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운 Feb 14. 2021

나박김치를 마시며 바다로...

엄마의 나박김치를 그리며 나박김치를 담그다

<엄마의 나박김치>
매화 핀 남쪽에는
입춘 지나 봄볕 따숩다.
파릇한 채소로
나박
       나박
나박김치 해놨는데,
오늘도 보고픈 마음
시뻘겋게 익어간다




    따뜻한 남쪽에는 벌써 매화가 피었다고 하신다.

 “입춘도 벌써 지나 봄빛이 그득하다.”


  마음은 봄처럼 따사롭고 설 앞두고 그리움은 간절한데, 오가며 만날 사람 없고 나들며 반갑게 손 맞잡을 이 없으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단다.

친정엄마와의 통화는 반가움과 외로움 사이를 오가며 널을 뛰고 있었다.

이번 명절에도 멀리 있는 오빠네와 우리 식구들이 못 내려간다 하니 부침개와 나물 등 명절 음식 일체를 안 하실 모양이었다.

 “네 언니가 설날 저녁에 음식 가져온다고 하니 그거 먹으면 된다, 걱정하지 말어. 그나마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해서 며칠 고생을 했더니 먹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없다.” 하신다.


 ‘우리 집 명절 음식은 정말 기가 막혔는데...’

전과 튀김은 가지 수만 8~9가지요, 오색나물에 갈비와 잡채는 기본이었다.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시던 녹두전은 돼지고기 기름이 번드르르하게 지져졌으며 오색찬란한 해파리냉채는 주안상의 꽃이었다.

떡국과 함께 넣을 만두는 한번 빚으면 기본이 200 개라, 집에 있는 상이 모두 동원되어야 했고 느끼한 명절 음식에 곁들일 산뜻한 나박김치는 김치통 가득 바다를 이루었었다.

그 모든 대소사를 선봉에서 진두지휘한 명장군이셨는데, 먹일 병사들이 없으니 주방 화덕에 불기운 마저 사라졌겠다 싶어 마음이 쓸쓸했다.


  빨갛게 물이 밴 나박김치 사발을 들고 쭉 들이키며

 “크아~ 시원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다 같이 먹을 음식인데 국물만 쏙 마시면 나머지는 누가 먹으라고... 참...”

엄마가 타박을 하셨었지.

그래서 항상 밥상에는 아버지 나박김치 사발이 앞에 따로 놓였었다. 아버지에게 나박김치는 속풀이 해장국 대신이었고 다른 식구들에게는 느끼한 명절 음식의 텁텁한 기름기를 잡아주는 청량음료였다.

나박김치가 그리웠다.


사방이 온통 바다, 노을 천지다!


 나박김치는 나박나박 썰어서 담근 김치라는 의미도 있지만 무를 일컫는 옛날 말이 '나복(羅蔔)'인 만큼 무를 넣어 담근 김치라는 뜻도 지니는데 설날 떡국상에는 꼭 올라갔던 음식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에서 '김칫국'은 '나박김치의 국물'을 뜻한다.*)


배추와 무는 나박나박 썰어 소금에 1시간 절여 두었다 씻어 물기를 빼고, 나머지 재료는 소금 설탕 고춧가루 푼 물에 퐁당퐁당!

 

< 나박김치 담그는 날>

     

소금 풀어 펼쳐놓은 바다에

빠알간 노을이 내려앉았다

이런 날은 서둘러 바다로 가야 하리

서로 만나 바다로, 바다로...    

 

나박나박 자른 무

슴덩슴덩 자른 배추

간 배어 노곤해진 얼굴로

풍덩풍덩 너른 바다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바다가 일렁인다, 물결이 인다     


청고추 홍고추

청사초롱 불 밝히고

얇게 저민 마늘 생강

심연의 바닷속 깨우면

해초 같은 쪽파 꽃 같은 당근

바닷속 생명의 기운 되살린다


명랑한 오이 순결한 양파

생명의 숲 풍성히 가꾸어낸다     

사방이 온통 바다, 노을 천지다


생명의 바다

붉은 바다를 마시며

이런 날은 바다로, 바다로...     




명절 연휴 전날, 우족과 스지, 사태살을 고아내며 한쪽에서 나박김치를 담갔다.

재료들을 나박나박 썰 때까지는 미처 몰랐으나 담가 놓고 보니 바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엄마의 나박김치가 찰방찰방 일렁였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너른 바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바다로, 바다로 달려가곤 했던 가슴 벅찬 젊은 날의 모습도 보였다. 그럴 때면 맨발에 바닷물이 쏴아아 밀려오곤 했었다.


  명절 연휴 첫날, 동그랑땡 육전 동태전을 부치고 삼색나물을 하고 갈비를 만들며 나박김치를 살폈다.

서로의 재료들이 붉은 바다에서 맘껏 유영하며 즐거이 놀고 있더군. 새콤하게 익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설날 아침, 만든 음식을 냄비째 혹은 통에 담고 담아 시댁으로 옮기고 떡국을 끓여먹으며 나박김치를 함께 마셨다. 내가 만든 나박김치 보다 시어머님이 담근 나박김치가 한층 맛있게 익어 그걸 식탁에 올렸다.

여기저기 나박김치 사태가 났다.

여기저기 온통 바다다. 노을 천지다.


  오늘도 나는 나박김치를 먹으며 생명의 바다, 붉은 바다를 마신다. 이런 날은 바다로, 바다로 갈 일이다.




명절 아침, 끓인 떡국과 나박나박 나박김치의 고혹적인 자태.


*) 출처: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