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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사남 Mar 08. 2021

초면에는 플래터(Platter)

쟁반에 꽉꽉 담아서 너도나도 우걱우걱

어쩌다 보니 낯선 사람과 만나서 떠드는 일을 직업 삼은 지 햇수로 16년이다. 당연히 초면에 밥 한 끼 하러 가자고 권하는 것도 업무의 일부분인데, 예전에는 대체 뭘 먹자고 권해야 이 사람이 좋아할까 고민이 어마어마했더랬다. 지금도 "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라는 말이 세상에서 가장 싫으니 말 다 했지. 누가 편식하냐고 물어봤나? 뭘 드시면 당신이 기뻐하실 거냐고요.



플래터,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을 위한 어여쁜 쟁반


밖에서 외식 좀 하다 보면 마주치는 이름, 플래터(Platter). '쟁반'이라는 뜻으로, 널찍한 접시나 그릇 따위에 여러 가지 주 메뉴와 몇 가지 사이드 메뉴를 한꺼번에 담아내어 주는 것을 보통 플래터라고 부른다. 소위 2인 세트니 3인 세트라는 것과 비슷하지만, 단품을 여러 접시 내어주는 것과 달리 한 곳에 보기 좋게 담아내어 주기 때문에 현대 식사예절 - 음식 사진 촬영 - 에 적합하다. 물론 쟁반국수, 쟁반짜장 같은 음식과는 다르다. 대부분은 양식 위주의 식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활동범위가 넓다 보니 경기도 남부에 거주하는 뚜벅이 주제에 강남, 광화문, 신촌 같은 서울 번화가를 뻔질나게 드나든다. 의정부나 안산 정도 거리도 매달 두어 번 방문하게 되고, 광주광역시나 부산광역시 같은 곳은 필요하면 그냥 비행기 타고 날아간다. 그리고 초면인 고객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대에 따라 약속된 멘트를 전한다.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어떠세요?"


문제는 이다음이다. 만약 고객이 승낙하면, 뭘 드시고 싶은지 물어보게 되는데 열 중에 열 두 명 정도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다 잘 먹어요."

"아무거나요."

"가리는 게 없어요."


아니, 어차피 내가 낼 건데 좋아하는 메뉴 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그래서 나는 다 먹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 또래 근처인 고객을 많이 만나다 보니, 대다수는 음식의 국적에 큰 거부감이 없다. 독특한 향신료가 들어간다거나, 괴이한 느낌을 주는 도전적인 음식만 아니라면 근처 어디에서 먹어도 상관이 없을 터. 어차피 내가 대접할 생각이니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검색해 두었다가 고객에게 줄줄 읊으며 반응을 보고 식당을 골랐는데, 플래터를 만난 후로는 일단 근처에 플래터 메뉴가 있는 식당을 찾아본다. 기왕이면 여러 가지 놓고 먹는 게 좋은 경험이 되니까. 아, 물론 내가 말이다. 이토록 상대에 대한 배려(?)와 나의 기호를 일치시킬 수 있는 선택지가 어디 있겠는가? 초면인 사람과 플래터를 먹기 시작한 뒤로는 낯선 이와의 식사가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른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오랫동안 해 오던 일을 하나, 잠정적으로 정리하면서 가슴 한 구석에 남는 미련이 있었다. 나름 자신 있는 실력과 그간의 커리어가, 돈은 안 되지만 너무 아까웠던 것. 그래서 조심스럽게 관련 모임에 가입 신청을 넣고, 그 뒤로 또 이 모임을 나가는 게 좋을까 3주 정도를 고민한 뒤에 첫 모임에 참가를 했다. 유익하고 재밌는 주제로 두 시간 정도 스터디와 토론을 했는데, 종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속에서 낯익은 울림이 생기는 거다.


꼬르르르륵-!


어휴. 이 시도 때도 없는 자식...... 이라기엔 오후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임 종료 10분 전부터 나의 관심사는 모임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과연 이 사람들은 모임이 끝나자마자 그냥 집에 갈 것인가. 식사하러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 편승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데, 만약 없으면 오늘 첫 참가인 내가 식사하러 가실 분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 것인가. 허기와 소심함이 한데 뒤섞여서 위장 속에서 웅성대는 찰나, 다행히도 모임장이 혹 따로 식사하실 분들은 따로 모이시라며 판을 깔아주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 모임장 괜찮구먼. 자주 나와야겠다.'


그렇게 초면인 사람 넷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됐다. 내가 음식을 권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이 자신 있게 한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는데, 예상치 못하게도 식당 앞에 줄이 있다. 최소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상황. 비슷한 일을 세 번 정도 더 겪고 나서, 경제 불황은 다 개뻥이라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니 내가 등판할 수밖에. 


"음, 이 쪽으로 가면 제법 괜찮은......"


그리고 어딜 가도이 웨이팅이 길어서, 나아갈 길도 허기진 위장도 막막해지고 말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고?



