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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루시아 Sep 23. 2023

산을 오르며

주변을 살피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기껏해야 산책 정도가 전부인 내 일상에 등산이라니. 아니 이름은 있지만 동네 뒷산이었으니 등산이라기보다, “언니, 산에 걸으러 갈래요? 꽤 좋아요!”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 정도라고 보는 것이 맞는 말일테다. 햇수로 세어보니 산을 만나는 건 한 5년 만인 것 같다. 그러니 마음을 굳은 땅에 바짝 붙이고 살던 내게는 아주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기껏해야 동네 산이니 가볍게 다녀와야지’ 얕보며 심보를 고약하게 먹었던 탓인지 나는 자꾸만 헉헉 대는 내 숨소리와 몽글해지는 허벅지 앞에서 작아졌다. 아주 가파른 오르막이 두 번 정도 있었는데 그 고비를 넘어서면서 언제 흘려봤는지 기억조차 없는 개운한 땀이 턱과 등을 타고 흘렀다. “언니 할 만해요? 힘들면 좀 쉬어가요. 나도 처음엔 심박수도 엄청 높고 그랬는데, 다니다 보면 재밌어요.” 응원해 주는 동생에게 고개만 끄덕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쉬면 다음 걸음을 내딛기가 더 힘들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으니까.

끝날 것 같지 않은 두 번째 오르막은 숨이 턱 끝까지 찼을 때에야 끝이 났다. 준비해 간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겨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애를 쓰며 걷는 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간 속살을 드러낸 흙들 사이로 어느 나무에서 뻗어온 뿌리인지도 모를 것들이 불쑥불쑥 솟아있었다. 사람들 발길에 차여 뿌리껍질이 벗겨진 것도 있고 약하지만 땅에 꼭 붙어 납작 엎드린 것, 며칠 비가 온 때문인지 실하지 못해 땅에서 패인 잔뿌리까지 멀리서 본 산에는 없던 나무의 발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이 뿌리를 발판 삼아 걸어왔지. 오르막을 걷고, 내리막을 걸으며 그 뿌리가 없었다면 나는 축축한 산길의 흙구덩이에 빠졌거나 미끄러졌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테다. 나는 그를 발판 삼아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았다. 도시의 소음이라곤 없는 나무숲 한가운데에서 숨을 고르며 푸른 기운을 맘껏 들이마셨다.


내 발아래를 살피다 문득, 나는 어디에 얼마만큼의 깊이로 뿌리를 내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감히 뿌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깊이와 관심을 가지고 진득하게 고민한 것들이 있었던가. 특히 요즘엔 잡초 뿌리만큼도 질기지 못한 나의 무능과 헛헛함을 드러내는 것 같아 자꾸만 작아지는데. 그래도 저리 뿌리를 엉켜 살아가는 나무를 디딤돌 삼아 잊고 있던 가족들을 생각한다. 언제나 굵을 것 같던 남편의 뿌리엔 생채기가 많은 가 보다. 일에 쫓겨 같이 웃고 떠들 여유조차 없는 남편을 보며 오랜만에 활기를 찾은 나는 미안하기도, 감사한 마음도 크다. 어떻게든 엄마와 아빠 사이를 비집고 들어야겠는 딸아이는 크고 작은 온 뿌리에 얽힌 녀석들 같다. 서로 얽혀 본디 굵기보다 더 크고 실하게 자라는 어느 나무의 뿌리처럼, 아직은 작고 작은 그러나 덕분에 의지가 될 때도 있는 나무 같다. 내가 생채기 난 뿌리만큼 온몸을 내어주며 남편과 아이의 디딜 계단이 되진 못하겠지만 그저 아이의 그것처럼 뿌리가 어우러져 함께 디딜 좁고 작은 길은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겨우 하루 한두 시간 남짓 등산을 하고 왔다고 혼자 생각이 많아진다. 등산은 분명 정신 건강에 좋은 운동 같다. 동행자가 있었음에도 나무처럼 아래로 혼자 깊어진다. 혼자 오르고 내리면서 멍한 동안 ‘어, 내가 언제 다 내려왔지?’ 하게 된다던 동생의 말이 실감 난다.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 그처럼 달리거나, 오늘처럼 산에 오르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은 생각을 움직이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몸과 마음이 깊고 가벼워지기 위해서 올 가을엔 좀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혼자 산을 다닐 용기는 없으니, 가능한 시기 동안 부지런히 함께 오르고, 또 그 이후엔 부지런히 남강을 따라 걷고 뛰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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