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먹사남 Jun 03. 2022

원초적 파인 다이닝, 백숙

가장 깊은 곳에서 나는 맛

부글부글.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새카만 무쇠솥 안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텼을까. 한여름의 열기를 무색하게 하는 뜨거운 불꽃이 치솟지만, 단단히 닫힌 솥뚜껑은 견고하기만 하다. 조바심을 참지 못해 힘겹게 뚜껑을 열어 속을 들여다보지만, 허연 김이 터져 나오며 안경 앞을 하얗게 물들인다. 그 안에는 노란 기름 동동 뜬 새하얀 국물이 펑펑 터져 오르며 이 세상 여기보다 뜨거운 곳 없노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열기 사이로 스미는 가금류의 노릿한 기름 냄새. 하지만 난 그 속에 숨겨진, 끈적한 골수 녹아든 구수한 향기를 맡는다. 그래, 다 된 거 같네. 깍두기와 김치와 소금을 준비하자.


상을 펼 시간이다.



훌륭한 재료에 시간을 더하면


이미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나는 먹는 것을 엄청 좋아한다. 할 일이 없으면 여자 친구랑 어디로 놀러 갈까를 상상하거나(없지만) 무엇을 먹으러 갈까를 고민할 정도로 좋아한다. 몸매는 되도록 건강한 돼지로 보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폭식은 자제하는 편이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먹고 싶은 것을 먹으려고 혼밥 혼술을 불사하는 것이 바로 나. 선호하는 음식 정도야 당연히 있지만, 밖에서 사 먹을 음식이라면 되도록 여러 번 먹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을 낙으로 삼은 지 오래다.


그러나 여름이 오면, 무더위가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면, 먹는 것을 사랑하는 나도 식욕이 반감한다. 먹고는 싶은데 배부를 때까지 무언가 씹는 것이 귀찮아진다. 어디에 맛있는 것이 있다는 얘길 들었는데 가을쯤 가자고 생각한다. 기력이 달리는 것 같고 의욕이 나질 않는데 무얼 먹을지 결정하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그런 순간에 나를 위해 택하는 요리가 있으니, 바로 좋은 재료를 장시간 '고는' 요리다.


곰탕, 뽀얗고 기름지다. 둥둥 떠있는 살점 따위, 질겅거리고 맛없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꼭꼭 씹으면 저도 고기라고 외치며 몸에 스며드는 느낌. 빠르게 후루룩 탁 먹고 기력을 채우기 좋지. 설렁탕? 곰탕 같지만 사용하는 부위가 달라서인가 더 구수하면서도 담백하다. 뒷맛이 기름지지 않으니 더 많이 마셔도 부담스럽지 않고, 소면이라도 한 타래 말아먹으면 속도 든든하지.


고기든 살코기 슬쩍 붙은 고기이든, 굽거나 양념하여 찌거나 하면 충분히 맛있다. 하지만 한여름에 먹기는 부담스럽다. 온종일 땀을 빼며 돌아다니는 동안 지치는 것은 근육뿐이 아니라서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장이 그로기 상태에 이르면 세상 둘도 없는 별미라도 한두 입 먹고 나면 물리기 마련이니. 그래서 편히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영양이 가득해야 하고, 맛도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시간 고아내는 요리는 단순히 끓이고 삶아낸 것과는 궤를 달리하게 된다.


오랫동안 불 위에 두는 것은 물속에 가둔 재료의 모든 것을 뽑아내기 위함이다. 양지면 양지, 사태면 사태, 뼈면 뼈. 오래 열을 가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땀처럼 뽑아낸다.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은 단순한 육수를 넘어선 무언가다. 사람 몸에 필요한 것, 그렇지 않은 것까지 깡그리 진액으로 뽑아내어, 육안으로 봐도 물보다 끈적하고 목으로 넘길 때 촉감을 자극할 것 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 끓이고 달인다. 그건 마치 보약을 만드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다.


