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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Jul 20. 2021

객관성의 칼날

대기 시간이 생겨서 커피숍에 들어가 앉았다. 십여분 뒤 커플이 들어와 내 옆에 자리 잡았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여성이 앉았고 그 여성의 맞은편에 남자 친구로 보이는 남성이 앉았다.   들어오면서부터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역시나  잘못하다가는 그들의 대화를 받아쓰기할 것 같다.  정신을 모으다 모으다 결국 귀에 침범한 한마디에 하던 일을 놔버렸다.


오빠는 뭘 입어도 멋지지만 이 옷 입으니 더 멋지다. 음.... 멋있어.

순간 '도대체 얼마나 멋지길래?' 하는 궁금증이 차 올랐다. 안 보는 척 곁눈질하던 성의조차 버리고 노골적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까 대충 성비만 구별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는 방향으로 내 눈빛을 쏘아대며 살펴봤다. 그 '감동적으로 멋진 오빠'의  모습을 눈에 담자마자  반사적으로 오빠 여동생(?)의 눈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 여성은 나하고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어서 고개를 더 돌려야 했다. 나의 이런 매너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향한 시선이 견고하게 고정돼  있어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그 기운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난 사랑하고 있어. 행복해'라는 기운. 게다가 그 여성을 바라보는 감동적인 오빠 눈에도 그 기운은 번져있었다. 그 후로도 그들이 서로에게 아낌없이 투척하는 찬양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밖으로 나온 뒤에도 사랑에 부풀어 들뜬 동생과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들의 표정과 분위기. 그 남성과 그 여성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객관적'으로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pixabay  Ahmad Ardity 님 사진>


밖에서 걷다가 얼마 전  남편 옷을 사러 갔을 때 생각이 났다. 남성복 매장에 들어서면 난 의자부터 찾아 앉는다(갑자기 다리가 막 아프다). 그리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방향으로 자세를 튼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잡지 편집장인 메릴 스트립이 패션쇼에 오를 옷을 입고 나오는 모델들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왼쪽 다리를 꼬아서 오른 다리에 올려놓고 등을 꼿꼿하게 편 채 남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잠시 후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고개만 까닥여 패스 or 페일을 정하곤 한다. 가끔은  미간을 찡그리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남편은 더 서둘러 다음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간다.

때로는 좀 더 정교하게 갈아놓은 칼날을 들이대기도 한다.

"으.. 그건 삼사십 대까지만 소화할 수 있는 스타일이야. 나이에 안 맞아."

내 고갯짓에 따라 다시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다 지친 남편에게 드물게 내려지는 기껏 좋은 신호란,

"응. 그건 좀 괜찮네.'라는 인색한 허용의 말이다.


이 경우 내 시선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마치 한 개의 잡티도 놓치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울 같다. 해상도높은 거울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지듯이, 탈의실을 오갈수록 남편의 얼굴도 어두워진다. 물론 이런 객관적 시선이 나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내 가족이 밖에 나가서 흠 잡히지 않기 바라는 마음일 게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좋은 평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삼자보다 먼저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눈금 있는 자를 들이대듯이 재고 잘라낸다.  타인이 지적하기 전에 미리 지적하며 고치고 덮는다.


사실 누구보다 오랫동안  객관적 시선의 시림에 시달려온 사람은 나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동자에는 타인의 눈동자가 심어있었다. 완벽주의자인 엄마는 늘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며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사람이 되도록 강요했다.

그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진정한 내가 된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작은 아이 방, 책장 사이 먼지를 닦다가 "객관성의 칼날"이란 책을 눈에 담고 멍하니 멈춰 섰다(이 글 제목은 그 책 제목에서 따 왔음을 밝힌다).  

2.3 년 전, 내가 골라 사 준 책인데도 새삼스레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찬바람이 휘 지나간다.

물론 과학 분야 책이라서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아닐 것이다. 책 제목에 감동받고도 절대 펼쳐보지 않는 나의 단호한 게으름 때문에 상상력만 늘어간다.


객관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통적으로 인식된 성질이다. 즉 다수의 타인이 보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가족의 태도나 말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가족 구성원의 언행이 타인의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게 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그런데 객관적 관찰 영역이 외모로까지 번지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꼭 '객관적'으로 멋있어 보여야 되는 건 아니니까. 타인에게 불쾌함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행동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해상도 높은 거울에 맞춰 덮고 가리며 엉거주춤한 모습보다 습기 찬 화장실 거울을 보며 미소 짓는 당당한 얼굴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뿐이다.


사랑은 여러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그 옷 중 하나는 '객관성의 상실'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을 향한 객관성을 내려놓는 것,

눈금이 촘촘한 자를 버리고, 해상도 높은 거울도 치우고

나만의 렌즈로 상대방의 모습을 담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얼굴의 잡티를 보여주는
 해상도 높은 거울이 아니라
영화 촬영장에 있는 반사판 인지도 모른다.


이제 외모에 있어서만큼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좀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객관적인 미의 기준에 벗어나도 주관적인 만족만으로도 얼굴에 행복과 사랑이 묻어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주관적 만족을 심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가족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을 내려놓은 채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한 두명만 돼도, 커피숍 커플처럼 행복과 사랑에 빛이 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 할머니들의 "아유~우리 예쁜 강아지"는 드라마 촬영장의 반사판만큼이나 우리를 빛나게 해주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견고한 애정의 시선이 쓸데없이 타인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우리를 잡아줄 것이다.


다른 면은 몰라도 외모에 있어서만큼은 가족에게 객관성의 칼날을 내려놓을까 한다.

피부색과 체형에 맞는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족스러운 표정과 당당한 태도니까. 

다음에 가족 옷을 사러 가면 그때는 이렇게 말하려고 한다.


그냥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해.

그 커피숍 커플 같은 눈빛을 '연출'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칼을 내려놓는 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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