덧 날이 어둑해졌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로로 비가 쏟아지는 거리를 10분쯤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D가 먼저 와 있었고 곧이어 S가 도착했다. 김치찌개 3인분을 주문하고 맥주 한 병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김치찌개를 팔팔 끓이고 술잔을 채운 뒤 "S님 생일축하해요"라고 말하며 건배를 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2차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엔 근처 맥줏집으로 가려다가, 이왕 생일인데 비싼 술을 먹자며 와인을 사서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 레드 와인 한 병이 더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을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달지 않고 적당히 드라이한. 세븐일레븐에 들러 와인 진열대를 둘러보다가 4만 원짜리 칠레산 화이트 와인을 골랐다. 몬테스 알파 샤도네이라고 칠레산 와인인데, 검색해 보니 열대 과일 풍미에 산미가 괜찮다고 했다. 안주로 빠다코코넛과 제크 같은 비스킷을 샀다. 집에 도착해 둘에게 문 앞에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급한 청소부터 슉슉.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 담고, 돌돌이 테이프로 카펫 위를 닦았다. 불을 끈 채 은은한 주황빛 조명등을 켜고 접이식 테이블을 편 다음 노래를 틀었다. 이 둘이 근래에 왕가위 감독 영화 <중경삼림>과 <패왕별희>를 봤다고 들어서, 왕가위 감독 영화의 미장센 가득한 OST를 틀었다.


와인잔에 화이트 와인을 먼저 적당히 따르고 건배를 했다. 우리에게 서론은 필요 없었다. 본론부터 바로 튀어나왔다. 지난 연애와 지지난 연애. 지나온 연애들이 남긴 침전물에 대해. D가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랑만 하고 싶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D가 하림의 노래를 듣자고 했다. 사랑이 사랑으로 잊혀지네.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 그 노래로 남은 너'

D는 '속절없이'라는 표현이 너무 적확하다고 했다. 저 가사를 쓰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까. 테이블 위에서 잔을 부드럽게 돌리며 와인이 만들어 내는 작은 회오리를 지켜봤다. 그렇게 2절까지 하림의 노래를 계속 들었다. 이번엔 내가 <500일의 썸머> 마지막 엔딩씬을 다시 보자고 했다. 톰이 썸머를 보내고 어텀을 만나게 되는 그 장면을. 영화 <500일의 썸머>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여자 썸머를 만나 사랑에 빠진 톰. 그에게 끌리지만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썸머. 이를 알면서도 그녀와 만난 톰이지만 점차 우리가 무슨 사이냐며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가라앉는 공기와 숨 막히는 정적. 누군가 말을 하지 않으면 왠지 하루 종일 음소거일 것 같은 데이트.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되고 톰은 한동안 슬픔에 허우적댄다. 누구나 그렇듯 시간이 약인 법. 허우적거린 시간 끝에서 톰은 자신부터 되찾기로 결심한다. 본래 하고 싶었던 건축가 일을 다시 꿈꾸는 것. 꿈을 좇아 구직 활동을 하던 톰이 면접을 보러 한 회사에 방문한 날, 그날 그는 또 다른 면접 대상자인 한 여성을 만난다. 어디선가 자신을 본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계속해서 웃게 되는 자신의 얼굴에, 자신의 면접 차례가 다가왔을 때 톰은 깨닫게 된다.

'우연, 항상 일어나는 건 그것이다. 톰은 마침내 기적이란 건 없다는 걸 알았다.'

'운명이란 건 없다.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그가 용기를 내어 말한다. 면접을 마치고 차 한 잔 같이 마시자고 그리고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를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정식 자기소개.

"My name's Tom"

"Nice to meet you, I'm Autumn."

그녀의 이름은 어텀이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 것이다. 톰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우주적 의미가 지구적 이벤트로 끝나지 않았을까. 매일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며 기억나지 않는 익명의 얼굴처럼. 타인도 나에게, 나도 타인에게.


작년에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500일의 썸머>를 몇 번씩이나 돌려보곤 했다. 썸머 같았던 그녀의 마음을 반추하기 위해 그리고 다가올 인연인 어텀을 그려보기 위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남자 모두 숨죽이며 봤다. 썸머와 어텀을 이별과 운명으로 치환하며 봤을 테다. 그러고선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자며, 우리 셋다 용기 좀 내자며 그렇게 또 와인잔에 와인을 채우고 쨍그랑 잔을 부딪혔다.


어느새 남자 셋이서 와인을 세병이나 마셨다.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을 공유하며 와인을 마시는 이런 순간이 너무 좋다. 평소에 조용한 편인 S는 F감성에 몹시 심취해 있었다. 평소 얘기를 잘 꺼내지 않 전 연인과의 아쉬움과 후회를 꺼내놓았다. D는 와인을 마시니 기분이 무척 좋다고 했다. 심지어 이병률 산문집 일부를 직접 낭송하기도 했다(남자 셋 있는 단출한 자취방에서). 분명 우리 집이 이마트 트레이더스였더라면, 족히 와인 5병 이상은 쌓였을 것이다. 책과 노래 그리고 영화에서 파생되는 사랑의 메시지들을 계속해서 곱씹고 뱉고 다시 주워 담았던 밤.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기만 했다. 사랑 이야기를 사랑 이야기로 답해주는 사람들. 오래도 걸렸다. 이제야 나의 사랑 이야기들을 함께 해줄 F철학자들을 만났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모든 감성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번엔 더 맛있는 와인을 준비해야지. 우주적 이벤트 같은 우리의 우정이 지구적 이벤트로 강등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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