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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y 31. 2021

49. 기록의 이유

의미도 모른 채로 언제부턴가.

 사람은 왜 기록을 하는 걸까? 흔한 질문이지만 저 주어 자리에 무엇을 넣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나'를 넣으면 너무 협소한 고민이 될 것 같고, '우리'라 하자니 그 범위와 경계가 흐릿했다. '사람'이라는 평탄하고 일반적인 단어로 도망쳐버리기는 했지만 글쓰기의 기원 같은 원론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사실 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무엇을 기록하는지, 왜 기록하는지, 그 기록은 당신에게 무엇이 되는지 등….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쌓고 쌓다 보면 적어도 나 하나만 존재했을 때보다는 완성된 답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계기는 SNS에서 본 한 친구의 게시글이었다. 정확한 내용보다는 그냥 그중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는데, 매일 기록하는 사람이 되자는 식의 문장이었다. 그 문장 자체에 감명을 받은 건지, 평소 인상 깊다 느끼는 친구가 쓴 문장이어서 곱씹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곤 기록, 기록이라, 하는 생각과 함께 주변을 둘러봤다. 당장 펼쳐볼 만한 기록물이 있나 싶어서였는데, 역시나 없었다. 글을 쓰는 것과는 별개로 꾸준히 일기라던가 여타의 기록을 남긴지는 얼핏 생각해도 예전의 일이었다.


 딱히 볼 게 없다는 아쉬움과 기록하지 않는 삶을 살았나 싶은 약간의 우울감이 찾아오던 찰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기록을 해야 하지?'


 그게 시작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기록을 하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졌다. 왜 기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딱히 배우지 않았다. 각자 실천하다 보면 그 장점을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했나? 그때 내게 기록하라고 시킨 어른들도 딱히 매일 기록하는 삶을 살진 않았을 것 같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니까 무작정 쓰게 한 걸 지도 모르겠다. 무튼 그렇게 초등학교 때는 일기라는 숙제의 형태로 간신히 기록을 이어왔지만, 중학교 때부터 기록은 완전히 자기 계발의 소관으로 밀려났다. 대한민국의 교육 경쟁에서 삶을 기록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쟁에서 유의미한 기록이라고 해봤자 오답노트 정도일까.. 무튼 그때부터는 학교에서 기록에 대한 고찰을 이어갈 만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곤 고등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개인의 계발적 역량이 주요한 경쟁력이 되는 시기. 이 정도로 들으면 기록에 대한 깊은 고민과 노력이 이어졌을 것 같지만 그건 오산이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기록이 가장 수단화되던 시기였다. 학교에서 기록이란 곧 경험에 대한 증거였고, 얼마나 더 많은 스펙을 쌓았는지를 명시화하는 척도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한 개인으로써 의미를 둘 만한 기록 행위는 정말 말 그대로 '알아서 하는' 개인의 소관이었다. 그게 당연하다 볼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기록하는 습관'을 위해 그렇게나 많은 교육을 받아야 했던 걸까?


 아, 이러다간 정말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예전의 기억, 더 예전의 기억을 뒤져봐도 형식적인 기록의 의미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겠는, 대충 집은 도덕/윤리 교과서를 펼쳐도 비슷한 답은 나올 법한 재미없는(일반적인) 의미. 저 의미가 가치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저걸 기록의 총체적인 의의라고 받아들이기엔 이제까지 너무 좋은 기록들을 많이 만났다. 개인의 시공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타인의 우주에까지 그 빛을 미치는, 오늘날엔 소위 '작품'이라 불리는 것들을 말이다. 그 기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그런 종류의 기록을 꿈꾸는 사람 중 한 명으로써, 기록에는 더욱 세밀하고 미묘한 의의가 있다고 믿고 싶다.


 개인적 고민의 한계인 걸까. 이젠 애초에 온전한 기록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존재론적인 생각까지 든다. 이런 단순한 결론을 원한 건 또 아니었는데. 이럴 땐 정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절실하다...


  타인과 소통이 단절된 삶을 살면서 일반적인 것을 논한 것부터가 무모했던 걸까. 기록. 기록의 이유. 나만의 고민을 말하기 싫다고 했지만 결국엔 이 또한 나만의 기록이 되어버렸다.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 외에는 달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의문과 혼란으로 가득 찬 기록이. 자꾸 의문을 던져놓고선 엉성한 끝을 맞아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하다. 이런 기록이더라도 이어가다 보면 어떤 확실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답이 어찌 되었든 오늘은 알 수 없겠지. 언젠가는 이런 혼란스러운 문장들보다 훨씬 나은 기록을 할 수 있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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