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M. 조의 <전쟁의 맛>을 읽으며 떠올린 나물의 기억
내 한식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나를 가장 애틋하게 만드는 한식은 나물이다.
특히 봄나물이 그렇다. 긴 겨울 끝에 눈이 녹고 체감 온도가 완연히 올라가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기 시작할 즈음이 되면 나는 냉이, 봄동, 달래, 쑥을 떠올린다.
한국에서 봄을 지낸 지 10년은 넘은 듯하다. 봄의 꽃샘추위와 개나리, 엄마의 달래장과 냉이나물도 그만큼의 시간 동안 맛보지 못했기에 10년 중 몇몇 봄에는 그 향수를 애써 눈가림하며 견뎠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이의 학사 일정에 맞춰 귀국 일정을 잡다 보니 결국 여름에 주로 한국에 가게 되고, 그래서 여름 제철 음식에 대한 욕구는 어느 정도 충족하지만 제철 봄나물에 대한 향수는 절대 채워지지 않은 채 매년 애틋해지기만 한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한국의 봄나물을 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맘때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의 한인 마트에 가면 냉이나 달래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 말은 즉, 그 외 지역 사람들은 그곳까지 가야 제철 나물을 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시간 주에 살던 시절, 오로지 냉이를 사기 위해 차로 네 시간이 걸리는 시카고의 한인 마트까지 차를 내달린 적이 있다. 그렇게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종교가 없어도 신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최근에는 사정이 나은 게, 데친 냉이나물을 얼려서 파는 온라인 쇼핑몰도 있고 하다못해 시판 냉이된장찌개 소스로 냉이의 향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해? 제철 나물이 대체 뭔데! 가끔씩 울컥하며 서러워질 때 나는 그레이스 M. 조의 <전쟁의 맛>을 꺼내든다. 이 에세이에서 설명하는 저자의 한식은 개인의 정체성과 깊게 얽혀 있다.
70년대에 이민 온 그녀와 그녀의 엄마에게 한식이란 전쟁과 이민의 트라우마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안정제와도 같다. 저자의 엄마는 한국 식재료를 구할 수 없는 소도시에서 배추김치를 담그기 위해 아빠에게 배추를 사다 달라고 부탁하지만, 아빠는 배추가 아닌 양배추를 사가지고 온다. 저자의 엄마는 이건 배추가 아니라고, 누가 양배추로 김치를 담그냐고 울부짖는다. 양배추와 배추의 엄청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면 어떨까. 안 그래도 낯선 환경인데, 가장 친밀한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느낄 수밖에 없었을 엄마의 고립감은 엄마의 이민 생활 그 자체를 상징하고, 그 감정은 헤아릴 수 없이 강하고 파괴적인 고통의 다름아니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그 절박함을 어느 정도 희석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선택지가 생긴 요즘, 나는 그 고립감이 더더욱 사무치게 다가온다. 이제 양배추와 배추가 완전히 다른 식재료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오히려 그때 음식으로 치유받고자 했던 한인들, 소수자들의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다짐의 실천으로 봄만 되면 나물로 인해 도지는 내 안의 고립감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다시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내 산후조리를 위해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우리는 함께 마트에 갔다. 나는 그때 미국 생활 3년 차였고 내 음식이란 걸 해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 살림꾼이었다. 엄마가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엄마에게 이곳의 식재료에 관해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내 살림력 자체도 미비했고 한국과 똑같은 식재료가 거의 없는 이곳의 마트를 엄마가 낯설어하지 않을까, 원하는 재료가 없다고 불평하며 한인 마트를 헤매고 다녀야 하자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홀푸즈 매장에 진열된 식재료를 빠르게 훑으며 카트에 필요한 물건을 척척 담았다. 이를 테면, 엄마는 산모에게 끓여줄 갈비탕과 미역국에 넣을 소고기 부위를 눈대중 만으로 정확히 파악해 집어 들었다. 이민 첫 해에 소고기 부위별 영문명을 메모장에 일일이 적어 들고 다니던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감탄한 순간이었다.
“엄마, 그 부위가 뭔 줄 알아?”
“보면 알지.”
시큰둥한 엄마의 말투에서 엄청난 내공을 느꼈다. 하긴, 경력자는 무시 못하지. 그런 엄마를 둔 나는 괜스레 우쭐해져서 든든한 마음으로 엄마의 뒤를 따랐다. 엄마는 처음 와 보는, 온통 서양인들뿐인 낯선 마트에서도 손가락으로 이것저것 식재료를 가리키며 필요한 식재료를 카트에 척척 담았다. 그러다가 채소 코너로 갔을 때, 뜬금없이 워터크레스를 집어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 그게 뭔 줄 알아? 알고 사는 거야?”.
