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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ul 09. 2020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사람

  



살면서 몇 천 명의 사람들을 만났을까? 몇 만 명?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이 아까운 사람도 있다.

오늘은 후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아래의 유형에는 나의 모습 중 일부도 군데군데 섞여 있다(고쳐야 하는데 쉽지 않다)  글을 쓰며 다시 한번 되돌아보려고 한다.



'모든 관계에서' 늘 자신만 피해자인 사람


지난 수십 년 동안 삼삼오오 둘러앉아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만남을 이어갔다. 그중 유난히 한 모임의 구성원은 만날 때마다 자신이 직장이나 집안에서 당한 불합리한 대우에 울분을 토로한다. 듣고 있다 보면 같이 울컥할 정도로 빈틈없는 스토리다. 악당에 시달리는 약자, 꼭 현대판 콩쥐 팥쥐를 보는 듯하다.


근데 이상한 것은 이제까지 살면서 난 한 번도 자칭 팥쥐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본인이 팥쥐였다고 커밍 아웃하는 어르신을 본 적이 없고 또래의 사람들도 본 적 없다. 지금껏 만나온 콩쥐들은 많은데 그 콩쥐를 괴롭힌 팥쥐는 어디에도 없다. 세상엔 왜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을까? 가해자 없이 피해자가 생길 수 없을 텐데 참 이상한 일이다.

확률적으로도 이런 분포는 불가능하다. 분명 가해자와 피해자는 맞물려 있어야 하는데 세상엔 온통 피해자뿐이다.


회사면 회사, 집이면 집 어느 한 곳이라도 피해자가 아닌 곳이 있다면 이해할 텐데 그는 가는 곳마다 늘 피해자다. 이쯤 되면 '늘'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살짝 의심스러워진다. 뭔가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해석하는 건 아닌지 고쳐 보게 된다. 항상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조차 그 친구의 다음 약속 자리에선 가해자로 소환돼 마구 난도질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다.  자신의 경험 속 인물을 자주 소환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라 난 더 걱정스러웠다.


그런 두려움은 애써 넘길 수 있다 치자. 사실 더 힘들게 하는 것은 그런 피해자 구조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20여 년이 넘게 흘러가니 이젠 좀 지루하다. 그런 패턴의 드라마도 철수된 지 한참인데 말이다.  여주인공이 괴롭힘 당하는 스토리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이제 한번 시원하게 반란을 일으킬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세상은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다. 콩쥐들의 반란 스토리를 기대한다.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사람


살다 보면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한 뒤의 태도다.  상대방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지, 그 사후 처리는 어떻게 하는 지를 관찰해 봤으면 한다.  


귀찮아서 대충 미안하다는 말로 때우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또 잘못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쉽게 사과하고 쉽게 다시 잘못하는 패턴으로 상대를 지치게 하는 사람이다.


반면 끝까지 미안하단 말을 안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나 배경 상황을 끌고 와서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인 것처럼 상황을 각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는 게 낫다. 그는 어떤 잘못도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핑계를 끌고 와 상대방을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자신은 피해자로 꾸며댈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드라마 알함브라의 궁전에서 현빈의 대사 중 “미친놈도 미친놈의 논리가 있다 ‘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어떤 사건 앞에서도 자기 합리화를 잘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기에 너무나 숙련돼 있다. 자신이 지은 죄를 결과로 놓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과관계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이 엮어낼 수 있다. 그 어떤 죄라도 그에겐 인과관계를 엮는 게 가능하다.


이 유형은 점차 진화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으로까지 이르게 한다. 간혹 뉴스에서 악질범이 잡혀 가는 모습을 본다. 화면에 비친 악질범의 얼굴은 의외로 '억울한 듯’ 당당하다. 그 사건의 범인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가해자인데 정작 그의 얼굴에선 어떤 후회나 부끄러움도 읽을 수 없다.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한 경우도 꽤 있다. 이런 이들에게는 자신의 잘못이 정당한 인과관계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특이한 유형의 인간들을 뉴스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상대방의 원인제공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라고 믿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는 당신에게 큰 해를 끼치고도 당신을 원인제공자로 주목할 것이다.



