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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ylvia Dec 07. 2021

결혼으로 달라진 세 친구

워킹맘을 디자인해드립니다 (2)


수정아~ 나 거의 다 와가. 105동 402호라고 했지?”



하늘이 너무나 맑고 높은 가을날 오후.

중간고사 기간이라 일찍 퇴근한 해수는 화곡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 차를 주차합니다. 오랫동안 얼굴 보기 힘들었던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수정이 집에 들르려고요.


수정이는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절친입니다. 똑 부러지고 거침없는 성격이라 해수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수정이를 찾았고 특히 연애 쪽으론 이보다 더 좋은 상담사가 없었습니다. 항상 주어진 일에 열심히였던 수정이는 명문대 경영학과를 들어가 모범이 되는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점이 좋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고 각종 공모전에도 입상했습니다. 공부뿐만 연애도 잘해서 20살부터 솔로 인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수정이는 혼자 독학으로 중국어 공인 점수에 만점에 가까운 토익 점수도 받아 글로벌 기업에 한 번에 입사했습니다. 고수익의 커리어 우먼으로 5년쯤 멋지게 살다가 30살 가을, 입사 동기인 남자 친구와 재작년에 결혼했습니다.


“아… 난데~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가려고~”

“정말? 나… 떡볶이랑… 투게더! 투게더 한 통 사와!”

해수는 단지 앞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와 순대, 김밥까지 주문합니다. 그리고 단지 내 슈퍼에서 투게더도 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갑니다.

벨을 누르려고 하니 벨 위에 커다랗게 ‘아기가 자고 있어요. 벨 누르지 말고 노크해주세요’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니 잠시 뒤 문이 빼꼼히 열리며 수정이 얼굴을 내밉니다.


너무나 오랜만에 방문한 수정이의 집 거실은 아기 용품으로 가득합니다.

화이트톤으로 인테리어 한 신혼집은 이젠 총천연색으로 알록달록 화려하기만 합니다. 바닥은 거실부터 부엌까지 놀이 매트가 점령했습니다. 해수가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었던 거실에 유리 탁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고 있는 동안 둘이서 식탁에 앉아 사온 분식을 먹었습니다. 해수는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으며 지난주에 소개팅했었던 무개념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떡볶이에 코를 박고 먹느라 정신이 없는 수정은 듣는 중 마는 둥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이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옵니다.


“휴… 깬 줄 알았네… 근데 그 남자가 헤어질 때 뭐라고 했다고…”

아무 소리도 안 났었는데... 음식을 먹는 동안 수정이는 세 번 아이가 있는 방문을 열었습니다. 지난 15년간 한 번도 지루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절친과의 대화가 자꾸 삐그덕 댑니다.


“너 퇴사한 거 좀 아깝지 않아? 일은 언제 다시 할 거야?”

“난 세빈이 세 돌까지는 집에 있을 거야. 생후 36개월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한다잖아.

우리 신랑이 육아에 도움이 별로 안돼서… 그다음은… 그때 가서 차차 생각해보지 뭐…”


너무나 확고한 수정이의 태도에 더 이상 묻지를 못하고 투게터 뚜껑을 엽니다.




토요일 늦은 오후.

지난주 즉흥적으로 부산 국제 영화제에 갔었던 동아리 선후배들과 뒤풀이를 하기 위해 신사역으로 향하고 있는 해수의 휴대폰이 울립니다.


“아… 전… 해수 씨? 안녕하세요? 전 하민석이라고 하는데요. 연락처 받고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어떠세요?”

‘하민석? 누구지…?’

갑자기 한 달전쯤 엄마가 선 볼 남자가 연락할 거라고 한 말이 떠오릅니다.

부자연스러운 만남에 이골이 난 해수는 엄마가 뒤통수에 읊어대는 남자의 프로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반갑지 않은 전화지만 친한 사람들과 신나는 시간을 가질 생각에 평소보다 격양된 해수는 지하철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경쾌하게 답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네 토요일에 괜찮아요~ 장소 정해서 문자 주세요.”



약속 장소로 가니 이미 판이 거하게 벌어져 있습니다.

영화제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부터 10여 년 전 대학교 때 레전드 굴욕 이야기까지… 술술 들어가는 술처럼 이야기도 술술 이어집니다.

취해서 얼굴이 발그랗게 달아오른 6살 어린 후배 유라가 해수의 팔짱을 끼며 말합니다.

“전 언니가 진~~ 짜 좋아요! 언니가 진~~ 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어!”