제대로 고는 요리에는 '사람이 들어간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것 나쁜 것 모두 다 뽑아낸다고 하지 않았나. 맛은 차치하더라도 몸에 안 좋고 맛이 없는 것은 빼내야 하는데 이건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불 온도를 조절하고 뜰채로 걷어내거나 면포에 거르거나 다른 재료를 넣어서 불순물이 뭉치게 하거나 따로 준비한 육수와 일정 비율로 섞는 등의 기법이 필요한데, 이 모두가 정말로 중노동이다. 임금님이 드시던 설렁탕은 꼬박 하루를 끓이는데, 나인들이 솥 곁에 머무르며 거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한지로 불순물을 걸러낸 다음에야 상에 올렸다고 할 정도다. 그야말로 최상의 재료에 시간을 더해서, 사람이 끝없이 지켜봐야만 만들어지는 요리다.


파인 다이닝? 이게 파인 다이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원초적 파인 다이닝, 백숙


하지만 둘 다 부족해. 최고의 보양식이지만 부족하다고. 씹을 게 없지 않은가!


후루룩 마시고 끝나서야 성이 안 찬다. 여름이라고 내가 허기를 국물로만 달랠 순 없다. 사리 몇 젓가락 했다고 기분이 즐거워지지 않는다. 나는, 씹고 싶다!


그래서 백숙이다. 닭백숙, 오리백숙, 다 좋다. 대충 삶아낸 것을 뚝배기에 담아주는 삼계탕 같은 거 말고, 압력솥이나 무쇠솥에 장시간 푹 삶아서 살코기와 기름과 힘줄과 골수까지 다 녹아버린 그것. 뜨거운 열기 속에서 달구어져 모든 것이 간신히 형체만 남았을 뿐, 툭 치면 스르르 무너져 내리게 된 것 말이다. 모든 맛과 향과 영양은 국물 속에 혼연일체, 고소하게 흘러나오는 향기는 있지만 입에 넣기 전에는 그 맛을 온전히 장담하기 어려운 음식.


앞서의 설렁탕 등과 비교하자면 들어가는 시간은 짧다. 사람도 '덜' 들어간다. 좋지 않은 성분을 걷어내는 건 삼 따위의 약재가 한다. 어쩌면 중화시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백숙에 들어간 풀떼기는 먹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대신 밤이나 은행 같은 단단하고 둥근 열매를 넣어 식감과 재미를 더한다. 고기에선 맛이 다 빠져나가 아무것도 없으니 국물 속에 푹 담가서 육수를 묻혀 먹어야 하고, 소금이라도 콕 찍어 먹어야 제맛이 난다. 그렇게 하여 조리하는 시간이 길어봐야 두 시간 남짓. 백숙에 들어간 주재료는 접시에 턱 하니 얹어 내고 국물은 찹쌀죽 따위를 넣거나 혹은 넣지 않고 따로 접시 따위에 담아서 곁에 함께 낸다. 곁들여 먹을 깍두기며 김치며 부추무침 따위가 놓이면 백숙 한상 뚝딱!


백숙의 유래 같은 것은 모르니 그저 상상해본다. 씨암탉 잡아주는 장모 사랑 얘기 있잖은가. 농가에서 꾸준히 알을 낳는 암탉이 얼마나 귀했을까. 달걀 하나 탁 까서 먹어도 반나절 기력이 충만할진대, 귀한 손님이 들었다고 귀한 재산을 잡아다가 털을 뽑고 구들장 뜨근해지도록 불을 때서 솥에다가 푹 삶아내는 것이다. 먼 길 오느라 상했을 몸 보해주겠다고 구할 수 있는 귀하고 드문 재료는 몽땅 채워서, 사위만큼은 아니라도 귀하디 귀한 씨암탉 뼛속에 있는 것이 전부 우러나오도록 끓인다. 배도 불러야 하니까 쌀독 바닥을 긁어서 소화 잘 되는 죽도 준비하는 거다. 전부 풀어헤쳐지면 먹고도 안 먹은 것 같을까 봐 미리 해놓지도 못하고, 사위가 온 다음에야 닭 한 마리 잡았으니 좀만 기다리시게, 하고 펄펄 끓여내서, 집에서 내줄 수 있는 반찬과 함께 한 상 턱 하니 내놓는 그 마음. 치킨이 없던 그 시절 가금류로 만들 수 있는 요리의 절정이 아니었겠나. 장모님이 사위에게 내어주는, 서방에게도 잘 내어주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파인 다이닝 요리였던 것이 아닐까.



