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을 디자인해드립니다 (1)
"전쌤~~ 오늘 아침 회의 때 중요한 이야기 있었어요?"
아침 조회 1분 전.
교무실 문 앞에서 마주친 오민지 샘이 다급하게 묻습니다.
파마기가 다 풀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입니다.
"아뇨… 특별한 건 없었고… 방과 후 수업 신청서만 오늘까지 연구부에 내달래요.”
“아! 방과 후 신청서… 아직 안 줬는데… 아이씨… 알았어요~ 고마워요!”
오늘은 1교시 수업이 없는 여유로운 날.
교무실로 돌아온 전해수 샘은 출근길에 사 온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회의록을 다시 한번 살펴봅니다. 책상 위에 놓인 달력에 적힌 오늘 해야 할 일을 훑어보고 다음 주 수업용 ppt를 점검합니다. 정규 수업용 프린트와 방과 후 수업용 프린트, 그리고 수업에 할 역할놀이 카드판을 프린트물 전용 서랍에 가지런히 넣어둡니다.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스케줄러를 꺼내 주말에 할 일도 체크해 봅니다. 토요일 저녁에 역삼동에서 하우스 파티, 일요일 점심에 홍대에서 소개팅 하나. 친구가 소개팅이 잘 안되면 일찍 헤어지고 자기 동호회 뒤풀이에 오라고 한 것이 생각납니다.
‘까똑!’ 예뻐하는 대학교 동아리 후배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언니! 다음 달 동문회 MT 때 게임은 어떤 걸 준비해야 해요? 회장님이 언니랑 상의해서 준비하래요~’
'그날 생일파티도 있으니까 케이크는 동문회비로 내가 사갈게. 넌 이거 보고 게임 준비물 챙겨 와~'
휴대폰 사진첩에서 작년 MT 사진을 몇 개 보냅니다.
그때 오민지 쌤이 전화를 받으며 교무실로 들어옵니다.
‘아… 네… 그래요? 아…. 제가 잠깐 갈게요~ 네네
저기... 해수 샘… 나 잠깐 우리 애 어린이집에 좀 갔다 올게요~ 나 3교시까지 수업 없어… 혹시 교감 선생님이 찾으면 나한테 전화 좀 해줘요~.”
같은 교무실에서 일하는 오샘.
항상 바쁘고 정신없고… 학교 전용 실내화를 신고 퇴근했다가 다음날 그대로 출근하고요. 출근하고도 일이 생기면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어린이집에 뛰어갑니다. 자주 있는 일이라 다들 그러려니 합니다.
다만 오샘이 두 아들에 이어 셋째까지 제왕절개로 낳으러 가기 직전 나지막이 했던 말은 아직까지 해수 샘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나… 죽지는 않겠지… "
해수 샘은 수업 자료를 프린트하기 위해 복사실로 향합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가면서 지난주 칵테일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톡을 합니다. 톡을 주고받으며 복사실로 들어가니 시끄럽게 돌아가는 복사기 옆에 볼록한 배를 받치고 걸상에 걸터앉은 선희영 샘이 보입니다. 해수 샘과 동갑으로 작년에 키 크고 스펙도 좋은 연하 남친과 결혼해 첫 아이를 임신 중입니다. 복사기를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는 희영 샘의 얼굴이 누렇게 떠있습니다.
“썬~~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파?”
“어지러워서. 입덧할 시기는 지났는데… 이제 한층 올라가는 것도 너무 힘들어. 어제 야간 자율학습 감독하러 5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다가 계단에 주저앉아 울었지 뭐야.”
뭐 그렇게까지 힘들까 싶지만 울먹이는 희영 샘을 우선 토닥입니다. 희영 샘은 한때 강남에서 돈을 쓸어 담던 탑 수학 강사였지만 남자 친구 집에서 교사 며느리를 원하셔서 학교에서 일한지 이제 2년 되었습니다. 교사가 되자마자 결혼해서 바로 임신까지 한 희영 샘이 해수 샘은 부럽습니다.
복사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오샘 자리에 절친 생물과 이채선 샘이 앉아 있습니다.