“몰라. 근데 어떻게 해 먹을지는 알겠어.”
그 당시 내가 아는 엄마는 고수 향이나 레몬그라스, 중국 음식의 향신료를 먹지 못하는, 토종 한식 입맛에 길들여진 옛날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워터크레스를 집어 들었을 때, 그 음식을 먹고 탈이 나는 엄마를 상상했다. 그러나 엄마의 무덤덤한 말투가 내 두려움을 조용히 제압했고 우리는 워터크레스 한 다발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뚝딱뚝딱 차려낸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식탁 위에는 참나물 무침처럼 생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존재만으로 두려웠던 초록 잎채소는 데쳐서 초고추장 양념과 참기름에 버무리자 영락없는 나물 무침이 되어 있었다.
“이런 나물이 어디서 난 거지?”
그 나물이 워터크레스라는 걸 짐작조차 하지 못한 애송이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접시를 바라봤다.
“아까 산 거, 그거잖아.”
워터크레스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엄마의 대꾸를 들으며 나는 미심쩍은 손길로 나물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엄마가 무친 워터크레스 초고추장 무침은 내가 늘 먹어 왔던 엄마의 맛, 미나리 무침의 맛, 참나물 무침의 맛과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새로운 나물의 맛을 선사했다. 예전에 중국 출장을 갔을 때 먹어 본 적이 있는 생선탕에 미나리처럼 잠겨 있던 그 초록 식물. 미나리를 기대하고 먹었지만 낯선 향에 놀라고 말았던 워터크레스의 기억은 이 날 부로 참기름과 매콤 새콤한 초고추장 양념에 버무려진 아삭하고 향긋한 나물의 기억으로 붙여 넣어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수경재배한 나물과 토양재배한 나물의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엄마가 뿌리와 이파리를 보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 친근하지만 새로운 나물 무침을 창작해 냈다는 사실은 그 이후 내 타지 생활의 기조를 형성할 정도로 내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 이후 봄만 되면 워터크레스를 떠올린다. 이곳에서 워터크레스는 봄이 아니어도 구할 수 있는 흔한 허브지만 봄이 되면 그때 엄마가 무심하게 식탁에 내려놓던 나물 접시를 생생하게 떠올린다. 미나리가 먹고 싶어서 영하 20도가 넘는 겨울, 시카고 한인 마트까지 네 시간을 내달린 기억, 그렇게 장을 보고 돌아와 트렁크를 열었는데 얼어서 못 먹게 돼 버린 미나리를 보며 눈물짓던 기억은 어느새 엄마가 낯선 허브로 나물을 무쳐 준 애틋한 기억으로 대체되었다.
그 이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 사이 한식이 여러 나라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유튜브로 전 세계 사람들이 온갖 재료로 나물 무침을 하는 동영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그 파도 속을 유영하며 게임하듯 특이한 재료로 나물 무치기 게임에 동참한다.
이제껏 해 먹어 본 나물 반찬 중 기억에 남는 건 아스파라거스 초고추장 무침이다. 막대기처럼 긴 이 채소는 맛으로 보나 향으로 보나 한국의 어떤 채소와도 닮은 구석이 없지만, 살짝 데쳐 초고추장 양념에 무치면 아스파라거스 특유의 고소하고 아삭한 식감과 매콤 새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입안의 호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막대기 모양의 나물을 꼭꼭 씹으면서 나는 이 메뉴가 내 이민 생활에 지혜를 내려주기를 기도한다. 배추가 아니면 김치를 담글 수 없다고 눈물짓던 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오늘날이 오기까지 애쓰며 살아온 사람들을 되돌아보며 미나리, 봄동, 냉이를 먹을 수 없어서 사무치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대신 낯선 음식을 먹는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더 나아가, 나만 모르고 있던 그들의 미각을 호시탐탐 노리며 그 재료들로 또 무엇을 나물로 만들지, 그런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물론 그 궁리가 내 마음속 향수의 구멍을 완벽히 메워 주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로 인해 나와 내 주위 사람들, 나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조금의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한식의 맛을 찾아서, 미국인들이 먹지 않아 길가에 버려진 나물을 찾아서 낯선 땅을 무리 지어 다녔던 내 앞을 살아가신 나와 같은 마음의 한인들을 잊지 않는다. 오늘도 부지런히 저녁을 차리며 식재료를 다루는 유연함을 가르쳐 준 엄마의 경험과 그 연륜에 깊은 경의와 사랑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