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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츠네 Sep 05. 2023

잠깐이지만 다이아몬드

나는 반짝이는 존재일까?

30대가 되면 항상 반짝일 줄 알았다. 어릴 적 바라본 30대는 돈도 많고 취미생활도 하고 애인도 있고 뭐든 만능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웬 걸, 30대가 되니 빛나기는 커녕 어두워질 기회만 더 늘어난 게 아닌가. 남들의 삶을 훔쳐볼 기회도 더 많아져서일까. 비교를 많이 할수록 자존감은 떨어진다. 인간이 자의식을 형성할 때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식하게 되면서 비교하게 된다고 한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의식 형성이 끝난 줄 알았더니 되려 나이를 먹을수록 본능과 가까워지는 것 같다. 청소년일 때는 외모와 성적이 다였다면, 직장인이 되고서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기준들이 보인다. 직업, 재산, 부모의 재산, 건강 등등 비교할 카테고리 가짓수를 세려면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모자라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절망감이 불쑥 문을 따고 들어와 머릿속을 어지럽힌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한없이 우울해져서 긴긴밤을 불안으로 지새우고 때로는 술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이 가구에 붙은 빨간딱지의 형상으로 떠오르고, 어느 날은 미래의 절망까지 덮쳐 오기도 한다.

'혹시나 부모님이 큰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동생이 취업을 못하고 취준생 기간이 길어지면 어떡하지?'

'회사와 집만 반복하다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늙어가면 어떡하지?'

좋은 생각보다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노래 가사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이어진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마뜩잖게 느껴지고야 만다.


자아를 갉아먹는 시기에 인스타그램은 독극물이다. 연예인들만 팔로우한 게 아닌 데도 내 주변의 삶들이 연예인의 삶처럼 보이곤 한다. 호화로운 호캉스, 화목한 가족 여행, 백년가약의 결혼소식, 연인 간 닭살 넘치는 데이트, 새로 뽑은 신차 그렇지만 나는 회사에서 야근 중이다(물론 나도 데이트와 여행을 다닐 때가 있지만).

'와 손흥민 경기 보러 런런까지 갔네.'

'저 연인은 둘 다 선남선녀네.'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신형 그랜저를 뽑았네.'

'나는, 나는, 나는...'

인스타그램은 내 평범한 일상을 비루한 일상으로 강등시킨다. 주변이 황금의 제국으로 보인다.


mbti 심리검사를 했을 때 외향적으로 나오지만 종종 사람 많은 곳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잘생긴 사람, 키가 큰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직업이 대단한 사람들 속에 섞일 때면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병풍이 되고 싶지만은 않아서, 빠져나갈 구실만 찾으면 그 자리를 바로 떠버리곤 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학생회가 주최하는 행사는 대부분 빠졌던 것 같다. 3월 신입생 엠티도 참석하지 않았다(지금에 와선 땅을 치고 후회한다). 때로는 도망이 도움이 되지만 도망만 다녀서는 나의 존재가 아무도 몰라주는 지하 아래에 묻힐 것만 같았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현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정우성이 될 수도 없고, 백만장자가 될 수도 없지만 그렇게 되어야만 세상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피부색에도 퍼스널컬러가 있듯이, 개성에도 매력에도 저마다 고유한 퍼스널 컬러가 있으리라.


나의 퍼스널 컬러는 뭘까. 말을 잘하고 남자치고 감성이 풍부하다('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볼 때마다 운다). 독서를 좋아하고 영화를 사랑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독서모임이 해답의 열쇠였다. 약 5년간 독서모임에 참여해 오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이도, 직업도, 취향도 제각각이었다. 멋진 사람들이 많았다. 책이라는 매개체는 각자의 인생철학을 끄집어낸다. 사랑, 우정, 행복의 정의를 독서모임에서야 입 밖에 내어보게 된다. 그렇게 나의 철학을 꺼내놓게 되고 타인의 인생관을 들여다보게 되고 건강한 의견들이 서로 영글어 간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모임장이 되어 진행을 하게 되었고, 나의 매력을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도 스스로 발견해가기도 했다.


"키츠네님은 남의 장점을 잘 봐주시고 스스럼없이 얘기해 주시는 자존감지킴이세요."

"키츠네님은 옷을 댄디하게 잘 입으시는 것 같아요."

"키츠네님은 무슨 얘기든 우선 끄덕여주시고 호응해 주셔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어요."

절대 자기 자랑이 아니다. 매력과 개성은 때때로 주먹밥 등 뒤에 찰싹 붙어있는 매실 장아찌 같기에, 누군가 뒤에서 봐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사람은 기본적인 인정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심 있는 분야를 열심히 찾아다니다 보면 누군가 나의 장아찌를 발견해 주는 사람이 분명히 생긴다. 맨밥뿐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알찬 주먹밥으로 성장하게 되는 거다.


작년 연말에 독서모임에서 '책인싸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독서모임 멤버들 간 한 해를 돌아보며 팀별 게임도 하고 교류도 하는 행사였다. 3~40명이 참석하는 행사에 내가 진행자로 마이크를 쥐게 되었다. 어릴 적 학교 축제나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진행을 보는 학우들을 보면 그저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 행사에서 나는 그저 박수셔틀일 뿐이었다.

'인싸 중에 인싸만 저런 마이크를 쥐겠지.'

이제는 그들이 쥔 마이크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꽤나 진행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내외부에서 발견해 온 덕에 자신이 있었다. 미리 짜본 대본을 복기하며 행사가 진행되는 시뮬레이션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지루한 행사가 아니라 활기차고 재미난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 데에 재능이 있다고도 생각하니까. 행사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참여해 주었고(반주 맞히기 퀴즈 시간엔 즐거운 고성도 오갔다), 또 사회자가 진행을 잘했다는 칭찬도 꽤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신 것만 같았다. 다양한 직업과 개성을 지닌 멋진 사람들 앞에서 그 순간만큼은 나도 빛나고 있었다. 반짝 반짝이는 황금 사이에서 한 순간이라도 빛날 수 있다면 그 순간은 다이아몬드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24시간 반짝일 순 없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빛나는 고유한 반짝임의 순간은 누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내게 더 자주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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