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후에야 숲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찾아냈다. 종착점에 닿기 전까진 어딘지도 모르고 걸었다. 수도 없이 감사하다고 되뇌었다. 길이 준 가르침과 나도 모를 미래에 대해." -장마크 발레, 영화 '와일드' 중에서-
리즈위더스푼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와일드'를 보고 무작정 힘닿는 데까지 걸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극 중 셰릴(리즈위더스푼)은 가난, 폭력, 이혼이라는 가정환경을 가졌음에도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기에 고난을 헤쳐갈 수 있었다. 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그러다 모든 후회와 슬픔을 뒤로한 채 4,285km에 이르는 PCT 대장정을 나서게 된다. 왜 그녀는 추락의 끝자락에서 걷기를 선택했을까. 대장정 동안 길은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주었을까. 왜 자꾸 영화를 곱씹게 되는 거지. 어느새 30대 중반이 되었고, 회사 생활은 안정적이고, 책과 영화를 곁에 두며 살고 있고, 자주 달리며 땀을 흘리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좋은 순간들을 켜켜이 쌓아가고 있는데, 뭔지 모를 이 공허함과 무의식 속에 쌓이는 이 불안은 뭘까. 나도 걸어야겠다. 길 위에서 직접 그 대답을 들어보고 싶었다. 설령 듣지 못할지라도.
"준표야, 나랑 국토대장정 떠나보지 않을래?"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고민의 여지없이 바로 "너무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너무'라는 부사어가 수식될 정도면 진짜 가고 싶은 것. 우리의 목표는 단순했다. 시에서 시로 걸어서 넘어가기. 단순하고 야생적인 코스로 가보기. 직선거리가 30km 이상을 넘어가면 카카오맵 지도에 도보 동선이 조회되지 않았다. 이곳저곳 출발과 도착으로 짝지어보다가 적절한 곳을 찾아냈다. 김해에서 밀양까지. 김해 가야대역에서 출발해서 밀양역까지 30.7km 그리고 예상소요시간 약 8시간.
준표는 5,6년 전 독서모임에서 만난 인연인데 '참' 좋은 친구다. 맑고 투명하고 진정성 있는 사람이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준표는 도반 같은 존재랄까, 자신을 계속해서 수련해 나가는. 물론 나는 종교가 없고 불교를 모르지만 그 단어로 설명이 맞아떨어지는 친구다. 우리가 걷기로 예정했던 날이 다가올수록 현생에 치여 꼼꼼한 준비를 못하고 있을 때, 준표가 먼저 나서서 계획의 틀을 세워줬다. 준표로부터 전송된 카카오톡 메시지가 그 예다.
"훈소의 걷기 여행(걸어서 한국 속으로).hwp"
(준표의 성이 '소'이다.)
"우선 우리 이야기 나눈 걸 토대로 1차 안 정리해 봤어~ 지금 보니 온열대책 같은 것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기도."
서른네 살, 우리는 아직 청춘이고 준표는 그 청춘의 낭만을 여태까지 믿는 소년 같은 친구. 먼저 나서자고 한 건 나지만 날이 다가올수록 준표의 진심이 내 마음을 능가했을지도.
초록잎들로 무성해진 4월 끝자락, 디데이가 되었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욕부터 나왔다.
"좆됐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전날 저녁 독서모임에서 뒤풀이로 술을 제법 마셔서인지, 미쳐 알람소리를 듣지 못했다. 술을 마셔서 알람소리를 듣지 못했던 적이 없었는데 "좆됐다"라는 단어 외엔 그 순간을 표현할 다른 단어가 없었다. 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준표야진짜미안하다 지금일어났는데근처에카페라도있으면들어가있어 내가점심이라도맛있는거살게."
다급하고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래퍼 '아웃사이더'처럼 말을 마구 내뱉었다. 준표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훈쓰야 진정하고 지금 니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정신없어 보이는데, 난 진짜 진짜 괜찮으니까 씻고 천천히 준비하고 와도 된다."
