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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Aug 16. 2024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의 꽃말을 아니?”

지역 축제에 주차 요원으로 차출되어 팀장님과 단 둘이 입출입 차량을 통제하고 있을 때였다. 주차 차단기 받침대 쪽 지면에 세잎클로버가 꽤 수북이 자라나 있었고, 팀장님이 그쪽을 훑어보시더 내게 것이었다. 나는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알지만 세잎클로버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팀장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시고선 말했다.

“세잎클로버는 행복을 뜻하고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뜻한단다. 사람은 때로 보이지 않는 행운을 찾기 위해 눈앞의 행복을 짓밟는다는 게 우습지 않니?”

그 말을 듣고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꽁꽁 숨어있는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 세잎클로버 더미를 파헤쳤던, 네잎클로버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날이.


행복과 행운, 국어사전에서 둘은 유의어로 엮이지만 내게는 닮지 않은 서로다. 복은 가깝고 행운은 멀다. 행복은 길고 행운은 짧다. 행복은 많고 행운은 적다. 행복에 비해 좋을 것이 없어 보이는 행운. 그럼에도 우리가 행운을 바라는 건 그 막대한 크기 때문일까. 단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옛날의 내가 파헤쳤던 세잎클로버의 더미 속에서 결국 네잎클로버를 발견하지 못했듯이, 행운만을 좇다가 눈앞의 행복을 저버린다는 건 무척 불행한 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일상의 행복을 돌아보게 된다. 극 중 혜원(김태리)은 서울의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박한 고향 집에 잠시 쉬어가기로 선택한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영화 속 사계절 동안 혜원이 손수 만드는 계절 음식과 그 음식을 같이 먹는 친구들과의 잔잔한 우정이다. 한겨울에 먹는 수제비는 몸과 마음을 뜨끈하게 녹여주고, 여름철 친구들과 계곡에서 마시는 담금주는 청춘을 상기시켜 준다. 잠깐만 쉬고 간다는 혜원의 시골 생활이 어느새 사계절을 지나간다. 겨울이 와야 정말로 맛있는 곶감을 먹을 수 있다던 엄마의 옛 말을 떠올리며, 혜원은 서울에서 잊고 있었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이 주는 선물... 밤 조림이 맛있다는 건 가을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혜원의 말처럼 시간이 매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이야말로 세잎클로버이지 않을까.


올해 2024년은 계절과 우정을 잔뜩 즐기고 있다. 새해를 맞아 책 친구들과 함께 금정산 고당봉에 올랐다. 새해를 보러 새벽 일찍 부랴부랴 밖으로 나간 게 근 20년만. 그런데 왠지 올해에는 새해를 보고 소원을 빌고 싶었다. 영화 <러브레터>의 명장면처럼, 정상에 올라 새해를 앞에 두고 소원을 힘껏 외쳤다.

"끝내주는 2024년이 되게 해 주세요!"

정말 소원이 이루어지고 있어서일까. 1월 1일부터 매일의 세잎클로버들을 사랑하고 있다.


올 겨울의 시작부터 기름진 방어회를 잔뜩 먹었다. 소주랑 함께 먹으니 더 감칠맛이 났다. 그리고 책 친구들 11명이서 무주의 스키장에 다녀왔다. 부산에서 보지 못한 하얀 눈을 한아름 눈에 담고, 그 눈에 자주 체중을 실어 스키장비와 함께 파묻혔다. 봄을 맞아선 향긋함이 가득 밴 미나리 삼겹살을 먹었다. 먹기 좋게 자른 삼겹살에 살짝 구운 미나리를 돌돌 감아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4월에는 경주의 벚꽃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에서 봄을 만끽하며 뛰었다. 여름의 초입, 영화의 전당 야외상영회에서 영화 <라붐>을 봤다. 소피 마르소의 귀에 헤드셋이 씌워질 때 큰 음향으로 퍼져 나오는 OST <Reality>는 청춘의 감각을 자극했다. 6월 말에는 독서모임에서 연이 생긴 남자 멤버들과 우정 MT도 다녀왔다. 자정 무렵, 황병기의 <미궁>을 들으며 서로가 꺼내놓은 무서운 이야기는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해주었던 납량특집 분위기 같았다. 서늘하면서도 여름다워 좋았다. 8월로 접어든 여름의 절정, 글로 만난 사람들과 청도에 놀러 갔다. 운문사 근처 계곡에 발만 담근다는 것이 어느새 평상을 빌리고 계곡물 한가운데서 본격적으로 자유형을 하고 있었다. 밤에는 서로 준비해 온 와인을 마셨고, 새로운 직장에 취업한 동료 작가를 위해 건배를 했다. 날은 뜨거웠지만 마음만은 안온했던 시간이었다.


어느새 입춘이 지나갔고 더위도 아주 느슨히 누그러지는 오늘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가을에는 어떤 세잎클로버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감말랭이와 단풍이 먼저 떠오른다. 경주 국제 마라톤 21km 하프코스도 있구나. 아, 그렇다고 네잎클로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고유한 일상의 행복을 소중히 하면서 그러다 문뜩 네잎클로버가 발견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러나 오지 않는 당신을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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