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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실주인 Feb 06. 2020

들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스마트 폰이라는 감옥에 갇혀 갑니다.


우리 소 서신 담당은 수용자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소통의 창이다. 이 막중한 임무는 매일 수용자 서신을 들고 직접 우체국에 가야 하는 귀찮음을 동반한다. 우체국과의 거리 또한 애매해서 비가 오는 월요일이면 낭패였다.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쌓인 편지 양이 어마 무시하기 때문이다. 편지만 들고 가기에도 힘에 부치는데 우산까지 들어야 했다. 근무복도 편지도 젖지 않게 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다 보면 어느샌가 신발과 바지 아랫단은 물기로 색이 바랬다. 택시도 가려고 하지 않는 거리였고 대중교통편도 애매했다. 우체국으로 향하는 버스 배차 간격은 걸어서 다녀오는 시간보다 텀이 길었고, 우체국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마기간이라도 되면 주말 내내 날씨 체크를 하고 동기들 출근 스케줄을 확인했다. 차를 얻어 타기 위해 로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 차 한 대 사고 말아야지 원...) 물론 좋은 점도 있다. 합법적으로 근무로부터 일탈이 가능했다. 우체국 가는 길에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듯 걸으면 아침 출근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소통의 창이라 부여받은 임무는 소가 풀을 통째로 집어삼켜 되새김질하듯 하나씩 잘근잘근 분해해야 좋은 점이 보였다.


어느 화창한 평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우체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주머니가 허전해서 이것 저곳 뒤져보았다. 역시나 허전했다. 핸드폰을 사무실 책상에 두고 왔던 것이었다. 다시 사무실로 가서 핸드폰을 챙기기엔 너무 많은 거리를 걸어왔다. 지루함을 각오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갔다.


평소 가던 길이었지만 그 날은 더 지루했다. 교도소에서 우체국 가는 길이 아름다울게 뭐가 있겠는가. 음악도 들을 수 없으니 가볍게 산책하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는 시대에는 지루함을 어떻게 달랬을까' 하는 사색도 잠시일 뿐, 핸드폰을 가지러 소에 다녀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나를 앞질러 가는 자동차들, 그 주행 소리나 들으며 우체국으로 향했다.


자동차 주행 소리...

자동차 소리를 들었던 적이 있던가. 도심 속 폭주족의 엔진 소리, 불규칙적으로 울려대는 경적 소리 외엔 별다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듣고 사는 데도 인식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나를 앞질러 가는 자동차를 바라봤다. 뇌에서 자동차 소리를 인지함에 따라 다른 소리들이 물꼬를 트고 들려왔다. 바람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새소리...... 새소리가 들리는 게 신기했다. 참새가 짹짹하고 짖어대는 흔한 그런 소리가 아닌 난생처음 들어보는 장음의 소리였다. 내게 핸드폰이 없는 오늘에 맞춰 이 자리에 처음 온 게 아닐 텐데, 나는 매일 걷던 이 거리에 새가 서식한다는 것을 이제야 인식했나 보다. 나는 자연이 들려주는 교향곡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감동은 보이는 것으로 뻗어갔다. 낙엽은 낙엽마다 각자 다른 색과 모양으로 날리고 있었고 나무에 달려있는 잎은 생명의 끈을 끈질기게 잡고 있는 의지가 보였다. 가슴속에서 부터 북받쳐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동들이 밀려왔다.


책 몇 페이지 정도 읽다가 그냥 핸드폰을 한 번 들여다본다. 다시 몇 페이지 읽고 톡을 확인한다. 유튜브 영상 하나만 봐야지 하다가도 추천 영상을 몇 개 더 본다. 자연스레 웹툰 앱을 실행시킨다. 할 게 더 이상 없는 거 같은데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스포츠 헤드라인을 확인하고 다시 톡을 확인한다. 무한 반복. 책 한 권 다 읽고도 남을 시간에 고작 30페이지 정도 읽는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앞부분이 기억나지 않아 다시 처음부터 만지작 거릴 것이다. 이게 내 모습이다. 자연에서 받은 감동은 잠시, 내 생활은 역시나 마찬가지로 스마트 폰을 찾는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도 볼 게 많았고 들으려 애쓰지 않아도 들려주는 게 많았다. 사색할 필요도 없고 감동을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종이 신문을 읽는다. 독서하다 지루하면 잠시 다른 종류의 책을 본다. 사랑하는 이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손글씨로 한땀한땀 눌러 적는다. 잠들기 전에 성경을 필사하며 한 구절씩 음미한다. 시간이 많으며 방해받을 요소도 적다. 신앙이 있는 수용자는 신앙에 집중하기도 좋다. 들으려고 애썼고 보려고 힘썼다. 한 달에 5~6권의 양서를 읽고 좋은 글을 쓰는 수용자를 보면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모든 수용자들이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무협지로 시간 때우는 수용자들도 허다하다.) 시간과 자연은 누구에게나 주어 지고 법이 허락하는 내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이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이 나에게는 힘겨운 사투가 됐다. -교도소가 살기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정도 강제력이 아니면 스마트 폰을 끊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용자로 살고 싶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며칠 전 근무복을 세탁기에 돌리던 중 문득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 안에 있는 거 다 확인했던가?'  온 집안을 뒤져도 이어폰이 없었다. 회사 사무실에 두고 왔길 바라는 내 간절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근무복 주머니 속에는 이어폰도 새하얗게 빨려 있었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이어폰이 없으면 이동 시에 음악을 들을 수도 없고, 유튜브도 볼 수없다. 나에게는 스마트폰 활용 가치가 반절이나 줄어드는 셈이다. 나는 곧바로 이어폰을 주문했다.

 

자연이 줬던 감동은 이어폰만 귀에서 빼면 언제든 느낄 수 있는 선택의 문제처럼......

자연이 주는 감동도, 수용자에게 받았던 자극도, 허무하리만치 잊혀 갔다.


담장 밖에서도 이렇게 스마트 폰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혀 가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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