그 순간만큼 이 친구는 나한테 그 어떤 역사의 성인(聖人)보다도 더 성인의 경지에 가까운 존재로 등극했다. 예수님, 부처님, 알라님 미안합니다. 나한테 성인은 준표예요. 고양이 세수만 하고 반바지에 반팔티 그리고 땀이 잘 흡수되는 기능성 아우터를 걸치고 나섰다. 다행히 날이 무척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을 정도로.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미니멈 국토대장정. 갈맷길이나 올레길처럼 관광용으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보니 국도를 따라 자동차들과 함께 걸었다. 때때로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소음 때문에 허공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을을 낀 골목에 들어서거나 논밭을 낀 시멘트 길 위를 걸을 때는 평화로운 풍경에 신이 나서 사진도 찍고 적막을 틈 타 온갖 얘기를 했다. 전봇대에 걸린 전선, 가구 공장 내부에 부착된 현수막(품질 기준은 고객이다), 밀짚모자에 스카프까지 둘러 맨 멋쟁이 허수아비, 허름한 삼거리 뷔페식당, 내천에서 빛나던 윤슬, 태평하게 여물 먹는 소. 기성세대로 접어든 우리의 역할, 옛날 과거 시험을 보러 능선을 넘었던 수험생들의 고난,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 가정의 안녕을 위한 나의 역할 등.
풍경을 눈에 차곡차곡 담고 서로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배꼽에서 허기진 알람이 들려왔다. 좀 더 걸으면 한림면이 나오는데 거기 가서 끌리는 아무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부산광역시에서 왔고 한림면은 면인데 고작 몇 시간을 도심 밖에서 걸었다고 한림면에 들어서니 도심처럼 느껴졌다. 미용실이 보이고 부동산 공인중개사무소도 보였다. 준표가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보더니 10분 정도 더 걸으면 나름 한림면에서 인기 있는 칼국수 식당이 있다고 했다. 뭐든, 너무 좋지. 그렇게 10분을 걷는 도중에 어느 교회의 외벽에 부착된 알파벳이 눈에 띄었다.
'Go is Lov'
'고 이즈 러브'
'가는 것은 사랑이다'
d와 e가 어떤 이유에선지 떨어져 나갔을 터. 그럼에도 걷는 우리에게 당장 보이는 단어는 운명 같은 메시지였다. 우리는 가는 중이었고, 그 길에 사랑이 넘쳐날 것만 같았다.
즉흥적으로 들른 '한림칼국수'집은 인기장소답게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옛날칼국수 한 개와 얼큰 칼국수 한 개를 시키고 통통김밥 두 줄을 시켰다. 약 2시간을 걸었는데 입맛을 돋우기엔 충분했다. 배까지 든든히 채우고 나니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진짜 레이스의 시작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는 몸풀기라고 해야 할까. 한림면을 벗어나고 몇 개의 마을들을 지나쳤다. 국도를 따라 걷는데 길에서 유독 눈에 자주 보였던 나무가 국도에 심어져 있었다. 이 나무 자주 봤는데 이름이 뭘까.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검색하니 '이팝나무'라고 했다. 눈꽃 치즈 같이 생긴 꽃들이 핀 나무. 도로변에 핀 노란 꽃들은 꼭 유채꽃 같기만 한 갓꽃이었다. 이팝나무와 갓꽃을 계속 지나치다 보니 낙동강에 다다랐다. 낙동강의 윤슬은 은빛으로 산란했고, 오후의 햇빛은 적당히 작열했다.
