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서도 안 되고, 무작정 간편하지만은 않은
버거. 햄버거.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햄버거(세트)로 식사를 한다. 시간은 대개 점심.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느지막이 나온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는 싫고, 음식이 늦게 나오는 것도 싫고, 온갖 접시를 깔아놓고 서로 젓가락 부딪히고 싶지 않을 때 홀로 적당한 패스트푸드점에 방문한다. 손으로 턱 잡아서 한입 와구와구 씹은 다음, 목이 메는 것 같으면 탄산음료를 꿀꺽 꿀꺽 들이켠다. 바삭한 감자튀김을 집어먹다가 손끝을 쪽 빨아먹는 건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지저분함이랄까.
누구나 늘 시간에 쫓긴다. 한없이 여유가 넘치는 것 같은 사람도 잠시 뒤에 할 일 정도는 있고, 그것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바쁜 척을 하려면 한없이 바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밥 먹을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애매한 길이의 점심시간은 정말로 야속하기만 할 터다. 누군가는 차라리 온전한 휴식을 위해 점심을 건너뛰고 어딘가에 엎드려 잠을 자거나, 평소 눈으로 찍어둔 근방의 찻집에서 몇십 분 망중한을 즐기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니까.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역시 뭘 먹지 않으면 곤란했다. 허기와 짜증이 동시에 몰려오기 때문이다.
정해진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이 없었던 학원강사 시절. 짬을 내어 식사를 하게 되면 햄버거를 자주 먹었다. 손으로 편히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샌드위치도 마찬가지였지만, 유독 몇 걸음 더 걸어가야 있는 'M'이나 'BK'를 갔다. 'K'는? 싫어하지는 않는데 근처에 없었다. 가는 길에 있는 빵집에는 색색깔의 채소와 과일로 맛과 색과 멋을 낸 샌드위치가 있었지만, 단 1분 시간을 들여 집어 들고 나올 수 있는 그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루 한 끼 정도는 '제대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던 것 같다. 샌드위치는 아무래도 '식사'라기엔 너무 '가벼운' 것이라서.
샌드위치가 허술한 식사라는 것이 아니라, 뜨끈하게 데운 패티를 씹을 때 터져 나오는 육즙이나 막 튀겨져 나와 바삭함이 느껴지는 감자튀김의 열기가 훨씬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샌드위치도 햄버거도 금방 사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주문 후 음식이 나올 때까지 걸리는 그 잠깐의 시간이 음식에 더해주는 열기가 있어야만 공복이 채워지는 것이었다. 그 따스함은 안 그래도 짧은 점심시간의 일부를 희생하더라도 꼭 추가해야만 하는, 내 하루의 필수 영양분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샌드위치를 주면? 그걸 먹고 햄버거를 먹으러 나가거나, 햄버거를 먹고 와서 출출할 때 샌드위치를 또 먹거나 했다는 건 (안)비밀이다.
혼밥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분식집 라면의 유혹이 있다. 싸고 맛있는 데다가 배도 부르고, 단짝처럼 딸려오는 단무지와 김치의 '아삭+시원+달달'의 3단 콤보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원한다면 밥 한 그릇 말아 뚝딱 하고서 배 깊숙한 곳에 차오르는 포만감을 즐기며 한없이 게을러진 것 같은 기분을 느껴도 좋을 것이었다.
그래도 햄버거와 라면 중 선택지가 있다면 내 선택은 역시 햄버거로 기운다.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굳이 라면을 먹겠다면 집에 가서 내가 차려먹어도 될 일이라서 그렇다. 물을 불에 올리고, 열기가 오르면 봉지에 든 것을 탈탈 털어 넣은 뒤 후루룩 먹는 라면은 간편함의 극한이다. 하지만 햄버거는 최소한 누가 차려줘야 내 앞에서 간편해진다. 노오란 버거빵(번) 사이에 파릇한 양상추, 아삭한 양파, 상큼한 토마토, 기름진 패티를 차곡차곡 쌓아서 한입 앙 깨물었을 때 빈틈을 채우고 흘러나오는 특제 소스의 복합적인 자극은 라면에선 찾을 수가 없다. 여러 사람의 수고로움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편리함이란 얼마나 예쁘고 탐스러운가.
