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배진렬(JR Groove)은 비의 깡을 만들지 않았다.
"억울해서 잠이 안 와 잠이" 수용자가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억울할까
교도관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3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꽤 많은 수용자와 직, 간접적으로 대화를 해봤다. 가정사부터 사건 개요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헸지만,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는 본인의 억울함에 대한 것이었다. 잘못이 없는데 잡혀와 수용돼 있다거나(유형 1), 자기가 한 게 아닌데 남의 죄를 뒤집어썼다거나(유형 2),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만 너무 과도한 형량이 구형돼 억울하다는(유형 3)등, 이유도 가지가지다. 게 중에는 진짜 억울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붉은 눈시울과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가 배제된 수용자 사건 개요를 읽다 보면 교도소에 억울한 사람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남을 놀리고 추행한 거 정도로 징역을 살아야 하냐’는 성추행범(유형 1), ‘나는 은행에서 돈을 찾기만 했다 이게 무슨 죄가 되냐 전화 돌리면서 사람을 속인 게 죄지’라는 보이스피싱범(유형 2), ‘통상적으로 나와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해온 건데 나만 걸려서 징역을 산다고 형이 너무 과도하다’는 공문서 위조범(유형 3) 이외에도 각기 다르게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역시나 그다지 억울해 보이진 않는다. 나는 형을 집행하는 교도관일 뿐 구형하는 검사나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아닌데도 나에게 호소하는 걸 보면 수용자 본인들은 진심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억울하다는 말에 대한 면역
수용자들의 에피소드가 쌓이다 보니 감흥을 잃어갔다. 진심을 다한 억울함에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면역이 생겼다. 이는 공적인 일이나 수용자를 상대하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반대로 내 주변에서 당하는 억울함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갖게 되지 않는 단점이 됐다. 그런데 최근에 내 주변에서 진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억울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지인과 약속이 있어 음악의 메카라 불리는 홍대에서 나들이를 했다. 우리는 음악이란 카테고리에 적을 두고 있거나 종사하기에 자연스레 음악 관련 대화로 이어졌다.
"형 작곡가 배진렬이라고 알아? 그 비의 레이니즘 작곡하신 분인데 어쩌다 요즘 좀 친해졌어"
"매일 6시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고 작업을 시작 한대, 전날 술을 마셔도"
"대단한 거 같아 예술이라는 게 영감이 떠오를 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꾸준히 해야 하는 건가 봐. 하루키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잖아"
배진렬과 하루키에 대한 공통점 속에서 마치 성공을 보장하는 대단한 법칙이라도 발견 한양 입에 침을 튀어가며 말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반응이 시큰둥했다. 핸드폰으로 잠시 뭔가를 검색하더니 나에게 보여줬다.
'1일1깡?' '식후깡?'
비의 음악 '깡'이 재조명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는 음악적인 요소보다는 뮤직비디오나 안무 등에서 나온 우스꽝스러운 요소들 때문인 것이었다. 여러 유투버들이 패러디하면서 실패한 노래에 재미라는 요소를 뽑아낸, 작곡가 입장에선 명예롭지 못한 재조명이라 할 수 있었다.
영상을 보고 난 후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속사와 가수의 과도한 참여로 탄생한 졸작이지 않겠냐는 음모론으로 대충 마무리 지으며 주제를 돌렸다.
가십거리는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연예인 관련 기사가 뜨면 소속사나 본인의 적극적 해명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정적인 이야기들로 대화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다. 적극적 해명에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애매한 이유로 확증 편향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질 않는다. 작곡가 배진렬은 비의 'Rainism' 'La Song' 'Hip Song' 등을 작곡했지만 '깡'을 만들진 않았다. 그런데도 내 지인은 깡을 배진렬이 만들 줄 알았고 나 또한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비의 강렬한 히트곡을 많이 만들었기에 '비 음악의 작곡가는 배진렬'이라는 공식을 떨쳐 버리기 쉽지 않나 보다.
진심으로 억울해 보인다.
깡의 재조명은 비와 원 작곡가에게 다시금 부를 안겨줬다.
배진렬에게는 깡 작곡가라는 느닷없는 누명만 남겼다.
어떠한 해명에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깡이라는 단어를 통한 재미와 조롱거리만 찾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본 억울함
억울함은 절대 익숙해질 수 없다. 고의적인 시비를 애써 무시하는 일, 몰매를 맞으며 대항해도 변하지 않는 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는 일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물속 조류보다 변덕스럽고 억울함은 예고도 없이 무자비하게 찾아온다.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오늘 아침 해리포터 젤리빈 귀지 맛을 통째로 씹어 삼킬 때 다가오는 역겨움처럼 말이다.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맛 중에 귀지 맛이란 말인가.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인생은 가끔씩 농담을 가장해 우리 삶을 흩트려 놓는다.
다시 생긴 억울하다는 말에 대한 면역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이 참 많다. 가해자인 수용자 조차 억울하다 하니 피해자는 어떻겠는가. 그런데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부주의로 코로나 양성 판진을 받은 사람도, 가만있으라는 말에 팽목항에 수장된 어린 영혼들도, 이제는 그저 내 주위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티브이 속 화면이라 공감이 부족했던 것일까. 언젠가는 나에게도, 내 주위에도 농담처럼 다가오는 억울함이 생길지도 모른다. 가끔은 수용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