“야~ 결혼하면 뭐가 좋냐? 나도 남자지만… 우리 와이프 보면 결혼하면 여자가 너무 손해야. 너희는 최대한 늦게 해라~ 안 해도 좋고!”

근처에 있다가 들른 결혼한 남자 선배가 진지하게 충고합니다.




일주일 뒤 토요일.


오전에 학교에서 큰 행사를 치른 해수는 퇴근 후 바로 가로수길로 향합니다. 약속 장소에 10분 먼저 도착해 남자를 기다려보지만 30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수는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이미 100여 번의 소개팅을 통해 기대도... 실망도... 어떤 감정도 없으니까요.


30세가 넘어 소개로 만난 남자들의 스펙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 어차피 한번 만나고 안 볼 건데 자세히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만난 남자들은 뭐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지… 수많은 후보들 중에 한 명을 만나러 나왔다는 태도로 자신의 잘난 스토리를 뽑아냅니다.

그런 열정 없는 상대방의 눈빛도 짜증 나지만 조신하고 내조를 잘할 것 같은 훌륭한 신붓감으로 보이려도 애쓰는 스스로의 모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끝으로 이젠 진짜 그만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그때 울린 전화벨.

“아… 헥헥… 저 지금 도착했는데요. 주차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헥헥… 어디세요?”



그의 음성이 휴대폰에서 들리는 것 치고는 너무 크게 바로 옆에서 들립니다.

세미 정장 차림에 얼마나 뛰었는지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를 한 덩치 좋은 남자가 해수의 10미터 옆에서 헐떡이고 있습니다.

약속시간에도 늦고 스타일도 별로였지만 그런 그 모습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둘은 한 퓨전 레스토랑에 앉아 두세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이라는 생각에 해수는 조신함은 던져버리고 쉬지 않고 떠듭니다. 혼자 웃었다 화냈다… 원맨쇼가 따로 없습니다. 앞에 앉아있는 민석은 그런 해수를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해수와 민석은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반년 만에 둘이 한 집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걸….




“나… 결혼할까 하는데…”

“...... 결혼? 누구랑? 만나는 사람 있었어??”


한남동 한 브런치 가게에서 해수 앞에 앉아 파니니를 한입 베어 물은 보라의 눈이 왕방울만 해집니다.

보라는 수정과 함께 해수의 고등학교 때부터의 절친으로 산부인과 전공의 2년 차입니다. 원래 명문대 생명공학과에 입학했다가 졸업 후 의학전문 대학원에 진학해 조금 늦게 의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수정이 결혼하기 전에는 셋이 자주 만나 맛집도 가고 쇼핑도 했었는데... 이젠 해수와 보라 단둘이만 가끔씩 주말에 만나 브런치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어디서 이런 애들만 나오는 건가 싶은 소개팅 남들의 뒷담화가 해수와 보라의 주된 주제였습니다. 둘 다 겉보기엔 남부럽지 않은 알파걸이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전통적인 결혼 시장에선 하양세라는걸 점점 더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일과 사람들과의 모임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빛나는 그들이었지만 결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습니다.


둘 다 결혼 못하면 같이 실버타운에 가자고 약속한 해수의 결혼 발표에 보라는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결혼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형식적인 절차대로 하자면 준비할게 끝도 없는 게 결혼이지만 생략하고 간소화하니 또 그렇게까지 복잡할 게 없었습니다. 집은 민석이 혼자 살고 있는 아파트 전셋집에서 우선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결혼을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민석이 일 년 전 모든 가전제품을 바꾼 덕분에 해수는 몸만 들어가면 됐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결혼식장을 알아봤습니다.


이미 몇 달간은 예약이 다 차있을 거 같았지만 생각보다 군데군데 빈 시간이 있어 쉽게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식장을 잡고 나니 예전에 결혼 준비를 하던 수정이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사촌 언니가 예식장에서 일하는데, 예식장 잡고도 파혼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시간이 별로 없어도 충분히 예약할 수 있데.”



결혼식 전날.


신행 가방을 마저 싸면서 해수는 늦게까지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겠다는 민석에게 톡을 보냅니다.

‘우리…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잘 살 수 있겠지?’

‘응! 우린 잘 살 거야!’

빠르게 진행되는 결혼 준비 중에 한 번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던 해수지만 민석의 단호한 대답에 마음속 작은 불안마저 사라집니다.


그렇게 만난지 6개월 만에

이번 생에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그 어려운 결혼을 33세 해수와 36세 민석은 해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아기천사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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