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운 Mar 23. 2023

맛없는 맛이 지극히 맛있어지는, 해파리냉채

지미무미(至味無味) 하니 무미지미(無味之味)라!

  이래도 되는 일인가. 삶이 이렇게도 난감할 일인가. 아까부터 이럴까 저럴까 맴돈 생각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그리 넓지도 않은 마트 안을 몇 바퀴째 돌고 있다. 소위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음식 재료가 눈에 들어오다 못해 밟히는 것은 몸이 나에게 보낸 적신호에 대한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해야 할 것 같아서다. 이제는 내 몸을 챙겨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도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렵게 돌려 말하면 식단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쉽게 말하면 살을 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은 제법 급박해서 열량은 낮고 포만감을 줄 수 있는 식재료를 뒤지고 찾아서라도 눈에 띄면 냉큼 집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알량한 작심은 니 맛 내 맛 무조건 보장인 '단짠 얼큰 탄수화물 괴물들'에게 호락호락 넘어가고 만다. 이미 라면, 짜파게티, 비빔면 5개짜리 번들 하나씩을 골라 장바구니에 담아 넣었지만 스파게티면이, 당면이, 쌀국수가 산란하는 빛처럼 눈에 어른거려 마음은 더욱 산란해졌다.


  아무리 지미무미(至味無味: 지극한 맛은 맛없는 맛)라고는 하지만 맛없는 맛이 지극한 맛임을 아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로서는 맛없는 맛에 구미가 당길 리 만무하다. 익숙한 단맛 짠맛 고소한 맛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쓴맛이라도 느껴져야 음식 먹는 재미가 있을 터인데 아무 맛이 없는 맛이라니... 이런 허무한 맛이 어찌 지극한 맛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러니 우무(곤약), 우무국수, 청포묵, 해파리 같은 식재료를 사야 할 것 같은데 선뜻 손이 안 가는 것이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쩔 수 없이 먹어지는 음식에 무슨 맛이 있을까. 먹다가 반쯤은 결국 버리고  것이 분명하기에 망설임의 시간은 길어지고 만다.


  그래도 굳이 골라야 한다면 어릴 적 기억 속에 화려하고도 신기한 음식으로 각인된 식재료, 해파리를 골라야 하리라 마음을 굳힌다. 결정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이 해파리가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그 해파리예요?"라고 엄마에게 물었었지. 그럼 엄마는,

 "아마도 그럴걸? 그 해파리인지 다른 해파리인지는 몰라도 해파리는 해파리니까."라고 알쏭달쏭한 대답을 하셨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해파리는 분명 아닐 거라고 단정 지었다. 바다에서 수영할 때 조심해야 하는 해파리, 살에 닿으면 따끔한 상처를 입히는 그 해파리는 아닐 거라고. 만약 그 해파리가 먹을 수 있는 해파리였다면 해마다 여름 피서철에 골머리를 앓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의 시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식용 가능한 숲뿌리해파리(좌), 염장한 상태로 판매되고 있는 해파리(우)

  역시나. 해파리의 종류는 2백 여종이지만 식용 가능한 종은 10여 종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약전의 <현산어보>에는 해파리를 삶아 먹거나 회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전통적으로 애용해 온 것은 숲뿌리해파리 같은 종이었을 것이고 골칫거리로 뉴스에 자주 등장하던 노무라입깃해파리는 먹을 수 없는 종이었다. 모든 해파리 종이 식용 가능하다면 미래 대체 식량으로 더없이 좋을 것인데...


  <해파리냉채 만들기>
1. 염장된 해파리는 여러 번 씻어 짠기를 빼고 쿰쿰하고 고약한 향을 없앤 후 30분 정도 물에 담가 놓는다.
2. 끓는 물에 찬물 한 대접을 섞어 7,80도 정도의 물에 해파리를 살짝 데쳐 물기를 뺀 후, 식초 몇 방울과 참기름으로 무쳐 놓는다.
3. 오이, 당근, 피망, 계란지단 등은 채 썰고 데친 오징어와 새우, 볶은 소고기, 무순 등으로 장식한다.
4. 소스 : 겨자에 파인애플 소스를 넣어 잘 갠 후 간 마늘, 소금, 설탕, 레몬즙, 식초 등을 넣어 섞어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이 '해파리냉채'라는 음식이 희한타. 해파리라는 개별적 재료는 꼬들꼬들한 식감을 제외하면 니맛내맛 없는 식재료인데 살진 고기, 단 새우, 진한 오징어, 톡 쏘는 소스, 아삭 오이, 달큰 당근, 고소한 계란... 등과 섞이니 여러 맛이 어우러져 신통하고 근사하고 탁월한 음식이 되는 것이다. 평범하고도 흔한 재료들이 합쳐졌을 뿐인데 조화로운 음식이 되고 지극한 맛을 내는 요리가 된 것이다.


  이 지극한 맛을 식구들은 알고 있음인가. 평소 행태라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고기나 해산물만 얄밉게 골라 먹어야 마땅한데 고약한 습관은 어디에다 팔아먹고 해파리를 옴팡지게 골라 집어 소스에 버무려 먹는 것이다. 햄버거에서 야채를 빼내고 샤부샤부에서 고기만 건져 먹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해파리는, 해파리만은 뒤적여서라도 듬뿍듬뿍 골라내 함께 먹는다. 해파리를 이것밖에 안 넣었느냐 타박까지 하며 해파리 없는 해파리냉채가 무슨 해파리냉채냔다. 그렇지, 말 된다. 해파리  없는 해파리냉채는 그냥 냉채일 뿐이고 말고. 라이스페이퍼에 싸 먹기까지 하니, 참으로 기특한 해파리냉채가 아닐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나지 않고 담백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 오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으며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 무미한 해파리가 다른 재료들과 신통방통하게 섞여 멋있는 맛을 연출해 내는 것처럼.


  그러니 무미한 맛이 지극한 맛일 수 있겠거니, 담백한 사람이 타인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게 다. 해파리냉채를 먹으며 이런 장한 생각까지 하고 보니 더더욱 귀한 음식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덧> '지미무미'에 대해 검색을 하다 좋은 글귀가 있어 함께 감상하시자 덧붙입니다.

조선일보 <정민의 世說新語> 2020.7.30


世味醲釅, 至味無味.

味無味者, 能淡一切味.

淡足養德, 淡足養身,

淡足養交, 淡足養民.

《祝子小言(축자소언)》

세상 사는 맛은 진한 술이나 식초 같지만,

지극한 맛은 맛없는 맛이라네.

맛없는 맛을 잘 음미하는 사람이야 말로,

능히 일체의 맛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네.

담백해야 덕을 기르고, 담백해야 몸을 기르고,

담백해야 벗을 기르고, 담백해야 백성을 기를 수 있다네.​

매거진의 이전글 오마카세 바람이 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