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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May 13. 2020

밥 잘해주는 예쁜 아줌마

어느 날, 뜬금없이 시작한 일

 적군은 모두 잠들었다. 기습을 감행해 올 통로도 막혀 있다. 무장해제 상태로 책을 볼 수 있는 적막한 새벽 1시의 이 시간을 나는 즐기고 있다. 그런데 책이, 책 속의 글들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해 왔다.

책 속의 저자는 자신의 유학지였던 독일의 작센주를 언급하며 공동저자와 사고방식이 닮은 이유를 같은 지역에서 공부한 때문으로 당위에 저항하고, 편견에 질문하고, 다양성을 각별히 존중하며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열어두는 학문적 태도를 추켜세웠다.

눈물이 났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왜 그래? 그러지 마’ 달래 보아도, ‘이런 미친!’ 욕을 해대도, ‘너, 정말 대책 없다’ 무관심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고 더 뜨거워졌다.

나도 독일 유학을 가고 싶었거든. 독일어 공부도 했고 무슨 일을 할 건지도 정했고. 많은 사람과 학문적 교감을 나누며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말들을  공식적으로 하는.

그렇다면 지금쯤 나는 강연 준비를 하고 있거나 데드라인 앞에서 현학적 허세 가득한 글을 써대고 있을지도.

그러나 정작 지금의 나는. 많은 것이 변했고 많은 것을 포기했으며 많은 것을 참고 인내했다.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준엄한 사실이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불면의 밤이 늘어나고, 주책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고, 식구들을 볼모 삼아 불같이 화를 내고, 애꿎은 술로 핑계를 삼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같은 반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혹시 곰인형 눈알이라도 붙이겠다는 말, 아직도 유효해요? 정말 눈알이라도 붙일 각오도 돼 있고?”

언젠가 커피숍에서 같은 반 엄마들과 몇 번째 만나 수다를 떠는 와중에

“서서히 아이들로부터 저도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미숙하지만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있는데 꽤 재미가 있어요.”라며 쓸만한 정보도 알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조용히 연락해도 좋다고 씩씩하게 얘기했던 엄마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알바를 하고 있는지 몰랐고 좋은 일자리라면 소개해줄 리도 만무하단 생각에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곰인형 눈알이라도 붙이겠다”라고 건성건성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만나서 일의 전모를 들을 수 있었다. 구인 광고난에서나볼 수 있는 한눈에 쏙 들어옴직한 짧은 개요.

‘가정어린이집에서 아이들 아침 간식과 점심을 차려주는 일’.

이 일이 ‘개꿀 알바’ 임을 뒷받침하는 구성요소들도 있었다. 4대 보험이 된다는 점, 오전 3시간 근무라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는 점, 내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앞 동이라 교통비 등 잡비 지출이 없다는 점, 다른 교사와 하는 일이 달라 특별히 말 섞을 일이 없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다는 점... 등.

“게다가 언니, 자격증도 필요 없지, 특별한 능력 필요 없지, 이런 알바 구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못을 박은 이 말에 나는 멈칫했다. 조건 좋은 알바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소위 ‘그런 일’인 것이 문제였다.

그런 일... 능력 필요 없는 단순한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변별 없는 일, 손에 물 묻히는 일, 막일. 그런 일이란 그런 거잖아. 그렇게 저렇게 그냥 하는 일이잖아.

별 일 없다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해도 되는 일, 면접이랄 것도 없는, 그냥 내일쯤 원장 얼굴 한 번 보러 가면 되는 일, 일의 경중을 따지자면 당연 ‘경’인 일.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짜증이 났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었나 보지?. 이런 일이나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거잖아.

“글쎄다”

나는 결정을 미루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개 같이 벌어도 정승 같이 쓰면 된다’는 평소 소신 따위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개나 줘버리라지.

“언니, 그럼 일 못해.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나도 처음엔 그랬지만 별거 아니더라. 언니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시작이 중요한 거지. 일단 시작해 보면 다른 것들이 생각날 거야. 그럼 또 그걸 하면 되고. 일단 시작해 보셔.”

요런 요망한 것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하네.

적벽 앞에 선 제갈공명이 바람의 방향을 바꿨지, 아마.


 그렇게 ‘그런 일’은 시작이 되었고 벌써 9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억지로 시작된 일이지만 요즘은 꽤 보람을 느끼는 나의 일이 되었다.

“떤땡님, 땡떤 가시도 발라주시고 국도 마딨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혀 짧은 소리로 두 손 모아 인사하는 아이들도 있어 흐뭇하다. 1년에 1천만 원 모으기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9월부터는 자격증 따기도 시작해보려 한다.

‘나이 60에 젊었을 때의 꿈이었던 유학을 가보려 한다’는 어느 유명 강사처럼, 나도 60에는 뭔가를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일을 시작하길 잘했고 옛말대로 시작이 반이다.

그나저나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 아이들에게 얘기하지 못했다.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도 있는데 ‘밥 잘해주는 예쁜 아줌마’는 없겠니? 내가 그런 여자다, 이제는 얘기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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