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데믹 블루, 당신의 안부가 궁금한 날들(2)
지난 8월 관악산 국기봉에서 하산을 하다가 발목을 삐끗했다. 우울과 상실의 시대에서 찾은 유일한 희망인 등산을 보름 정도 쉬게 되었다. 하필 회사에서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도 잘 풀리지 않아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았다. 어째서 고난과 시련은 짝을 이뤄서 나타나는가. 산에 갈 수 없으니 누워서 핸드폰만 주구장창 만졌다. 그동안 못 봤던 TV프로그램과 영화를 정주행했고, SNS로 남의 일상을 구경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중고 직거래 애플리케이션 서비스를 알게 됐는데, 자신의 거주지를 인증하면 이웃끼리 중고 거래와 동네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일종의 지역 생활 커뮤니티였다. 별의별 물건들이 올라왔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료 나눔도 많았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친절한 거래자, 저렴한 가격과 좋은 품질, 토박이들이 알려준 입증된 가게들을 만나면서 확신이 생겼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본 이웃 간의 정이었다.
20년 전에는 앞집, 옆집, 윗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았다. 연령대도 비슷해서 서로의 집을 서슴없이 오가며 돈독한 우정을 쌓았다. 또 열대야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집 앞 골목에 돗자리를 펴고 시원한 수박을 나눠먹었던 기억도 흐릿하게 남아있다. 아이들은 오순도순 모여앉아 수박씨 뱉기 놀이를 했고, 어른들은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담소를 나눴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여름밤이 아직도 선명하다. 졸음이 몰려오면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머리칼을 넘기는 기분 좋은 손길과 선선한 바람, 산들산들 흔들리는 등나무 잎, 까만 밤을 수놓은 별빛 아래는 정(情)이 가득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웃 간의 교류와 소통이 현저히 줄었고, 사회에서는 비대면이 최고의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다. 거기다 마스크까지 가세를 더 했다. 이제 인사는커녕 얼굴을 먼저 알아보기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중고 직거래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다. 참 서글프지 않은가.
나는 요즘 핸드폰을 내려놓고 주말마다 환기와 청소를 한다. ‘어디 팔 만한 물건 없나?’하고 시작했던 청소가 체질에 맞았다. 무엇보다 등산에 이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서 기뻤다. 생각보다 몸을 많이 써야 해서 고됐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더 이상 쓰지 않거나 사놓고도 손도 대지 않은 물건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허영과 사치가 심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고, 잘 버는 것 이상의 잘 쓰는 삶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서랍장부터 옷장, 책상, 창틀, 침대 밑까지 꼼꼼히 쓸고 닦기를 반복하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백지가 됐고,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청소를 하면서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깊고 넓게 바라봤다.
서랍장을 열면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주고받던 쪽지 편지, 졸업식 때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친우들과 나눠가졌던 교복 단추, 한창 모았던 스티커 사진과 빛바랜 영화 예매권 등이 있다. 이런 물건들은 보기만 해도 그날의 장소, 날씨, 분위기, 대화의 소재들이 떠오른다. 시대별 가요를 듣고 있으면 그 시절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과거를 돌아보는 특별한 경험이 됐다. 다음은 현재의 나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옷장과 책상이다. 어떤 옷을 입을 때 편한지,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물건을 자주 쓰는지 청소를 하면서 취향을 알아간다. 단추가 있는 체크무늬 파자마와 나뭇결이 살아있는 목제 가구, 알전구가 노출된 빈티지한 조명, 도자기로 만든 인센스 홀더, CD 플레이어, 연필과 지우개, 다육이 화분 등 좋아하는 것으로만 모아두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사소한 기쁨은 늘 일상 곁에 있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했다.
청소를 마친 뒤 모아둔 물건들을 펼쳐놓고 버릴 것과 나눌 것을 구분한다. 버릴 것들은 대부분 수명을 다한 것들이고, 나눌 것들은 쓰다 만 것 혹은 버리긴 아까워서 보관해뒀던 것들이다. 순간순간 애정을 듬뿍 담아 사용하는 물건들이 있는 반면에 얼마 못 가서 먼지만 쌓이는 물건들이 있다. 이렇게 쓰이려고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닐 텐데 미안함이 몰려왔다. 처음 샀던 모습 그대로 정돈을 하고 정성껏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좋은 주인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물건에 대한 추억을 적었다. 내가 물건을 통해 받았던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진심이 통했는지 좋은 거래자를 만났고, 이러한 과정을 몇 차례 더 해보니 물건을 대하는 태도도 점차 바뀌게 됐다.
사고, 버리고, 또 산다는 게 당연한 소비 패턴으로 자리 잡고 있는 현시대에서 물건의 쓸모와 의미를 고민하고 끝까지 다 써내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디자인적으로, 기능적으로 월등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요즘 물건의 수명은 한 달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과거에는 중고 거래를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환경을 위해서, 공간을 정리하기 위해서, 내겐 불필요하지만 새것 같은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기 위해서 한다. 매번 안 쓰는 물건이 골칫거리였는데 이제는 꼭 맞는 주인을 찾아주고, 이웃 간의 교류와 소통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러한 변화가 물건을 넘어서 소비를 대하는 태도까지 바꿔주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를 해본다. 잘 쓰는 삶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