“해수쌤. 오쌤 어디 갔는지 알아요? 수업 없을텐데... 핸드폰도 책상 위에 있고…”
“아… 집에 잠깐… 곧 오실 거예요. 쌤 커피 안 드셨으면 한잔 드릴까요? 콜드 브루 있는데…”
“아… 커피?.... 아이고 해수 샘이 타주는 커피 마시고 싶은데… 마시면 안돼서…
사실 나 둘째 생겼어요. 그거 말하려고 온 건데 오쌤이 없네~”
임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난감한 해수 샘입니다.
“와... 아.... 쌤~ 축하해요!! 둘째는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아직 모르나?”
“16주는 돼야 알 수 있어요… 아직 8주밖에 안돼서… 아… 제발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 둘은 생각만 해도…. 아참! 윤정쌤한테는 말하지 말아요. 내가 상황 봐서 직접 말할 테니깐. 꼬오옥~"
신신당부하는 이샘의 부탁에 해수 샘은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샘뿐만 아니라 학교에 모든 임신한 여자 선생님들이 윤정샘에게는 절대 임신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늘 말하니까요.
“선생님! 여기 방과 후 신청서요. 근데 다음이 화학인데 교실인지 실험실인지 물어보러 갔는데 화학 쌤이 안 계셔요. 저희 어떻게 해요?” 늘 하이 텐션인 해수 샘 반 반장이 교무실 문을 빼꼼히 열고 묻습니다.
“어~ 이거 갖다 주면서 물어보고 알려줄게~”
해수 샘은 급하게 연구부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갑니다. 연구부 책상 위 바구니에 방과 후 신청서를 던져놓고 윤정 샘을 찾습니다.
“나윤정 샘 찾아요? 그게… 오늘부터 연차 내서 일주일 정도 출근 못 할 거예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어제 얼굴이 안 좋아 보이시긴 했는데…”
“아… 어젯밤 병원으로 실려가셔서 오늘 수술하신데요. 아이고… 연락을 해야 하나 나도 고민 중이야.”
오샘을 통해 윤정 샘이 네 번째 임신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을지 얼마 되지 않은 해수 샘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소식입니다.
2교시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니 오샘과 이샘이 한참 이야기 중입니다.
“내가 둘째 생겼다니깐 엄마가 출산하면 시터 구하라네. 둘을 도저히 못 봐준다고. 원래부터 허리가 안 좋으신데… 우리 준이가 워낙 에너지가 넘치잖아...
근데 어디서 시터를 구해? 구해도 애 둘이면 거의 200은 줘야 하지 않나? 김포까지 매일 출퇴근하는 기름값 빼면 남는 것도 없겠어."
“쌤~ 그래도 둘은 사람을 구할 수나 있지. 셋이면 시터 두 명 써야 해. 그래서 우리 애들은 백일 때부터 다 어린이집 갔잖아. 그래도 급할 때 도와줄 친정 엄마 계신 게 어디야.”
늘 반복되는 육아 이야기입니다.
매일 힘들다, 쉬고 싶다, 돈이 없다.. 이런 푸념을 늘어놓다가도 아이들이 동영상을 보여주며 너무 귀엽지 않냐며 깔깔대는 육아맘들을 해수 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삶인데 너무 투덜대기만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소개팅만 반복하는 해수 샘에게는 매일 죽겠다고 해도 남편에 아이들까지 있는 그들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합니다.
“나 3교시 있어. 이제 가야겠다~
아! 해수쌤~ 귀걸이 너무 예쁘다! 난 귀걸이 안 한 지 3년 됐더니 구멍이 없어졌지 뭐야. 하하~~
쌤은 이번 방학에 뭐해요? 겨울에는 호주 갔었다고 했나? “
“이번엔 기간이 길지 않아서 홍콩이랑 대만만 가려고요.”
“와… 부럽다… 혼자 강릉이라도 가고 싶네... 이제 하나 더 생겨서 완전 글렀지만… 지금을 즐겨요~”
교무실을 나서는 이샘을 보며 갑자기 결혼식 때 프랑스 공주 같은 드레스에 반짝이는 왕관까지 쓰고 엄청 행복해하던 이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고작 3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때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요.
여름 방학이 끝나고 첫 출근날.
아침 교직원 회의에서 교감선생님은 두 가지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윤정 샘의 휴직과 선희영 샘의 퇴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