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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사남 Mar 23. 2021

멋부림과 먹부림 사이, 파스타.

그 오묘한 줄타기의 맛

파스타를 참 좋아한다. 세몰리나 듀럼밀인지 뭔지 잘 알지 못하는 밀로 만들어서, 수시로 먹는 라면이나 소면과는 식감부터 다르다. 다소 오래 삶아도 푹 퍼지거나 하지 않고, 오일이나 라구, 크림 등 어느 소스와도 잘 어울린다. 샐러드에 넣어도 그만이니 말 다 했지. 파스타 면 종류도 스파게티, 스파게티니, 링귀니, 탈리아텔레, 페투치네...... 요리하는 사람의 연출 의도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다양하다. 


처음엔 그냥 멋부림


스물 이전까지는 파스타라는 말도 잘 몰랐다. 그때는 그냥 '스파게티'였지. 좋아하기는커녕 굉장히 생소한 면요리였던 데다, 빈궁한 학생 지갑으로는 마음대로 먹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는 '까르보나라'니 '크림 파스타'니 하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내 앞에도 오랜만에 여자 친구라는 것이 나타났다. 그렇게 파스타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대)학생일지라도 성인의 연애는 중고등학생일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서, 어디 구석에 틀어박혀 알콩달콩 소꿉장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하게 리드하는 것을 잘 못했던(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행여나 여자 친구의 마음이 상할까 자주 의견을 물었고, 몇 가지 선택지를 내어놓고 골라내다 보면 결국 파스타를 자주 먹으러 가게 됐다. 


무슨 맛을 알고 먹었다기보다는 분위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조명, 새하얀 접시와 예쁘게 세공된 식기. 적당한 가격대에 담음새가 아름다운 요리 두어 가지를 두고 서로 나눠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마주 앉아 먹을 때가 많지만, 운이 좋아 구석 모서리에 놓인 소파석이 있으면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먹기도 하고. 간질간질하고 낯부끄럽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참 즐거웠더랬다. 특히 파스타는 갈수록 종류가 다양해져서, 장소가 다르면 비슷한 것을 시켜도 전혀 다른 모양의 요리가 나왔다. 데이트하는 날의 소소한 즐거움 같은 것이었달까.


나중엔 자주 먹다 보니 파스타 특유의 질감이랄까, 식감 따위를 즐기게 되었다. 익힘 정도에 따라 탱글 거리는 정도가 달랐고, 생김새에 따라 씹을 때의 감각이 차이가 났다. 스파게티는 톡톡, 널찍한 링귀니는 똑똑, 오레키에테는 통통, 라자냐는 쫄깃. 맛은, 글쎄? 어차피 메뉴 선택권은 늘 여자에게 있지 않던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녀도 딱히 파스타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와 똑같이 '육식 지향'이면서도 불판이나 숯불에 구워 먹기보다는 수제버거처럼 빵과 풀 사이에 파묻혀 있거나, 수육이나 보쌈처럼 이미 다 익힌 뒤 손질되어 나오는 것을 좋아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냄새나고 지저분한 것 자체를 최대한 피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툭하면 파스타를 먹으러 가자던 그녀는 어느 날 뜬금없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이별을 선언했고, 제법 길었던 인연은 그렇게 과하게 익은 스파게티니처럼 똑! 하고 끊어져버렸다.


지금은 먹부림


그 후로도 파스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먹었다. 자주 먹다 보니 내 취향은 깔끔한 오일 파스타를 선호하며, 그다음으로 라구 소스를 좋아하지만 되도록 묵직하지 않은 채소 위주의 라구를 더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면은 스파게티니를 가장 즐기지만, 꾸덕한 소스에 파묻힌 펜네나 푸실리의 매력도 이해한다. 가끔은 근사한 라자냐를 주문해 나이프를 사용하면서 베샤멜소스를 품평하는(척) 끼를 부리게도 됐다. 스푼으로 떠먹는 쿠스쿠스가 입 안에서 구르는 것이 재미있고, 폭신하고 쫄깃한 뇨끼는 새알심 비슷하면서도 감자의 고소한 맛이 있어 다른 파스타와의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하게 만들곤 한다.


시대도 조금 변했음을 느낀다. 20대 때에는 연인들의 필수 코스 같았던 파스타 전문점에서, 이제는 가족 모임도 열리고 회사 회식도 가지게 됐다. 꼭 분위기를 내지 않아도 되는 가게들도 늘었다. 푸짐한 양으로 승부하거나, 한국적인 재료로 만든 논-이탈리안 파스타도 많이 생겼다. 전통적인 이탈리안 파스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 선에서, 맛을 가미한 큐브 스테이크를 토핑 한다거나, 매콤한 스튜에 파스타를 사리처럼 넣어 주는 등 '불편하지 않은' 시도가 많이 늘었다. 파스타 애호가가 되어버리고 나니, 새로운 파스타를 찾아내면 보물찾기 쪽지를 찾아낸 것처럼 들뜨는 기분이 되고, 지인과의 식사에 특별한 파스타를 권유하는 재미가 생겼다. 


"이탈리안 파슬리 페스토를 더해서 맛이 깔끔하고 향긋한 오일 파스타가 있는데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분식집 라면이 최고라는 사람도 호기심을 갖고 이야기를 듣는다. "당근, 애호박, 가지에 볶은 소고기를 더한 라구 파스타가 있는데, 여기에 직화로 향을 낸 참나물을 얹어주는 파스타 가게가 있어요."라고 권하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입맛이 돈다는 친구들이 생겼다. 외식으로 먹는 면 요리라고 하면 짜장면과 짬뽕, 잔치국수나 비빔국수, 물냉이나 비냉 정도였던 건 이제 옛말이다. 



썸녀가 생기면 한두 번 정도는 파스타를 메뉴에 넣는데(사욕 100%), 후루루룹 면치기를 하는 것은 역시 피차 부끄럽다. 그러니 상큼한 토마토소스에 폭 잠긴 뇨끼에 치즈를 눈처럼 가득 뿌려 놓은 것이라거나, 크림과 치즈 베이스의 소스에 잠긴 파르펠레와 펜네 같은 것을 골라서 스푼으로 떠먹을 수 있게 세팅한다. 혹은 오븐에서 갓 나와 뜨끈한 김이 오르는, 고소한 냄새가 나는 라자냐를 메인으로 골라서 포크와 나이프로 근사한 양식을 즐기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도 있고. 파스타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되니 면 모양을 화제 삼아 가벼운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보면 제법 서로에게 즐거운 시간이 된다. 


너무 먹는 이야기에 심취해, 상대에 대한 관심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즐거운 경험이 되는 식사는, 언제나 '멋부림'과 '먹부림'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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