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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Dec 25. 2021

엄마라는 세계로의 입문

워킹맘을 디자인해드립니다 (4)

“우리 쑥쑥이 잘 나왔어~ 4킬로라고 하면 부끄러울 것 같아 3.98로 태어났네."


마취가 덜 풀려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앞도 잘 안 보이는 해수의 귀에 대고 민석이 속삭입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잘 태어났다니 안심이 됩니다.



예정일이 가까워오자 85킬로의 거구가 된 해수는 다리가 너무 부어 고구마 색깔이 되었고 허리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그래도 자연 분만을 해야 회복도 빠르고 살도 잘 빠진다고 하니 10층까지 비상계단을 하나하나 힘겹게 오릅니다. 결국 육아휴직을 못 받아 4월에 복직해야 하는데… 해수는 아직까지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또래에 비해 나이가 많고 몸도 약한 친정엄마나 디스크 수술을 2번이나 한 시어머니에게는 도저히 맡길 수는 없어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요새는 육아휴직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직장을 다니거나 아이를 맡아 길러줄 가족이 있는 친구들이 가장 부럽습니다.




토요일 새벽.

해수는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침대에서 일어나 떡만둣국을 잔뜩 끓였습니다. 해가 떠서야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는 민석에게 해수가 차분하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낳을 것 같아…”


해수의 느낌대로 점심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오후가 되니 주기적인 간격으로 참기 힘든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검진을 하기 위해 병원에 도착한 해수는 병원 앞에서 갑자기 민석에게 밥을 먹자고 합니다. 친한 대학 선배가 치킨 버거 하나 먹고 아이 낳으러 갔더니 너무 힘들었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병원 바로 앞 고깃집에 들어가 불고기 2인분에 밥 2 공기를 시킵니다. 5분 동안 배를 부여잡고 아파하다가 통증이 잦아들면 밥과 고기를 입에 꾸겨 넣다가 다시 배를 부여잡기를 반복하며 불고기 2인분을 끝까지 다 먹는 해수의 기괴한 모습에 민석은 한술도 뜨지 못했습니다.


극단의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기 고문이 이런 거라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석은 해수의 손을 꼭 잡고 출산 교실에서 배운 라마즈 호흡을 유도하지만 통증이 시작된 지 8시간이 넘어가자 호흡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띵띵 부은 거구의 몸으로 임산부 요가에 계단 오르기도 매일 했건만… 아기가 거꾸로 자리 잡고 탯줄까지 감고 있어서 결국 제왕절개를 하게 됩니다.

수술 직전 고통이 극에 달았을 때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임신 기간 내내 걱정만 했던 날들이 헛되게 느껴집니다. 이 순간만큼은 아이와 해수 자신에게 아무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마취 가 시작되고 의식이 사라지기 전, 곧 이 고통이 끝난다는 생각에 감사하게 됩니다.




신생아 같지 않게 달덩이 같은 딸

아이를 처음 마주한 해수는 생명 탄생의 신비에 대해 온몸으로 느낍니다. 순탄하지 않았던 출산 과정을 이겨내고 문제없이 세상에 나온 볼이 통통한 딸이 너무나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고난이 떼로 몰려오면서 감사함은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가장 큰 고난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배고픔’.

수술 후 이틀 동안은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습니다. 혼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수술 후 통증으로 잠을 자기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극한의 배고픔이었습니다. 그나마 병원에 오기 직전에 통증 속에서도 불고기를 억지로라도 먹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전엔 신체의 일부에 불과했던 '가슴'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배고프고 수술 부위 통증이 가시지 않았는데 간호사가 해수에게 자꾸 아기를 안깁니다. 아이는 태어나기만 하면 알아서 젖을 빨 거라는 건 매우 큰 착각…  아기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자꾸 목표물을 놓치고 칭얼댑니다. 세 시간에 한 번씩 수유하는 것도 힘들지만 잘 못한다고 매번 혼나는 게 해수에게는 더 힘듭니다.


공부 잘하고 일도 잘하고 사회성도 괜찮아 칭찬 속에서 살았던 지난 34년간의 삶은 아이의 탄생으로 완전히 리셋이 되었습니다. 무지와 무경험으로 인해 매 순간 헤매고 매 순간 무너집니다.




산부인과의 늦은 밤.

종일 진통제를 맞으며 3시간마다 수유를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에도 머리만 대면 자던 해수는 옆방에서 나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이 깹니다.

“아이씨… 왜 이렇게 울어대. 애 좀 재우라고!”


