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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겨울나기...

[뉴욕에 살다] 뉴욕의 겨울은 길고 길다.

by 뉴욕에 살다

시간이 빠르기도 또 느리기도 하다. 지난번 글을 언제 올렸나 봤더니 벌써 보름이나 지났고, 뉴욕에 온 지 꽉꽉 채워 6개월이 넘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이렇게 정해져 있는 시간은 더디게만 가는 것 같은데 지나가 버린 시간은 어느새 무겁다. 지난 글에서 '삽' 이야기를 했었는데 '체호프의 권총'처럼 언제나 이야기에 한번 등장한 것들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내 차 트렁크 속의 삽도 결국... 쓰이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3월이 되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꽃 피는 춘삼월이라 했는데... 밤사이 소복소복 예쁘게도 내렸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예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눈이 내리면 바쁘다. 쉬는 날이라 공항 사정을 실시간으로 체크해보면서 출근을 할까 말까 내적 갈등에 휩싸인 상태로 오전을 보냈다. 다행히 공항은 사정이 나은 것 같았다.

3월 1일이었는데... 적당한 눈이 소담스레 내렸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다.

괜찮다...라고 생각했는데 세워놓은 내 차에는... 제설차가 치워놓은 눈이... ㅠㅠ 쌓여있다. 얼어붙으면 내일 출근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삽을 꺼내들었다. 군대에서도 해본 적이 없는 삽질이라... 헛손질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차를 눈더미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이른 새벽에 눈은 그쳤고, 아직 흐리지만 눈을 치운 기념으로 산책을 나섰다. 몇 년 동안 일기예보를 담당했었기에 눈이 오면 항상 비상이었다. 눈이 오면 근무가 바뀌기 일쑤였고, 비상대기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눈을 바라봤기 때문에 눈 내린 풍경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일을 했고, 그치고 나서 녹을 때 즈음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았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걸어 다녔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아름다웠다.

스키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마치 크로스컨트리 선수처럼 슉슉 신발을 밀면서 달려보고 싶었다.

혼자 눈 내리는 날 집 마당을 내달리는 멋모르는 강아지처럼 눈밭을 신나게 걸었다.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는 뽀드득 뽀드득 하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신발이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그냥 계속 두껍게 쌓은 눈을 찾아가며 밟고 다녔다. 강아지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가는 날이었다고나 할까...

산책이 끝날 무렵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려오는 한국에서의 미세먼지... 다행히 여기는 공기 하나는 좋다. 다른 건 다 별로인 것 같은데 공기는 정말 좋다. 맑은 하늘에 감사하며...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날이다. 어제의 낭만은 오간데 없고... 오후부터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공항은 마비가 되어가고... 그래도 큰 탈 없이 정한 시간에 비행기가 잘 들어왔다가 조금 늦게 나갔다(퇴근이 많이 늦었다는 말이다). 집에 가려고 시계를 봤더니... 새벽 5시쯤... 그래 그래도 선방했다.

차를 가지고 동네에 왔더니... 공항이랑은 또 다른 풍경... 겨울 왕국이네 여기... 어디다 차를 세워야 하나... 아니 세울 수 있을까... 하앍...


눈이 많이 내려서 6개월을 매일 같이 다니던 길이 무척 낯설었다. 집은 어디인가...

엄청나게 먼 거리에 차를 대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외로운 발자국만 덩그러니...).


여기 분명 3월이 맞는데... 이러면 반칙 아닌가...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밤새 놀란 가슴을 달래고... 잠이 들...

었어야 했는데... 잠이 든 듯 만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바로 짐을 챙겨서 공항으로 나섰다. 사실 출장을 가는 비행기를 타는 날이었는데... 밤새 눈 때문에 퇴근(사실 쉬는 날)을 늦게 해서 겨우겨우 비행기를 타려는데 많이 늙은 기분이 들었다. 하... 먹고 자야지... 미국 비행기는 밥도 안주니까...

4-5시간 비행 끝에... 달라스에 도착했다. 낮 최고 기온이 보통 20도라고 하길래 따뜻한 동네에 가는구나 싶었는데... 내가 도착한 월 화 수... 3일만 뉴욕보다 더 기온이 낮았다. 달라스에서 3월에 영하 2도면... 반칙 아닌가...


2019. 3. 12


눈이 내리거나, 많이 내리거나... (TMI... 다음 이야기는 아프거나 바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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