공감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사람


"글쎄 말이야 그 000 씨가 오늘은 내가 인사하는데도 쌩 하고 지나가잖아. "

"에이 그건 아니지. 널  못 봤나 보지"

"아냐. 분명 눈은 마주쳤어. 더 짜증 나는 건 난 인사를 분명히 했거든. 근데 보고 무시한 거야."

" 음... 그건 네가 그전에 뭔가 기분 상하게 한 거 아닐까?"


분한 일을 당하고 친구한테 톡으로 털어놓았을 때,  친한 친구가 저렇게 말한다면? 내가 지금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 친구가 누구에게나 이런 태도라면 공감능력이 부족한 그 친구의 문제이니 그런가 보다 하면 된다. 차라리 일찌감치  그 친구한테 공감받는 건 어느 정도 체념할 수 있다.


문제는 선택적으로 공감능력이 발휘되는 경우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친구를 바라보면 늘 그런 것은 아니라면?  객관적인 상황판단력도 좋고 다른 친구와 이야기할 때 보면 무난한 공감능력 소유자인 것이 분명하다면? 그때는 피하고 싶다.


이경우, 그 친구는 나와  정서적 애착관계가 긴밀하게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나와 그 친구의 심장을 잇는 줄이 없는데 어떻게 같이 화나고 어떻게 같이 기뻐할 수 있을까?


이런 친구를 '절친으로 곁에 두는 것'은 상처 받을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친구에게 2차 내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나의 아픔에 무심'하고 '나의 기쁨에 무덤덤'한 친구와 일생의 희로애락을 어떻게 같이 나눌 수 있을까.



쉽게 추측, 판단, 단정 짓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


“아 전 커피 안 마셔요. 아침에 집에서 석 잔 마시고 나왔어요”

“아휴 엄청 건강 챙기는 스타일이구나. 그렇게 신경 쓰며 어떻게 살아? 몸에 나쁜 커피도 좀 먹어줘야 해”

‘............... 뭐지?’


난 분명 커피를 안 마시는 게 아니라 이미 집에서 마시고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대는 내가 건강을  신경 쓰느라 커피를 안 마시는 거라고 ‘단정’ 짓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불신과 섣부른 추측이 있다. 첫째 내가 집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최소한 확인조차 안 하고 내 말을 거짓말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둘째 이미 마셔서 커피를 안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가 몸에 안 좋아서 안 마신다고 내 행동의 원인을 자기 멋대로 단정 짓는다. 아침에 커피를 마셨다고 말하는 내 말에 대한 불신과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유에 대한 억측이 동시에 공존하다.


“피곤해서 이번 모임엔 못 나갈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 하나가 모임의 단톡 방에 떴다.

이 카톡 하나에도 여러 추측과 분석과 판단이  그 모임에서 뒤따라 나온다. (물론 당사자는 그날 불참한 상태다)

"요즘 갱년기라 그런가 봐. 혹시 무슨 큰 병 있는 건 아닐까?"

"그 집 아이가 이번 시험에서 성적이 많이 떨어졌나 봐. 그래서 우리를 만나기 싫은 것 같아."

" 아니야. 그 집 아들 요즘 연애하잖아. 그래서 그 엄마 앓아누웠을 거야."

명탐정 코난 저리 갈 정도의 추측이 이어진다.


피곤한 건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피곤할 수도 있지만 그저 그냥 몸이 피곤한 경우도 많다. 그런데 늘 결부시키고 원인을 추측하고 결론을 확장한다. 이런 상대방을 대하는 건 그야말로 피곤해진다.