탄력과 부드러움의 그 경계에서



여름철 계곡에서 백숙 한 솥 먹는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 텐가? 맥주 한 잔 짠 하고 시작하는 건 국룰이라 치고 말이다. 당연히 다리 한 짝 크게 쭉 당겨서, 통째로 들고 한입 와앙 뜯어야겠지? 먹어본 사람은 다 안다. 북채를 닮은 그 살코기가 얼마나 색다른 맛과 식감인지. 미오글로빈 때문에 붉은색이 나니 어쩌니 하는 치킨과는 달리 오직 허옇게 다 익어버린 살코기. 육즙이라기엔 애매한 육수를 조금 머금었을 뿐이라 고기 자체는 특별나지 않은데, 어금니에 닿는 그 촉감은 어찌 그렇게 탱글탱글한지. 분명히 탄력 넘치는 다릿살이었는데 왜 혓바닥 몇 번 굴리니 부서져서 사라지고 없는 것인지.


곁들임으로 깍두기를 먹을까 부추무침을 조금 넣어볼까 고민하는 것은 사치다. 제일 가까이 있는 것을 얼른 입에 넣어라. 고민하는 사이에 살코기는커녕 여운조차 이미 사라지고 없을 테니.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이미 새하얗고 불순물 없는 뼛조각뿐이다. 어쩐지 조금 말랑한 것 같아서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다음은 날개다. 다리에서는 통째로 뜯어먹는 쾌감을 누렸으니 이번에는 접시에 놓고 우아하게 발라내서 먹어 보자. 닭살 돋은 껍데기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갖다 대고 살살 당기면 날개살이 근육 결대로 쭉쭉 찢어져 나오더니 뼈만 쏙 빠질 거다. 그러면 그걸 들어서 소금에 찍든 소금을 집어서 살코기 위에 취향껏 뿌리든 한 다음 입에 넣는 거다. 짤막한 우동 면발처럼 입 안을 노닐더니, 톡톡 튀는 식감을 남기고 목구멍으로 쏙 들어간다. 닭다리와는 달리 뭔가 좀 더 녹진하고 진득하니 입에 착착 감긴다면 그건 아주 제대로 된 백숙을 먹은 거다. 닭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콜라겐은 그렇게나 적어서, 맛을 보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그다음? 알아서들 드시라. 난 이제 죽 먹으련다. 아 가슴살은 조금 남겨줘, 죽에 넣어 먹게.



죽이 맛이 없다면 그 집 백숙은 먹을 필요가 없다



죽이야말로 백숙의 정수다. 한 마리 뽀얗게 우러난 국물 속에 내가 조금 전까지 뜯고 씹고 빨아먹었던 살코기의 진액이 전부 들어가 있다. 여럿이 나눠먹은지라 모자란 양을 마저 채워주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이 국물을 먹지 않을 거라면 뭣하러 백숙을 먹는단 말인가. 냄비든 뚝배기든 국자로 바닥이 긁힐 때까지 뱃속에 퍼붓고 있다 보면 문득 생각하고 만다. 나, 입맛이 없었던 거 맞지?


백숙은 가는 곳마다 조금 다른 죽을 내어준다. 꾸덕하니 질게 만든 죽을 따로 내어주는 곳에선 밥처럼 푹 떠서 먹어도 별미고, 국물을 조금씩 끼얹어 원하는 묽기로 만든 다음 그 질감을 즐기며 먹는 것도 즐겁기 그지없다.  만약 굵은소금을 내어주는 집에서 국물이 극히 적어 리조또보다도 꾸덕한 죽을 만난다면, 소금을 살짝 뿌린 다음 섞지 말고 그대로 먹어보라. 톡톡 터지는 소금의 크리스피함이 더해져 이전과는 완전히 색다른 마무리를 선사할지니.



