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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Dec 17. 2021

임신이 정말 축복인가?

워킹맘을 디자인해드립니다 (3)


“전쌤! 5월에 웬 겨울 코트야?”



점심시간에 학교 캠퍼스에 만발한 벚꽃 사진을 찍으러 반 아이들과 나온 해수가 한겨울 코트 차림인 건 본 연구 부장님이 말했습니다. 분명 햇살이 따뜻하고 다른 사람들은 긴팔 하나 정도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왜 이리 으슬으슬한지... 해수는 코트 깃을 다시 여밉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교무실로 돌아와 2주 뒤에 갈 중국 수학여행을 일정을 살펴봅니다. 자금성에 만리장성, 소주와 항주까지 도는 대장정입니다. 다음 주 방과 후 수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온몸이 노곤해지더니 하품이 나옵니다. 수업 준비는 내일로 미루고 여교사 휴게실로 올라가 한숨 청합니다.



해수는 퇴근 후 장을 보려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마트로 향합니다. 제철 과일과 맛있는 과자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카트에 양껏 담고 정육 코너로 가니 제주산 오겹살이 세일 중입니다. 주말에 엄마 집에서 가져온 겉절이와 같이 먹으며 맛있겠다 싶어 한팩을 집어 듭니다. 소고기도 살까 하고 살펴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립니다. 요새 부쩍 바지들이 꽉 끼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신혼이라고 민석과 매일 밤 술 한잔에 맛난 안주를 먹은 탓인 거 같습니다. 벌써부터 아줌마가 되면 안 되는데… 관리가 시급합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줄넘기를 들고 아파트 놀이터로 가서 30분 동안 열심히 뜀박질을 합니다. 홀로 줄넘기를 한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효과는 아직 없는 것 같아 해수는 더욱 힘차게 줄을 돌려봅니다.



“너 임신한 거 아니야?”


퇴근 후 찾은 친정집에서 생리를 안 한 지 2주가 넘었다는 말에 엄마가 해수에게 물어봅니다. 워낙 불규칙한 편이라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에이… 설마...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럴리가 없지만 다음 주면 중국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전 처음으로 동네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샀습니다. 사용법을 몰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설명서대로 겨우 해내고 변기에 앉아 잠시 기다립니다.

테스트기에 나타난 선명한 두 줄… 오 마이 갓!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언제 임신이 된 거지? 어제도 술 마셨는데…  줄넘기도 안되지 않나?... 아! 중국 수학여행! 자금성을 몇 시간 동안 걸어 다녀야 하는데… 괜찮을까?


관심조차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선명한 두 줄과 함께 열렸습니다.




금요일 밤. 해수와 민석은 손을 잡고 삼청동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이미 결혼한 사이지만 워낙 연애 기간이 짧아 결혼 후에 더 많이 데이트를 즐기려는 두 사람입니다. 보통 떡볶이, 김치말이 국수, 곱창구이와 함께지만 오늘은 해수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가자고 했습니다.

주문을 마치고 불금이라 신난 민석에게 해수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하나 건냅니다. 주로 검은색에 중간중간 흰색이 섞여 있는 요상한 사진을 받아든 민석은 어리둥절합니다. 해수는 손가락으로 사진 중간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오빠… 거기 중간에 까만 콩알 같은 거 있지? 그게 우리 아기래…”


일시정지된 듯 멍해진 민석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입니다. 예상 밖의 리액션에 당황한 해수는 민석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립니다. 민석의 눈에는 곧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한가득 고여있습니다.


“행복해?”

“응… 고마워”

“난 걱정되는 게 많은데… 내가 이상한 건가?”

“다 괜찮을 거야. 우리 같이 해내자!”


해수의 손을 꼭 잡은 민석의 손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합니다.




"하서방~ 해수 먹는 것 좀 봐~ 임신 초기면 밥에서도 냄새가 나서 잘 못 먹는데... 앉은자리에서 겉절이 한통을 다 먹네..."

"엄만 왜 먹는 거 가지고 그래? 맛만 좋구먼..."


드라마에서 보면 임신 초기에 입덧 때문에 계속 헛구역질에 밥도 잘 못 먹던데... 이상하게 모든 음식이 맛있습니다. 출산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초기에 입덧하느라 내내 누워있었거나 5kg 이상 빠져서 아가씨 때보다 더 날씬해졌다는데... 해수는 초기부터 무럭무럭 찌고 있습니다.


"아! 아까 낮에 학교에서 양치하다가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면서 세면대에 완전 토한 거 있지... 쉬는 시간 전에 그거 치우느라;; "

밥을 남김없이 다 먹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흰 우유를 꺼내 벌꺽벌꺽 마십니다.


"자기 요새 우유 많이 마시네? 우유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냥... 맛있어서... 우유는 아기한테도 좋지 않을까?"



  

“크크크… 해수쌤! 아까 샘반 반장이 나한테 뭐하고 했는지 알아?”

학교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지리과 최솔미 샘이 해수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반장이 질문하러 왔다가 조심스럽게 ‘우리 담임샘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나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살이 너무 찌셔서요…’라고 하는 거 있지? 크크크… 그래서 내가 ‘아니~ 너네 샘 임신하셔서 살찌는 거야’라고 했더니 ‘아!… 휴… 다행이네요!’ 하는 거 있지~ 크크크”


임신 5개월. 아직까진 아주 친한 동료들에게만 말했는데… 벌써부터 외모적인 변화가 뚜렷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겠다 싶습니다. 조만간 아이들에게도 알리고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조금씩 공개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 교내 인트라넷을 열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윤정샘~ 저 전해수입니다. 내일 괜찮으시면 저랑 점심 드실래요?'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해수의 가슴이 콩닥거립니다. 윤정샘은 다섯 번째 아이를 갖기 위해 난임센터를 다니는 중입니다.




