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문제, 환경의 문제
'척추 교정 수술비 1700만원' 이 밈이 되는 시대.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도모하고자 저는 동네 스포츠 센터 운동 프로그램에 등록했습니다. 월, 수, 금요일 오전마다 스포츠 웨어를 갖춰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출석, 근력과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끙끙대지요.
일과에 통일성을 주기 위해서 저는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에도 한 시간 정도 집에서 홈 트레이닝을 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저는 어떤 화요일과 목요일에도 운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특별히 게을러서 그랬을까요? 혹은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의지가 충만하지만 꼭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매일 운동하겠다는 결심이 변하는 걸까요?
답은 물론 '의지보다는 환경의 문제' 일 것입니다. 스포츠 센터까지 간다면 옆에서 누구나 운동을 하고 있고 등록한 김에 열심히 해 보자 하는 마음을 먹기도 쉽지요. 반면 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외부적인 동인이 없는 화요일, 집에서 나의 의지만으로 몸을 움직이는 일은 월요일에 비하면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학원에 등록했다', '남이 관리를 해 준다', '이미 돈 냈는데' 같은 의지와 상관없는, 혹은 의지를 실행하게 해 주는 도움 요소들을 사실 우리는 꾸준히 운동하기 위해 많이 배치합니다. '강철 같은 의지' 라는 경구가 있을 만큼 개인의 의지와 노력은 예로부터 추앙받아 왔지만 사실 그런 사례는 많이 드문 편입니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왜 신화일까요? 누구나 그런 강한 마음을 먹는다면 못 할 게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요즘 세상은 의지와 노력이 있으면 많은 기회가 열려 있어 보입니다. 대학에 등록하지 않아도 강의를 녹화해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원하는 직업을 위해 전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코스들도 찾아 보면 다양하게 있습니다.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의지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무한한 자원일까요?
꾸준히 노력을 한다는 말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 노력의 난이도는 급격하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 이를테면 복장을 갖추어 입고 스포츠 센터에 있을 때 지시에 따라서 열심히 운동하기란 최고로 쉽습니다. 반면 그렇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보자면 어떨까요? 공교롭게도 동네에 스포츠 센터가 없습니다. 일과가 들쑥날쑥해 같은 시간에 운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운동 방법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서, 그냥 팔굽혀펴기를 하기로 합니다. 매일 꾸준히 하려면 그야말로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니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의지만으로 해결을 하려면 동시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기간이 길어진다면 어떨까요? 한두 달이 아닌 오 년,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면 과연 의지만으로 충분할까요?
올해는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정상적인 등교가 특별한 일이 될 만큼 평소와 다른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초등 교사들은 학력에서 중간 지대가 없어졌다며, 이런 성적 분포는 처음 본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비대면 · 온라인 수업을,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확실히 학습하고 관심이 가는 부분을 더 찾아볼 수 있도록 활용이 가능했던 일부 학생들과, 선생님과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이해도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자리에 앉아서 수업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등 학교에서 물리적으로 제공하는 환경이 사라지자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그룹이 나뉘었기 때문이지요.
초·중학교가 아니더라도 온라인 강의와 평가를 마주한 대학생, 갑자기 재택 근무를 하게 된 직장인 등 다들 나름대로 환경의 변화를 겪었을 테고 그로부터 '앉아서 하던 대로 집중하기만 하면 되는', '의지가 필요할 뿐인'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체감했을 것입니다.
환경은 의지와 행동을 만드는 동인입니다.
'쥐 공원(rat park) 실험' 으로 알려진 브루스 알렉산더의 중독 실험에서, 그는 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절반에게는 넉넉한 공간과 온도, 충분한 먹을거리과 놀거리가 있는 환경을 주고, 절반은 비좁은 우리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두 그룹에게 똑같이 순수한 물과 모르핀을 탄 물을 제공해 쥐들이 선택할 수 있게 했지요. 공원에 있는 쥐들은 순수한 물을 더 많이 마셨고, 우리에 갇힌 쥐들은 모르핀을 탄 물을 더 많이 마셨습니다. (무려 16배나 더 그랬다고 합니다.) 마약 중독에 있어서도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이런 실험 결과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기 좋도록 침실 창문 방향을 고려하거나 하는 일상적 시도들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의지가 부족해서' 라거나,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데 노력이 부족하다' 같은 말로 환경에 존재하는 문제를 가리는 일은, 우리에게 온갖 복잡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이 내재하는 요즘 그리 유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과 의지를 만드는 환경이라는 요소를 발굴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만 하겠지요. 개인이 가진 문제가 사회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열심히 노력하기 위해 환경을 만든다.' 이 두 문장은 그러므로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지는 무한한 정신적 자원이 아니라 환경에서부터 계속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노력에 격차가 있는 것, 누가 나보다 열심히 하는 것, 혹은 열심히 하지 못하는 것은 잘 들여다봤을 때 어쩌면 환경의 격차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원한다면 배울 수 있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이 사회. 우리 사회가 기회로서는 열려 있다고 하지만 환경으로서는 어떻습니까?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노력하는 방법, 지금 다른 일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상황인지와 같은 환경들은 얼마나 보장되어 있나요?
의지는 강철로 된 칼이 아니라 물과 빛이 충족되는 토양에서부터 자라나는 꽃입니다.
마음은 소모하는 자원이 아니라 살아가는 결과물로서 날로 풍성해져야 하는 것이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회가 누군가에게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니고서야 뚫을 수 없는 환경의 낙차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개인의 부족함에 집중하기보다 그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무형의 단단한 벽을 두고 그 의지를 가로막는, 강철 같은 벽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