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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Dec 12. 2024

재요 아빠, 진희 씨

계엄의 그늘은 반세기를 지나간다. 

광주항쟁이 있던 해니까, 내가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아빠는 지방에서 작은 철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직원도 서너 명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삼촌들은 공장일 외에도 하는 일들이 많았다. 아빠를 대신해서 유치원에 다니던 나를 데려다주는 일, 집 앞마당에 그네를 매어 주는 일, 고장 난 나의 자전거나 장난감을 고쳐주는 일, 엄마나 할머니가 시장에서 장을 보면, 짐을 실어다 나르는 일, 가끔은 쪼그만 나의 꾐에 빠져 구멍가게에서 주머니를 털리는 일 등등. 게다가 그 무렵에는 종업원들의 밥을 주인집에서 먹이는 것이 일상례 인지라, 삼촌들은 그야말로 우리 집의 가족이고 '식구'였다.  


삼촌들의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초반으로 엇비슷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아빠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군대에 갔다. 그리고 광주항쟁이 있던 해의 가을이던가, 그 이듬해이던가 군대에 간 삼촌이 휴가를 나왔다. 공장에서 볼 때는 늘 더벅머리에 꼬재재한 작업복 차림의 삼촌이었는데, 군대살이 올라서인지, 탄탄해진 몸에 군복을 입고 있으니, 꽤나 늠름해 보였다. 그리고 삼촌은 우리 가족들에게 군대에서 받은 훈장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였다. 나는 그 반짝반짝하고 별스럽게 생긴 쇳조각을 신기한 듯 만지작 거렸고, 삼촌은 그것을 내 유치원 가운 위에 채워주었다. 사실, 그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이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할 때에도,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삼촌만큼 자라서 다시,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할 때까지, 우리는 삼촌과 왕래를 했다. 


다만, 충격적인 것은 아무도 삼촌의 훈장이나, 삼촌이 어떻게 해서 훈장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아주 어릴 때 일이긴 하지만, 아빠가 삼촌이나 훈장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나쁜 말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엄마와 아빠 단 둘이만 있는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로 말이다. 나는 우리 아빠가 욕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 삼촌이 그렇게 심한 말을 들을 만큼 나쁜 짓을 했구나,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역 앞에서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아빠는 커다란 철가방을 들고 배달을 다녔다. 그 무렵의 아빠는 예전과 달리  언제나 성이 나 있는 모습이었고, 험한 말과 욕지거리를 아무렇게나 내뱉고 다녔다. 내가 보기에도 마치 약이 잔뜩 오른 싸움닭처럼 보였는데, 그래서일까. 동네 사람들 누구도 아빠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 무렵, 동네에 살던 오빠 하나가 데모를 하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공부를 퍽 잘해서 좋은 대학에 다닌다고 들었고, 우리 가게에도 들렀던 기억이 있다. 나는 공부에 도통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머쓱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오빠에게 나를 데려가 억지로 소개를 시켜주었던 기억이 난다. 이, 오빠가 아무개 대학에 다니는 오빠야. 너 아무개 대학이 얼마나 좋은 대학인 줄 아니, 너도 오빠처럼.... 아무튼 그랬다. 


그 오빠가 데모를 하다 죽은 건 사실이었다. 그가 최루탄을 맞고 친구의 부축을 받는 사진이 신문에 커다랗게 도배가 되었으니까. 그의 죽음과 함께 동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아빠의 마음에도 뭔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빠는 뭔가 서명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는데, 가게와 가족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이, 시비가 걸리는 사람만 있으면 온 동네가 요란하게 싸움을 걸던 아빠는 유독 그 일에 대해서만 가족과 가게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주 화요일, 2024년 12월 3일이었다. 


다 망해가는 가게도 장사는 해야 했다. 새벽장사를 해야 하는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한 잠이 깊게 들어 있었다. 그런 나를 아빠와 엄마가 흔들어 깨웠다. 안 그래도 나이가 들어 몸집이 작아진 두 양반이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부모로서 해줄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내일 당장 미얀마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 아니, 일단 태국으로 가서 비자를 받던지 해서 미얀마로 들어가. 시절 조용해지면 아빠가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잠자코 있어.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유튜브를 보고 계엄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까르륵 웃음이 터졌다. 아빠와 엄마는 누가 내 소리를 들을세라 조용히 하라며 쉿 하는 시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무슨 정치 거물도 아니고, 이름 있는 운동권 인사도 아닌데 무슨 유난을 저리 피우실까 싶었다. 


고작 해봤자, 나는. 환경운동단체에 근무한 적이 있으며, MB시절에 한강운하를 찬성하는 주민간담회에 가는 관광버스를 몸으로 막아서서 해당 동네 어른들로부터 몹쓸 욕을 들은 적이 있으며, 그게 고스란히 텔레비전 전파를 타는 바람에 엄마를 아연실색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과 다르게 가톨릭 신자인 관계로 세례와 견진 대부모가 계신데, 이 분들이 모두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셨던 분들이었다. 짐작건대 이 것이  엄마 아빠가 나에 대해 걱정하는 전부였다.   


계엄은 155시간 만에 끝이 났고, 그날 이후 세상은 말도 못 하게 하수상하기만하다. 


나의 망해가는 가게는 여의도에 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대표 여야의 당사가 양 옆으로 있는 한가운데 있다.  게다가 인집회장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걸 웃어야 지, 말아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계엄 특수(?)를 누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루에 이만 원도 팔리지 않던 우리 가게에도 예전보다는 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그리고 하루하루 계엄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나는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 진희 씨와 엄마가 가졌던 두려움이 조금씩 살갗에 닿는 기분이랄까. 


장사가 되지 않던 시기를 생각하면 그냥, 가게 문을 닫아버릴까, 싶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삼만원 매출이 늘어난 것에 희망을 걸고 나는 오늘도 가게를 열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인 돈푼이겠지만, 그 나마 벌어들이면 또 하루가 어제 보다 낫고, 또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란 희망이 생긴다. 우리가 사는 법이 그것이고, 먹고 사는 것의 무게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인생에 커다란 횡재가 떨어지지 않는한, 비슷한 희망을 품고 산다. 지나고 보면, 우리 아빠는 겁많고 소심해서 변명을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에 '순응'을 택한 뿐이었다. 


계엄이 무슨 대수겠는가? 문제는 그다음이지. 한 국가의 권력이 독재자 한 사람에게 국한되어 있을 때의 상황이 얼마나 국민을 무기력하고 냉담하게 만드는지를. 아직도 많은 국민이 그가 술김에 저지른 일이 아닐까, 의심하는 가운데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늠해보며 나는  몸서리를 치곤한다. 


그리고 씨알만큼이라도 뭔가를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있는 사람한테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얼마만큼 한 무게와 시련을 감당해야 하는 일인지. 나는 내 나이만큼, 우리 아빠, 진희 씨를 통해 보아 온 셈이다.  


세상이 좋아져서일까, 아니면 국민이 그만큼 지혜로워져서일까? 해가지고, 일이 끝나면 평일인 오늘도 많은 시민들이 국회 앞 대로변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 아빠, 엄마 시대에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조용히 입으로만 삼킬 수밖에 없던 목소리, 동네에서 대적할 사람이 없을 만큼 사납고 드센 사람도 입을 닫게 만들던 그 무거운 소리와 마음을 펼쳐내고 있다. 


나는 묻고 싶다. 

시민들의 외침이 그저 가볍게 소리로 느껴지는 그들. 

시민들이 짊어진 삶을 걸고 내 뱉는 소리의 무게감을 모르는 그들. 

대체 당신들은 얼마나 가벼운 사람들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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