일상에서 서로가 서로한테 추측과 분석의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은 피로감만 쌓이게 한다. 쓸데없이 상대의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추측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과 내 일상을 나누는 걸 삼가자. 이런 사람이 곁에 머물면 내 인생은 내 뜻과는 다르게 각색돼 있기 마련이다. 이 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중증이 되며 사람을 아주 피곤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담백하게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세상이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고 싶은 말은 꼭 다 하고야 마는 사람


꼰대가 되지 않는 법 중 하나가 내가 충고한다고 그 충고를 들을 거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급하게 찔린다. 이 글을 발행해야 하나? 고민도... 그냥 내 경험의 일부 모음이지 충고는 아니라고 포장 아닌 포장을:::)


명절만 되면 온 국민이 서로서로 덕담이 아닌 참견과 잔소리를 퍼붓는 나라에서 우리는 참 많이 시달리며 살아왔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이젠 내가 그런 모습을 닮아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득문득 잔소리를 하게 될 때 섬뜩 놀라게 된다. 그때 나를 저지시켜주는 생각의 뿌리는 “그들이 몰라서 그렇게 안 하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다 안다”는 사실 파악이다. 여전히 그 사실을 실행하기는 어렵긴 하지만 최소한 의식은 하고 생활한다.


주변에 입을 배설기관으로 알고 필터링 없이 그냥 말을 뱉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 멀리 피하는 게 낫다. 이런 사람은 도저히 제어가 되지 않으며 이런 사람과 같이 있다간 쓰레기통이 되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 잘못은커녕 기억조차 하지 못 하는 경우도 많다.


보통 말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한다. 반면 내키는 대로 말을 해버리는 사람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말하기 전 필터링하는 습관이 없다. 필터링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한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말을 하는 데 조심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전에 한말을 되짚으며 비난하려 한다면 포기하는 게 좋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난 기억도 안 나는데”하며 발을 뺄 것이 분명하다. 그 자리에서 짚어주지 않고는 지적은 포기하는 게 낫다.

 

또 하나, 어처구니없는 건 화가 날 때마다 마구 쏟아부어놓고 나서 ‘그래도 난 뒤끝은 없잖아’한다는 점.... 뒤끝? 이미 다 말하고도 무슨 뒤끝? 뒤끝은 말을 못 한 사람이 가슴에 남기는 게 아닌가? 그렇게 쏟아내고도 남길 뒤끝이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자신이 배설하듯 내뱉은 감정의 쓰레기들로 상대는 이미 불쾌한데 뒤끝이 없다니..... 뒤끝은 이제부터 그 쓰레기를 투여받은 상대의 몫이란 걸 알았으면 좋겠다.



타인을 비난하는 걸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


우리 인생엔 일정 역할이 있다. 특히 여자가 결혼을 하면 역할이 사거리 교차로처럼 겹쳐진다. 내 부모님의 딸, 시부모님의 며느리, 남편의 아내, 아이의 엄마, 아이 학교 학부모, 직장에서의 직책 이렇게 수많은 역할이 교차된다.


이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 서로 얽히지 않고 교통을  원활하게 흘러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급한 임무가 주어질 때는 며느리, 딸로서의 역할은 잠시 정차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께 위급한 일이 생기면 다른 역할은 잠시 대기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 역할의 우선순위를 정해 신호등 체계를 세우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다.


그런데 꼭 타인의 역할에 참견을 하며 관리, 감독, 지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 휘둘려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의 역할을 떠넘기고 무던히 돌아가는 일상을 누리며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


애초에 나를 위하는 사람은 나한테 무리한 일을 시키지도 않는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나의 힘듦에 무심한 사람이 나한테 무리한 요구를 한다.

나를 아끼지도 않고 내가 힘들어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의 말에 휘둘려서 나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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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나 까칠한 나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섣부르게 '판단'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

타인을 '비난'하는 이 글을 쓰고 있으며


상대방의 피해의식을 '공감'하지 못한 채

쓰고 싶은 글은 쓰고야 말겠다는 '고집'으로

이 글을 발행한 나 자신을 반성한다.




                                                                                                사진  2019년 7월 스위스 루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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