결국 나는 누가 차려준 식사를 먹을 때 가장 만족하고, 똑같이 차려준다면 좀 더 수고롭게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더 좋은데 어떡해.
최근 햄버거의 유행이 돌아왔음을 느낀다. 어지간한 골목마다 수제 버거 가게가 하나씩 들어섰다. 수제 버거라는 건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버거에 이쑤시개 깃발 하나 꽂아 두고, 듬성듬성 썰어서 튀긴 감자튀김과 샐러드 따위를 곁들여 나온 햄버거를 포크와 나이프로 섞어서썰어서 먹는 방식이 대부분이었고, 흔히 '100% 소고기 패티'를 강조했었더랬다. 외국인들이 몰려 있는 이태원 등 지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 같고, 유명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파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다 맛있지는 않다. 부산 해운대 모 호텔의 33,000원짜리 수제버거는 한입 먹고 버려야 했다. 세상에 그렇게 짤 수가.
하지만 호텔 레스토랑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햄버거의 위상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걸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패스트푸드점에서는 '프리미엄 버거'를 출시하거나 별도의 특수매장을 내어 시장의 간을반응을 봤다. 그래 봤자 자기네 버거에다가 계란 프라이나 아보카도 정도를 썰어 넣은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외국에서 '준(准) 수제버거' 급의 패스트푸드점들이 들어와서 수 시간 고객 줄을 세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수제버거 가격이 점점 내리더니 이젠 온갖 들어본 적도 없는 수제 버거집이 여기저기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는 패티를, 저기는 소스를, 요기는 미친 칼로리를, 쩌어기는 비주얼을 앞세우는데, 솔직히 '그래 봤자 햄버거'라. 하지만 맛의 평균 수준이 확 올라가니, 나처럼 매주 1 버거 이상 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반가운 일이다.
최근에도 한 친구의 추천으로 마곡 근처에서 수제버거를 먹었다. 막 점심시간이 넘은 참이었는데, 일부러 몇 정거장 길을 돌아와서 도착한 가게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소고기 패티가 불판에 들러붙었을 때 나는 고소한 냄새 사이에 맥주의 톡 쏘는 향기가 은근히 났더랬다. 그래서 버거 두 개에 감튀 하나, 코울슬로 하나. 음료수는 콜라와 라거 한 잔. 물론 술은 내가.
마침 더위가 한풀 꺾여 있던 참이었다. 오래간만에 며칠 째 휴가를 내고 있던 친구와, 아무 때나 퇴근해도 되는 프리랜서인 나는 작정하고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차양막 아래로 마침 적당한 바람이 불어왔고, 마침 하늘을 덮은 구름에 내리쬐는 햇볕이 없어 수다 떨기 좋은 날이었다. 주전부리를 씹고 있어도 슬슬 배가 고파온다 싶은 즈음, 예상보다 빨리 나온 버거에 반색하며 달려갔다. 만약 사장님이 일부러 15분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엄살을 부린 것이라면 그는 분명 시간을 조미료로 쓸 줄 아는 사람일 터였다.
노오란 번 사이에 파릇한 양상추, 아삭한 양파, 상큼한 토마토, 기름진 패티. 조금 짠 편이라 더 좋았던 가느다란 감자튀김. 그리고 시원 쌉쌀하게 입 안을 헹궈주는 맥주까지. 가볍게 먹는다기엔 풍성했고, 간편하게 생겼지만 차림새와 맛까지 다 제법이었던 만족스러운 식사. 심지어 둘이 그렇게 먹고 단돈 2만 4천 원. 백 주부님이 칭찬할 것 같은 가격이지 않나.
샌드위치나 라면이었으면 후루룩 먹고 일어났을 것이고, 기분을 낸답시고 비싼 것을 먹었다면 먹는 것에 더 집중했을 것이다. 친구와 적당한 신변잡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오는 음식. 오래 씹거나 한참 음미할 필요가 없는 간편한 식사. 대화를 양념 삼아 먹는 햄버거는 마냥 가볍지도, 간편하지만도 않은 적당한 포만감을 주는구나 하고, 작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