입덧도 없이 삼시 세끼 꼬박꼬박 잘 먹은 탓에 임신 6개월 인대도 신체적인 변화가 너무 뚜렷합니다. 임신 사실을 알기 전부터 조금씩 불은 체중은 벌써 +12kg. 가지고 있는 옷들이 이미 안 맞고 임부복 위주로 옷을 구입하고 있습니다.


“초반부터 이렇게 체중이 불면 말기에 임신 중독증이나 당뇨가 올 수 있습니다. 체중 조절하셔야 해요.”

병원에 갈 때마다 몸무게를 확인한 담당 의사 선생님에게 혼이 납니다. 하지만 임신 중인데 단백질 위주로 먹거나 러닝머신 위에서 뛸 수도 없고... 불어나는 체중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설탕 많이 들어간 거랑... 우유도 많이 드시지 마세요~"

"우유요? 칼슘이 많아서 좋을 줄 알고 일부러 많이 먹었는데;"

"아이들에게는 좋지만 다 큰 성인에게는 지방이 많이 들어있어서 안드시는게 좋습니다."

매일 모르는걸 알게되는 해수입니다.



살이 찌면서 손과 발도 붓기 시작했습니다. 결혼반지는 이미 서랍 속에 있고 운동화도 꽉껴서 한치수 큰 걸로 구입했습니다. 나오는 배만큼 허리가 아프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습니다.

신체적 변화와 함께 그렇게 바쁘고 준비가 철저했던 해수는 게으름쟁이가 됩니다. 수업 준비 시간은 반으로 줄었고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이나 새로운 수업 방식을 기획하는 일들이 점점 버거워집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엄지손가락에서 팔목까지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습니다. 임신으로 호르몬 변화가 심해서 손가락 주변에 통증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신 중이라 특별히 약을 처방할 수 없다며 온찜질을 권합니다. 열일하던 해수는 이젠 자판을 치기도 힘들어 수업용 프린트 하나 만드는 것도 버겁습니다.


몸뿐만 아니라 해수의 감정도 널을 뜁니다. 민석과 새로 시작한 드라마를 보다가 아이가 죽는 장면에 갑자기 오열하기도 하고 아이와 엄마가 헤어지는 장면에 눈물 콧물을 쏟느라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보지고 못합니다. 여러 번 놀랐던 민석은 이젠 해수와 같이 있을 때는 드라마가 조금만 슬퍼지려고 하면 재빨리 예능으로 채널로 돌립니다.  



8개월이 넘어갈 무렵 해수는 이미 20kg이 쪘습니다. 일반 임부복도 맞지 않아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이즈를 고릅니다. 불어나는 엄마처럼 배 속 아가도 쑥쑥 자라납니다. 늘 평균 체중 이상에 태동도 엄청납니다. 병원에서 ‘분홍색 옷을 준비하세요’라고 했는데… 나올 때까지 딸인지 확신이 안 섭니다.

늘어나는 체중만큼 허리와 다리의 통증이 심해집니다. 집에서 주로 누워있는 해수의 배를 어루만지며 민석이 태교 동화를 읽어주면 배 한쪽이 뽈록 튀어나옵니다. 튀어나온 부분을 톡톡 두드리며 “엄마 아프니깐 발 집어넣어~” 하면 쏙 집어넣은 착한 아가입니다.




출산 예정일은 1월 말.


그날이 다가올수록 해수는 첫 아가를 만날 기대감보다는 그 후에 일들이 너무나 걱정됩니다. 임신 중에 몸과 감정의 변화를 겪으며 그제야 아기 엄마인 동료들의 삶이 자세히 보입니다. 늘 주변에 있었지만 해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거였습니다.


"그래도 배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한 거야~"

수없이 들은 이 말이 이제는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임신 선배인 친구들의 조언대로 임신 중기에 동네 조리원과 산후 도우미 아주머니를 미리 예약했습니다. 하지만 도우미 아주머니의 조리가 끝난 후에 어떻게 아기를 돌봐야 할지... 육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늘 계획적이고 논리적이었던 해수의 머릿속이 깜깜하기만 합니다.


우선 육아휴직을 생각해보지만 이 역시 걱정이 앞섭니다. 결혼 전에 주변의 많은 여자 선생님들이 휴직을 입에 담지도 못하는 걸보고 왜 말을 못 할까...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용기를 내서 교감선생님에게 업무용 메신저로 휴직에 대해 물어봅니다. 잠시 뒤 내선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선생. 나 교감인데요. 우리 학교는 유아휴직 없으니 그렇게 알고 준비하세요.”



짧고 강한 한마디. 해수는 한마디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이 터집니다.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육아휴직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슬펐다기보다는 단호한 상사의 말에 한마디도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임신은 축복이라는데... 생명 탄생을 앞두고 행복과 기대보다는 눈치를 보며 울고 있는 거지 같은 현실이 싫었습니다.

그제서야 해수는 정처 없이 학교를 돌아다니며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민폐만 한가득 끼치고 칼같이 퇴근하는 동료 여자샘들의 모습이 곧 나의 미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엄청나게 불어버린 몸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으며 내 삶 전체가 망가질 것이라는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요. 지금까지 어느 정도 세상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해수의 앞에 열리지 않은 문 수십 개가 놓여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문 하나를 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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