신경질이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방에서 들립니다. 낮에 보니 해수처럼 수술을 했는지 복도에서 링거 거치대를 밀며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산모의 방입니다. 얼굴은 피곤과 통증으로 찌들어 있는데 아기를 보러 잔뜩 몰려온 시댁 어른들 틈에서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시는 어른들을 배웅하려고 거치대를 누르며 일어나는 그 산모의 엉덩이 쪽이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해수는 그 순간 침대 아래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민석을 바라봅니다. 누우면 5초 이내로 잠드는 사람인데… 한밤 중에 아이가 수유를 하러 오거나 해수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 깨우면 군소리 한마디 없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는 민석이 이 순간 더욱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산부인과에서 멘붕이었던 일주일을 보내고 예약해두었던 조리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아기는 분명 나왔는데 아직 그대로인 남산만한 배에 수술 부위가 아직도 욱신거리지만 해수는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이제 조리만 잘하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일주일 만에 머리를 감고 깨끗한 산모복으로 갈아입은 후 넓은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조리원에서는 아기는 주로 신생실에 있고 수유할 때만 만납니다. 아직까지 존재 자체가 낯설고 모든 게 신기하지만 종일 자다가 이따금 큰 눈을 굴리며 해수를 쳐다보는 쑥쑥이가 귀엽기도 합니다.


조리원에 들어와 첫 식사 시간.


식당으로 가니 같은 옷을 입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여자들이 30명 정도 모여있습니다. 다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고 있습니다. 몇 명은 흰머리가 너무 많아서 방금 아이 낳은 산모가 맞나 싶습니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서있는 해수를 조리원 실장님이 한 테이블로 안내합니다. 해수까지 총 4명의 산모는 같은 날 조리원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그날부터 내내 같이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매끼를 같이 먹고 수유도 같이 하고 마사지도 같이 받다 보니 처음 만났지만 출산이라는 강한 동질감으로 금세 10년 지기 친구처럼 가까워집니다.




“임신하고 나서 아버님이 나한테 소나타를 사주셨는데, 아들을 낳으니 남편한테는 벤츠를 사주더라고…”

현정은 이번에 첫아들 ‘꿀’을 낳았습니다. 해수보다 한 살 어린 현정은 구청 공무원으로 8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소개로 만난 부잣집 외동아들인 남편은 철이 좀 없긴 하지만 크게 모난 점이 없고 부유한 시댁의 지원으로 30평대 새 아파트에서 여유 있는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들~ 아들~' 노래를 부르던 시아버지가 꿀이를 낳자마자 남편에게 신형 벤트를 뽑아주셨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귀한 첫 손주가 눈에 밟혀 매일 조리원을 들락 거리시다가 결국 아이와 현정에서 독감을 옮겨 둘을 5일 동안 방에서만 생활해야 했습니다.


"전 남친들이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시시해서 찼는데… 결국 제일 나쁜 놈이랑 결혼했지 뭐야…”

막 까놓은 알밤처럼 생긴 4살 연하와 결혼한 희수는 ‘햇님맘’입니다. 해수와 동갑으로 꽤 괜찮은 회사에 다니다 마성의 매력을 가진 남편에게 빠져 미친 연애 중 아이가 생겨 바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미혼일 때와 똑같은 일상을 유지하는 남편은 지금껏 음식물 쓰레기 한번 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조리원에 드나드는 남편들 중에 미모가 가장 돋보였지만 해수에게는 자기만큼 후줄근해진 민석이 훨씬 더 잘생겨 보였습니다.


“셋째가 딸이기만 한다면 하나 더 낳고 싶은데…”

뽀싸시한 아기 피부에 생머리를 휘날리며 조리원을 누비는 미소는 이제 27살입니다. 43세에 첫 아이를 낳은 조리원 왕언니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어 다니고 분유를 얼마나 탔는지 눈금이 잘 안 보여 돋보기를 쓰고 있는데... 27세에 둘째 아들 ‘사랑’ 이를 출산한 미소는 조금 부어있을 뿐 벌써 조리가 다 된 거 같습니다. 미소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본 은행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후에는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면접에서 곧 결혼할 거라고 하자 임원진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고 앞으로 회사를 다니긴 글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까지 낳은 미소는 나이는 어리지만 동기들 사이에서는 육아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선배맘입니다. 해수의 딸 '쑥쑥이'를 볼 때마다 딸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며 부러워합니다.





“우리 쑥쑥이~ 쉬했네~ 아빠가 기저귀 갈아줄게~”


아이는 해수가 낳았는데... 똑같이 얼굴이 푸석해진 민석의 표정만큼은 세상 행복합니다. 아빠가 된 지 2주밖에 안됐지만 산도적 같은 두툼한 손으로 기저귀도 제법 잘 갈고 우유도 잘 먹입니다. 둘이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면 지금 이 고생이 꽤 할만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여전히 꺼지지 않는 불룩한 배와 깜박하고 패드를 넣지 않으면 순식간에 다 젖어 버리는 가슴을 볼 때마다 이 상태로 일을 다시 할 수 있을지... 해수는 자신이 점점 없어집니다.


그렇게 2주.

안락하고 편안한 조리원 생활이 끝나고 민석, 해수, 쑥쑥이... 이 세 식구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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