5시간 정도 걸은 끝에 다리를 하나 건너니 밀양의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봄철 특미 웅어회'라는 현수막과 간판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밀양에선 웅어회가 유명한가. 능선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걷는데 준표의 종아리가 부황을 뜬 것처럼 익어있었다. 서로의 빨개진 종아리를 보며 준표가 그랬다. "훈쓰야 나 영화배우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야." 갑자기 뭔 소리인가 싶어 "왜?"라고 물으니 "피부 관리 안 해도 되니까."라는 준표의 대답. 준표가 미친 건가. 그렇게 또 걷다가 이번엔 내가 말했다. "준표야, 길에서 와인 냄새 안 나나?" "그거 거름냄새." 명료한 한마디. 영화배우가 되지 않음에 감사해하고 거름 냄새를 와인 냄새로 승화시키는 맛이 간 우리. 그게 또 재밌다고 벌겋게 익은 홍당무 둘이서 헥헥 웃으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남은 거리는 대략 7km. 최종코스로 언덕길에 활주로 같이 뻗어진 평탄한 도로가 나왔다. 사방엔 작은 마당에 개가 묶인 시골집 같은 주택들만 즐비해 있었다. 그렇게 밀양역까지 쭉 이어져있는 평화롭고 고요한 여정. 어느새 가져온 물도 다 떨어졌다. 주변에 마트나 편의점도 없었다. 우리만의 '캐스트 어웨이'. 이대로 족히 2시간 가까이 걸어야 했다. 배구공 '윌슨' 대신 준표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젓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찾아온 것.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되지 않는 시간. 걷는 건지 걸어지는 건지 분간이 안될 때에 바라본, 붉은빛이 낀 지평선은 처연하면서 아름다웠다. 앞서 말한 영화 '와일드'에서 셰릴의 엄마는 이런 말을 한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는 거란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단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을 제외하고 일출과 일몰은 출근과 퇴근일 뿐이었다. 그 아름다움을 생각해보지 못하고 363일을 지나오기 마련. 매일에 속아 매일을 낭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오늘 바라본 일몰이 이토록 아름답기만 한데. 매일 해가 진다는 이유로 무던히 흘겼던 것일까.
나는 지금 왜 걷고 있나. 영화가 내면의 무엇을 자극했던 것일까. 길은 시원하게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한 보의 걸음으로 종착지에 가까워지고, 내 의지로 만 번 이 만 번 삼만 번의 성공을 쌓아간다는 느낌이 좋았을 뿐. 그렇게 감성에 잠겨있던 때에 준표의 핸드폰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투나-아-아--아-잇 위 아 영. 노래가 너무 좋아 준표에게 어떤 곡인지 물어보니 Fun의 'We are young'이라고 했다.
Tonight we are young
오늘 밤 우리는 젊어
So let's set the world on fire
그러니 세상을 불태워버리자
We can burn brighter than the sun
우리는 태양보다 밝게 빛날 수 있어
태양 아래 장장 30킬로미터를 걷고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 같았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일의 특별함을 매일의 진부함으로 덮어버리지 말자고. 우리는 여전히 젊고 태양보다 밝게 빛날 수 있다.
끝없이 뻗어진 길 위의 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밀양역에 도착하면 근처 맥주집에 들러 살얼음 생맥주 한 잔을 벌컥 마셔야지. 그 상상 하나로 남은 거리를 걸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불에 담긴 환영처럼.
'환영합니다. New 가곡동'이라는 패널이 보였다. 다행히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과 다르게 쓰러지지 않고 밀양역에 당도할 수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고 서둘러 맥주집으로 향했다. 상상한 대로 살얼음 생맥주를 한 잔씩 시켰다. 식도의 모양이 느껴질 정도의 기분 좋은 따끔함이 느껴졌다. 5,6킬로미터 달리기를 하고서도 맥주를 종종 마시지만 오늘만큼의 청량함과 시원함에 비할 바는 안 됐다. 한 잔에 한 잔 더 깔끔하게 두 잔을 비운 후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짧았던 국토대장정 일정이 끝났다.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이었던가."
영화 '와일드'에서 셰릴이 종착지에 도착하고 나서 독백으로 뱉었던 말.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성적이었던가. 놓치고 있었던 길 위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길 위에서 마주한 'Go is Lov'를 떠올리며, 시속 100km의 속도로 부산으로 향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