플래터가 있으면 낯선 사람과 타임워프 가능


그러다 우리 앞에 나타난 한 식당. BBQ 전문점인 듯한데, 과거에 가끔 드나들었던 멕시칸 식당이었던 자리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창 안으로 보이는 풍경은 바뀐 게 없으니 분위기는 오케이. 입간판에는 역시나 나의 구원, 플래터가 있었다. 


초면인 남녀 여럿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으면 은근한 눈치싸움이 치열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과 상대와 나눠먹어야 할지도 모르니 무난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회성 사이에 강렬한 내적 갈등이 벌어지고, '남이 고르는 것을 보고 나는 적당히 어울릴만한 것으로 골라야겠다'라는 줏대 없는 생각이 바쁘게 테이블 위를 오가는 것이다. 하필 센스 없는 직원이 사람이 넷인데 메뉴판을 하나만 주고 가는 바람에 눈치싸움이 더욱 다급하고 치열한 것으로 바뀌려는 찰나, 이 자리의 고수인 내가 한마디를 툭 던진다.


"이런 데서는 역시 플래터죠. 여기에 메뉴 하나만 추가하면 적당할 거 같아요. 아, 혹시 맥주도?"


다들 괜찮으시면 저는 버000저로 하겠습니다, 흐흐. 이쯤 되니 바로 분위기가 정리된다. 사이드 메뉴를 세 개 선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는 식욕이 샘솟기 시작한 여성진에게 '양보'하면 쉽게 마무리된다. 갑작스럽게 "이거랑 이거 하고, 나머지 하나는 골라 주세요."라는 변화구가 날아들었지만, "음. 클래식하게 감자튀김? 어니언링도 괜찮아 보이네요."라고 말해본다. 미세하지만 강하고 확실하게 어니언링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곁눈질로 캐치. 결국 꾸덕한 맥 앤 치즈, 매콤 짭짤한 치폴레 쉬림프, 초 거대한 어니언링이 간택되었다. 그녀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확인하며 확신했다. 오늘도 성공이군. 


플래터의 장점 중 하나는 메뉴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오기 전 시원한 맥주가 도착했고, 가볍게 목도 축일 겸 '치얼스'하고 나니 다들 한시름 놓은 듯 너도나도 말문을 연다. 그리고 곧 압도적인 위용의 BBQ플래터가 무대에 오르시니, 이제부터는 고기를 썰고 빵을 찢고 소스에 찍어 먹다가 스푼으로 퍼먹다가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다. 브리스킷이 살살 녹는데 빵 사이에 끼워서 먹어보라거나, 소스 대신 맥 앤 치즈를 끼얹으면 심장혈관 막히는 맛이 난다는 둥 하다 보면 별로 재미없지만 다들 웃어주면서 분위기가 풀드포크처럼 부드럽게 풀어진다. 곁들임으로 나온 샐러드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며 오늘 모인 사람들의 '야수성'도 슬쩍 확인해둔다.


배가 차고 나면 서로의 직업이니 사는 곳이니 관심사니 하면서 신변잡기를 알아간다. 플래터답게 쟁반 여기저기 음식 파편이 남아 있는데, 이걸 주워 먹고 말고는 개인의 자유. 배불러서 그만 먹든, 맛있어서 마저 먹든 아무 상관이 없다. 물론 나는 영업인답게 마지막 남은 한 조각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차게 식었으나 분명 촉촉하고 맛있었을 마지막 치킨 스테이크 조각은 어니언링에서 분명한 신호를 보냈던 그녀가 기습적으로 포크질을 하며 사라졌다. 시간도 세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음식도, 기분도 플래터


배를 채우니 다들 기분이 좋다. 초면의 날 선 긴장감은 흔적도 없고, 언제 또 모임에 나올진 모르지만 다시 보길 기약하며 손을 흔들며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낮에 90도 폴더인사 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는 걸 보니 부쩍 친해진 느낌. 물론 그냥 느낌일 거다. 분명 다음번에는 또 서로 깍듯하겠지.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고, 초면 같은 구면들과 몇 번 더 플래터를 나눠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눠가지면 그쯤에서야 친구가 되어 있을 터다. 실패하지 않는 플래터 같은 메뉴가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태국 요리를 먹으러 가서 똠양꿍을 시켰는데 '앗 이건 처음 먹어봤는데 저랑은 안 맞네요.' 같은 소리가 나왔다면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매일 걷고, 사람을 만나고, 떠들고 먹는 것이 일이다 보니 식사 후에 "즐거웠습니다."하고 인사하고는 약국에 소화제를 사러 가던 풋풋한 사회 초년생은 이제 없다. 근처에 적당한 플래터가 있는 곳을 찾아 권하며, 이제는 이 사람과의 식사시간은 어떨까 하고 기대하게 되어버렸으니, 초면의 불편함 또한 훌륭한 조미료가 됐다. 결국 사람을 만나고, 서로를 살피며 음식을 나누고, 더 먹고 싶은 것을 양보하거나 상대가 덜 먹는 것을 눈치껏 내 접시로 옮겨오는 일 모두가 적당한 긴장과 스릴과 즐거움이 한 쟁반에 소복하게 담긴 플래터(Platter) 같은 것이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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