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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y Sep 08. 2022

Bedbugs(빈대) 소동-캐나다

딸의 위로


‘엄마, 나 지금 병원 가는 길이야. 나중에 전화할게.’

오밤중에 난데없는 딸의 문자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가 아픈 건지 이유도 모른 채 기다려야 했다. 한 시간쯤 지나 다시 연락이 왔다.

“엄마는 피부 괜찮아?”

“괜찮은데, 왜?”라고 말하며 내 팔을 바라보다가, 안 보였던 빨간 자국들이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딸은 미국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며칠 뒤였다. 딸과 통화하는 중 팔과 다리가 많이 가렵다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학교 보건실에 들렀는데 다음날까지 가라앉지 않으면 다시 오라고 한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딸은 병원으로 보내졌다. 검사 결과, ‘Bedbug’(빈대)에 물린 자국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캐나다 여행 중 미국 집으로 베드버그를 데려온 것으로 확신했기에, 집과 아이의 물건 소독이 시급하다는 특명이 내려졌다. 모기에 물린 것보다 수십 배는 가렵다는 빈대, 딸은 약을 처방받고 돌아가는 길에 물린 자국 사진을 보내왔다. 내 것과 모양과 크기가 똑같았다.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신기하게도 딸의 연락을 받은 그날부터 나 역시 극심한 가려움증이 시작되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없던 자국들이 생겨나 있었다. 머나먼 캐나다에서 옷이나 가방에 빈대를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캐나다를 다녀온 옷가지를 다 버렸다.

딸이 걱정되었다. 아니, 홈스테이 집이 더 걱정이었다. 널찍한 삼층집에 빈대가 우글거린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딸아이가 쓰던 방은 폐쇄되었고 여행에서 가져간 모든 물건은 건조기로 들어갔다. 빈대가 햇빛과 고온을 가장 싫어한다니 건조기를 계속 돌린 모양이다.

결과적으로는 한국 집은 소독하지 않았고 나에게 증상이 더 이상 없었으니 나는 빈대를 데려오지 않았다. 미국 집은 지금까지도 소독으로 빈대를 없앴다고 확신하고 있다. 가려움이 시작된 게 여행 다녀온 며칠 후, 같은 날부터 시작되었으니 나는 잠복기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단지 추측일 뿐이다. 이유와 결과를 떠나서, 죄인 된 심정으로 홈스테이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빈대를 데려가진 않았을 거라는 구차한 변명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한 폐를 끼치게 되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가려운 피부만큼이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딸아이는 걱정하는 나에게  ‘여기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피부과에 다녀오고 집 소독해야 해’라는 당부만 거듭했다.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홈스테이에서 얼마나 난처하고 가시방석 같을까 라는 생각에 ‘엄마가 미안해’를 계속 되뇌었다.

 

보름 전만 해도 미국에 있는 딸을 만나러 가게 되어 몹시 들떴었다. 어떤 집에서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캐나다 여행에 대한 기대 또한 컸다. 하지만 딸을 만나서도, 홈스테이 집에 하루 머문 것도, 여행 중에도, 무언지 모를 마음의 불편함이 있었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좋다는 것은, 홈스테이 엄마를 진짜 엄마처럼 잘 따르고 질투가 날 정도로 친근했다는 것과 홈스테이가 자기 집 인양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운한 것은, 함께 여행한다는 나의 기대치에 비해 딸은, 나와의 관계보다는 자기가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중요도가 훨씬 컸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만큼 나는 자식에 대한 마음의 빈자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더구나 이번 여행은 뭐든 자기가 알아서 예약과 주문 등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하니 나 스스로 무능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이 서운함으로 느껴진 것이다. 무거운 짐을 드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었고, 언어가 필요한 일도 자신이 알아서 다 해결했다. 몸은 편했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묘한 감정들이 요동쳤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가까스로 서운한 마음을 추스를 즈음 ‘배드버그’ 사건이 터지니 시간을 되돌리고만 싶었다. 서운함이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딸을 위해서 간 여행이 아니라 딸을 핑계 삼아 내가 계획한 여행이었던 것이다.

 

‘빈대 소동’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딸과 연락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이기에 드는 죄책감 때문에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피부와 집은 괜찮은지, 딸이 걱정스럽게 먼저 연락을 해왔다. 홈스테이 집과 자신의 피부는 모두 나아졌고, 우리가 잘못한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미국 부모도 다 이해하고 있다고...... 그제야 옥죄던 가슴을 펴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딸에게 필요한 물건도 사주고, 맛난 것도 먹고, 좋은 곳도 보여주자는 심정으로 달려간 캐나다 여행 끝에 ‘빈대’ 녀석의 횡포와 ‘딸에 대한 서운함’으로 마음이 힘들었다. 하지만 여행 중에 느꼈던 딸에 대한 서운함이,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걸 그때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의 지나친 곡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의연하게 '빈대 소동'을 처신하고 나까지 걱정하는 딸의 모습에서 성큼 성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베드버그'로 고생했지만, 다시봐도 운치있었던 캐나다여행(2018년)

                        여행노트에서 꺼낸 추억 이야기 10.

                          -2018년 열여섯 살이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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