누룽지 백숙과 최초로 조우했을 때를 기억한다. 단순한 발상이 이토록 놀라운 경험을 선사할 줄이야. 장시간 고아서 끈적하다 못해 텍스쳐가 생겨버린 농후한 국물에 얇고 바삭한 질감의, 하지만 얇디얇은 최상의 누룽지를 부수지 않고 통째로 담가서 상 위에 올려놨다. 숟가락으로 긁어보니 드드드득 하는 소리. 이것은 국물조차 미리 뜨지 말라고 뚜껑을 덮어놓은 것이었다. 접시에 담아낸 고기를 천천히 즐기면서 누룽지가 국물을 흠뻑 머금고 스스로 촉촉해져서 자기 속을 스르륵 열어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자연스레 깨달았다. 살코기에 맥주든 소주든 마음 가는 대로 기울이다가, 살코기가 동이 나고 속이 아직 허하다 싶을 때쯤 국자로 누룽지를 툭 쳐 보았다. 여전히 골든 브라운, 밝고 고소한 빛깔을 내고 있지만 거짓말처럼 푹 하고 부서지고 쪼개지더니 뽀얀 국물 속으로 침몰한다.


잠시 고민 끝에 국자를 여러 번 휘젓지 않기로 한다. 두어 번, 누룽지가 대~충 부서질 정도로만 휘적거린다. 제각기 크기가 다른 누룽지가 저마다의 식감을 선사할 것이었다. 남은 살점도 조금 넣어서 한국자 크게 뜨니, 꽤 오래 식사를 했는데도 펄펄 올라오는 저 수증기. 솥 안에서 그 긴 시간을 허투루 버티지 않았노라, 그 안의 열기 온전히 머금어 왔으니 이젠 너의 뱃속을 마저 달구어 주겠노라는 듯하다. 바로 입으로 직행하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소금 간을 살짝. 그제야 입 안에 양껏 욱여넣어 본다.


구수하다. 가금류의 뼛속에서 흘러나온 골수의 고소한 맛, 살코기가 머금었던 기름기, 황금빛으로 물든 탄수화물의 바삭함이 한데 어우러져 나는 이 맛.


쫄깃하다. 근육질만이 남은 살코기 부스러기의 탄력, 국물과 하나가 된 콜라겐의 꾸덕함, 육수를 한껏 머금어 한층 업그레이드된 쌀알의 찰기가 어금니 아래 눌리며 나는 근사한 식감.


바삭함이 조금 아쉽지 않으냐고? 하하. 이건 누룽지탕이 아니잖아요. 백숙은 그냥 이걸로 완성이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누룽지탕도 여기엔 안 될 것 같아요.




자극적인 음식이 유행한 지 오래다. 미각적으로든, 시각적으로든 팡팡 터지는 화려함이 대세다. 소위 인스타 감성이란 것이 그렇듯, 누군가에게 나 이런 것을 경험했다고 자랑하고 싶은 기분에 편승하다 보니 음식도 눈에 띄게 예쁜 곳에서 누가 봐도 화려한 모습을 하고 눈앞에 떡하니 놓여야 더 맛있어 보인다. 실제로 맛있기도 하고.


백숙은 그런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다. 백숙뿐이 아니라 장시간 열기를 견뎌내어 그 열기를 품고 상에 올라오는 음식들 대부분이 그런 것 같다. 한 시간을 조리하든 열두 시간을 조리하든 생김새가 별로 차이가 없다. 화려해지기는 훨씬 지난해서, 그냥 조리가 끝나자마자 턱 하니 내놓는 것이 최선일 경우가 많다. 잘못 건드리면 다 부서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백숙도, 보양식도 때가 되면 찾아먹는다. 언제 보아도 익숙한 그 생김새는 내가 더없이 좋아하고 사랑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푸근해서 질리지 않지만, 한술 뜨는 순간 상상하지도 못한 행복한 맛을 터뜨려주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트렌디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이 되지 못하며 자극도 밋밋할지언정, 나는 아직까지도 시간을 쏟아부어 만들어내는 요리보다 만족스러움을 남기는 것을 보지 못하였음이다. 평소에는 화려한 것, 새로운 것을 찾아서 떠돌겠지만 지치고 힘들고 무뎌지는 순간에는 정성과 노력으로 고아 만드는 백숙 한 그릇 하러 돌아오는 것이다.


뼛속까지 전부 담아내는, 가장 깊은 곳까지 내어주는 그 맛을 한 그릇 하고 나면, 또다시 걸어갈 힘이 나니까.

작가의 이전글 사랑하는 그대, 치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