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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먹고사는 일

[뉴욕에 살다] 내 꿈은 요리왕...

by 뉴욕에 살다

오늘은 NYE(New Year's Eve)에 일했던 대신 쉬는 금요일이다. 요즘 살짝 자주 쉬는 것 같은 기분이긴 한데 일을 더 한다고 Over Time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Holiday는 아주 칼같이 지켜가며 쉬고 있다. 지난달에 한참을 아프고 나서 깨달은 바는 일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우선 내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건강해야 일도 하지...


타지에 혼자 나와서 사는데 아프면 정말 서러운 걸 떠나서 만사가 귀찮다. 한국처럼 배달의 민족이 죽을 배달 해 주지도 않고, 병원을 가봐도 심하지 않으면 항생제를 처방해 주지 않아서 CVS나 Rite-aid에서 Nyquil을 사 먹는 게 오히려 더 나을 때가 많다. 아파도 혼자 죽을 끓여 먹어야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혼자 사는 게 참 편한데 이럴 때는 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현실 자각 타임이 자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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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쉬는 날의 프로토콜에 따라서 오늘도 알람을 해제하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천천히 눈을 떴다(고 하지만 흐린 하루였다). 그리고 안경을 쓰지 않은 채로 물을 끓이고, 커피를 정성 들여 갈고, 뜨겁게 내린 커피를 한잔하고... '멍'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웹서핑을 하다 보니 점심때가 다 됐네... 뭔가 멀쩡한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머릿속으로 냉장고를 스캔했다. 이런저런 몇 가지가 생각이 났고... 점심을 만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요리에 대한 단상...


지난 몇 년간 요리 프로그램이 TV 속을 온통 점령했던 것 같다. 어떤 채널을 틀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와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요리를 그러니까 말 그대로의 '요리'를 뚝딱 순식간에 만드는 걸 보고서는 감명이 깊었던 기억이 있다. 딱 내 취향의 방송들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었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그런 시기가 있어서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사실 그전까지는 남자들이 요리를 한다고 하면... (물론 집에서 나 같은 아마추어들이) 어설프겠거니... 제대로 못 먹고 사는구나... 안쓰럽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회식자리에 가면 '혼자 사니까 많이 먹어'라던가 '이런 거 못 해 먹으니까 이럴 때 많이 먹어둬'라던가 하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그래도 어릴 때는 그나마 보통 젊은 남자들이 대충 끼니를 때우니까 무리의 사이에서 조용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살았는데 점점... 혼자 사는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남자... 가 외국에서 살아가다 보니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받기도 했다. 매일 인스턴트나 라면만 먹고사는 것 아니지? 밥은 먹고 다니냐?


'야이 야이 야아~ 내 나이가 어때서?'


# 오늘의 요리

- 연어를 구워 올린 베이컨 오일 스파게티


# 오늘의 재료

- 어쩌다 사둔 베이컨, 냉장고에 항상 있는 양파(자색), 미국 마늘(창가에 두고 귀신 퇴치용으로 써도 될 것 같은 비주얼의 마늘), iKEA에서 오래전에 사둔 연어 필레(단백질의 부족함이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켜 냉동실 구석에 있던 연어를 찾아냈다), 지난봄에 사둔 아낌없이 주는 바질(화분으로 키우고 있는데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잘 자라고 있다), 시들어가는 샐러리, 히말라야 핑크 소금, 통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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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다. 한 끼를 그저 때운다는 말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먹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 타지 생활이라 그런지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가능하면 시간을 들여서 뭔가를 만들어 먹는 편이다. 오래되긴 했지만 처음 뭔가 먹을 만한 걸 만들어 먹기 시작할 때는 레시피를 따라서 재료의 양이나 뭔가를 넣는 순서 하나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대충 재료를 보고 어찌어찌어찌해서 만들어 먹는 편이다. 완성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음식이 될지 알 수 없다. 레시피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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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뭐 보이는 것만큼! 뉴욕에 살면서 맛있다는 파스타... 피자... 등등의 레스토랑을 다녀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맛은 있지만 뭐랄까 서양 사람들이랑 입맛이 다르다고 해야 할지... 내 입에는 전반적으로 짜게 느껴지는 음식들이 많다. 맛소금의 짠맛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은데 첫 한입은 혀를 타고 들어오는 화려한 짠맛에 맛있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점점... 먹는 속도가 느려지고 물이나 와인이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게 되는 그런 음식들이 많았다. 그래서 집에서는 가능하면 내 입맛에 맞춰서 만들어 먹는 편이다. 점심이라 맥주를 마시지 않은 게 아쉬웠다. 아무리 쉬는 날이라도 낮술은 어쩌다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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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챙겨 먹고 운동을 갔다. 밤사이 비가 내렸고, 하루 종일 흐린 하늘이었다. 덕분에 공원에는 미스트를 뿌려놓은 듯 신선한 공기들이 달려가는 속도대로 얼굴에 와 닿아서 오랜만에 마음껏 숨을 쉬고 돌아왔다. 사실 어제 피트니스센터를 갔는데 문을 닫았더랬다. 그러니까 망했다. 11월 말에 한국 출장을 가느라 한번 가고... 12월은 돌아와서 내내 바쁘다 아프다 해서 운동을 못했는데 신년 맞이 작심삼일을 실천하려고 갔더니 문을 닫았네? 흠......


여름이 오기 전에 다시 몸을 키워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이다.

그렇게 또 맥주를 마시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맥주는 죄가 없지... 사람이 문제다.


2020. 1. 3 뉴욕에서...

(2020을 쓰는데 흠칫... 무척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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