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출발했다.
열흘이라는 긴 연휴 동안의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입시생인 첫째와 아이의 끼니를 위해 남편은 못 간다. 둘째와 단 둘이서 떠나는 여행이다. 남편은 우리가 떠나는 날 아침까지 걱정이 많아 보였다.
여행 계획을 짤 때 플랜비까지 챙기는 남편은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기분 따라 일정을 변경하는 마누라를 걱정 중이겠지. 여행 일주일 전에 숙소과 교통편은 예약해 놨으니 여행의 반은 준비된 게 아니냐는 나의 당당함에 남편은 미소인지 울상인지 모를 애매한 표정이다. 나로선 아이와하는 여행이라 많이 준비한 거다.
목적지는 독도. 교통편이 배뿐이다. 당일의 풍량과 파고에 따라 배가 뜨는지 결정된다. 목적지가 특수한 지역이라 교통편과 숙소를 정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하루에 뜨는 배편이 몇 개 없고 숙소를 항구 가까이로 잡을지 풍경이 좋은 곳으로 잡을지 고민됐다.
육지에서 독도로 가는 방법은 먼저 울릉도에 가야 한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독도에 가더라도 약 30분 머무는 것이 전부. 사실 주로 여행할 곳은 울릉도인 셈이다.
울릉도로 가는 배편은 육지에서 포항, 강릉, 묵호 세 곳이다. 도서관에서 독도에 관한 책을 네 권 빌렸다. 동해보다 남해가 잔잔해서 울릉도로 가는 배편이 안정적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3개월 전부터 배편 예약이 시작된 터라 포항은 일찌감치 매진. 포항-강릉-묵호 순으로 배편이 매진되는 듯하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묵호라는 곳을 처음 알았다. 묵호는 울릉도를 가기 위해 배를 타러 가는 것일 뿐. 묵호항여객터미널까지 걸어서 3분 거리의 숙소를 예약했다. 울릉도로 가는 배편이 새벽 6시이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한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지 30분쯤 됐을까 해운사에서 연락이 왔다. 예약해 둔 독도행 배편의 결항 소식. 풍량주의보로 인해 운항이 통제됨을 알리는 전화였다. 해당 일자의 예매는 순차적으로 취소 처리된다고 직원은 친절하고 상냥하기만 하다. 내 기분과 달리. 독도에 가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더니. 기차 창밖을 보며 신난 아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엄마, 우리가 울릉도에 있는 동안 하루는 배가 뜨지 않을까요? 실망하지 마세요."
독도에 가고 싶었던 건 아이인데 내가 위로를 받을 일인가 싶어 바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어 보였다. 독도에 못 가면 어때. 울릉도에서 재미나게 놀자꾸나.
3시간을 달려 묵호에 도착했다. 딱 점심시간이라 역 근처 문 연 음식점에 들어갔을 뿐인데 생각지도 않게 맛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짐을 최소한으로 가져왔는데 무겁다. 벌써 숙소에 짐을 내리고 쉬고 싶다. 항구 바로 앞에 숙소를 미리 예약한 나를 칭찬하며 숙소에 짐을 내려놓는데, 또 해운사에서 전화가 왔다. 불길하다. 내일 울릉도행 배가 결항.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독도행 배는 결항되는 경우가 많지만 울릉도행은 웬만하면 운항한다던데, 책에서.
울릉도에 잡아둔 숙소는? 그다음 날 배편으로 갈까? 돌아오는 날 배는 운항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뭐부터 취소를 하고 예약을 하지? 동해와 울릉도 날씨를 체크하느라 핸드폰을 뒤적였다. 사흘동안 계속 비다. 우선 왕복 배편을 모두 취소하고 숙소도 취소 요청했다. 때마침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 울릉도행 배편이 취소됐어."
"다행이네. 안 그래도 강원도는 계속 비 예보가 있어서 걱정되더라. 울릉도 갔다가 못 돌아올 수도 있잖아. 강원도도 볼 거 많으니깐 다시 숙소 잡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놀다 와."
"엄마, 울릉도는 다음에 가족이 다 같이 오면 더 좋잖아요."
남편과 둘째가 합심했나. 집으로 갈지 머물지 결정해야 한다. 모레는 배가 뜰까? 울릉도로 향한 마음을 포기하기 쉽지 않다. 날씨와 배편을 분 단위로 확인하며 둘째의 의견을 물어봤다.
"어떻게 할까? 내일 집에 갈까? 여기 여행할까?"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집에 가면 아빠가 있고, 여기서 여행해도 좋고. "
오늘 하루는 마음 편히 쉬자. 숙소 체크아웃 할 때까지 늘어지게 자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밤에 결정하자. 묵을 숙소가 있다면 더 머물고 기차표가 있는 날 떠나기로.
계획대로라면 새 나라의 어린이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새벽 6시 배편이니 늦어도 5시에는 여객터미널에서 표를 확인받아야 한다. 일어나서 준비하고 아침까지 챙겨 먹으려면 자는 게 자는 게 아니었을 것 같다. 뒤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사춘기 아들에게 아침 식사는 중요하니까.
내일은 늦잠 자도 되니 남은 시간이 여유롭다. 묵호항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숙소를 나가자마자 바다다. 고기잡이 배들이 일렬로 줄지어 있다. 방파에 안쪽이라 그런지 잔잔한 물결을 따라 배들이 리듬을 탄다. 바로 옆은 어시장이다. 막 잡아 올린 물고기들이 어찌나 쌩쌩하던지. 우리 동네 횟집의 수족관에 갇혀 있던 애들과 너무 다른 몸놀림이다. 수족관을 뛰어넘을 듯이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기세에 몇 번 물벼락을 맞을 뻔한 정도. 구경하느라 눈이 휘둥그레진 둘째는 그 앞에 꼼짝없이 서있다. 한 손님이 고등어를 달라고 하자 사장님의 능숙한 솜씨로 고등어를 잡아 올리는데 힘이 좋아 도망갈 뻔했다. 사장님은 고등어를 두 손으로 탁 잡더니 머리를 꺾는 게 아닌가. “뚝!” 눈이 마주친 둘째와 나는 잰걸음으로 어시장을 빠져나왔다.
어시장 옆엔 높은 계단이 있고 위쪽엔 사람들이 걸터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를 가슴만큼 들어야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올랐다. 높은 계단 위에 오르니 끝없이 밀려오는 거친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쳐 만드는 물보라가 장관이었다. 넘실대는 검은 바다와 바닷바람을 마주하니 어떻게든 울릉도에 가볼까 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왼쪽으로는 독특한 모양의 해상 보도 교량이 보였다.
어쩌다 머물게 된 묵호는 작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천곡황금 박쥐동굴, 무릉계곡, 추암촛대바위 등. 일반버스가 하루에 두 대밖에 없어서 '동해시티투어' 버스를 탔는데 해설사도 있어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며 편하게 여행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독도행이 무산되어 아쉬운 것도 잠시, 묵호의 볼거리, 먹거리 최고다. 잠시 스쳐 지나갈 뻔한 묵호. 다음엔 첫째와 남편도 함께 방문하고 싶다. 묵호야, 딱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