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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운 Feb 16. 2023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작당모의(作黨謨議) 22차 문제:  지하철에서 >, 그리고

  1. 1991년, 부산.

  버스는 산복도로를 목전(目前)에 두고 있었다. 평지를 달리던 지금까지의 운행이 워밍업 즉, 몸풀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숨 후욱 들이마시고 꼬불꼬불 1차로 경사진 길을 오르고 꺾는 '본게임' 돌입하게 될 터였다. 노련한 버스는 산복도로 S라인을 매끄럽게 타고 달릴 것이고 버스를 조련하는 운전사의 팔뚝엔 부산 앞바다 푸른빛을 닮은 힘줄 몇 개쯤 불거져 올라오리라. 활어처럼 살아 퍼덕거리는 아침, 출근길이었다.


  나는 버스 맨 뒷자리 바로 앞, 관전하기 가장 좋은 명당, 1인 의자에 앉아 스릴 만점 곡예 운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판잣집을 개축한 몇 평 안 되는 단층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골목길에서는 개미처럼 사람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왔고 주택 옥상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에선 시동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왼편 산아래로 펼쳐진 무수한 집들과 빌딩, 기찻길과 바닷길, 항구의 컨테이너 등등을 감상하며 퍽퍽하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한 하루의 일과 인생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었다. 집 앞에 86번 버스가 정차한다는 것, 그 버스가 서면을 지나면서 산복도로를 타고 돌아 그 끝나는 보수동 책방골목 앞 건물로 출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창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오는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얼굴에 차갑게 감기는 습윤한 바닷바람을 느끼며 가는 출근길은 마치 여행길과 같았다.


언제나 여행일 수밖에 없었던 86번 버스 노선. 연산동을 출발해 산복도로를 지나 수정동까지... 굽이굽이 인생길의 축소판이었다.

 

  이미 5년 전(1985년), 부산에도 지하철이 개통돼 시민의 발은 버스에서 지하철로 바뀌어 있었지만 내게는 버스가 더 친숙하고 편했다. 게다가 앞에는 지하철이 다니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걷고 버스와 환승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로웠다. 러시아워를 피해 30분가량만 서두르면 될 일이었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싱싱한 출근길 광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예정된 시간에 반드시 정차하지 않아도 되는 버스의 일탈적 관습과 길이 막히면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 버스의 숙명 같은 기다림, 차창 밖 치열한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 혜안은 나를 초조하기 않게 해 주는 처방전과 같았다. 그것은 갈 길이 아직 멀고 험한 길을 오르내리며 돌부리에 차였을 내 젊은 날의 실낱같은 꿈이자 희망이었다.


 그러니 마음이 복잡할 때도 86번 버스를 찾을 밖에. 산복도로 여행은 언제나 좋은 힐링 장소였다. 집 오른쪽 편으로 10분만 걸어가면 86번 종점이었으므로 굳이 거기까지 걸어가 지정석과도 같았던 자리에 앉아 종점까지 1시간 20여 분을 달렸다 회차해서 다시 같은 시간을 달려 집으로 오면 시끄럽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되었다. 버스 여행은 내가 부산을 떠나온 1996년까지 계속되었다.


  2. 2001년, 서울.

  그러나 서울은 달랐다. 서울은 넓고도 복잡한 도시였다. 정확히 시간을 맞춰야 하는 출근길에는 지하철이 마땅하였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단선인 부산 지하철에 비해 서울 지하철이 거미줄 마냥 촘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복잡하고 막히는 도로 사정과 주차난을 감안하면 지하철은 차라리 전용 자가용 수준이었다. 그러니 차 없는 뚜벅이에게 지하철은 믿을만한 교통수단이었다. 교통수단에 무슨 낭만을 찾을 일인가. 여행 운운할 일도, 힐링을 들먹일 일도 없었다. 모두 사치였다.


  지옥철이라고 불린 지하철의 위안이라고 한다면 강북지역에 살았으므로 강남으로 향하는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면 으레 한강을 지난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살이를 하면서 지하철이 지상을 달린다는 것, 그것도 강을 건넌다는 것은 혜택을 넘어 은혜였다.


동작대교에서 바라본 지하철 4호선. 강북에서 강남으로 넘어가는 이 구간, 그리고 한강이 없었다면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일은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날 아침은 뭔가 달랐다. 양치질을 하고 있는 거울 속 나의 모습은 전에 없이 생기가 발랄해 보였던 것이다. 아침부터 이렇게까지 과하게 쾌활해 보여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아, 안타까운지고!...' 출근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말고 물이 잔뜩 오른 얼굴을 어디에고, 누구에게 보여줄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비혼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사랑에 설레고 일렁이지 않는 젊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 아침이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하고 시린 초봄. 살갗에 와닿는 공기가 찹찹하기까지 한 날씨였다.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처럼 집을 나와 10분 여를 걸어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사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면 된다. 어제의 어제처럼 강남으로 향하는 2호선 열차는 분명 사람이 넘쳐날 거였고 등으로 밀어서라도 열차에 올라야 하는 사명만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열차 안은 얼마나 후텁지근할 것이며 퀴퀴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지하철 키스신.


  '오늘, 그를 여기서 만나게 될 것만 같은데...'

아니, 만났었던 것 같다는 기시감이 불현듯 든 것은 지하철 4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전철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주위는 이미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팔에는 소름이 돋았으며 익숙한 발걸음의 기척을 듣기 위해 귀와 눈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그다. 그가 맞다. 계단을 내려오더니 나를 향해 걸어오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만나게 될 것 같았던, 이미 이 장소에서 만났었던 것 같은 그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된 연인이라도 되는 듯 내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한 손으로 허리를 와락 안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전에 열렬히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며 입맞춤을 한 적이 있었던가... 정말이지 그런 기억은 없었다. 얼마 전, <번지 점프를 하다> 영화를 봤었고 좋아하지도 않는 크림파스타를 분위기상 함께 먹었었다. 그리고 회사 근처 Bar에서 양주를 마시고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 1시의 거리를 걸었었다. 택시가 잡히는 시간을 좀 더 기다리자 했던가, 집에 가지 말고 새벽이 올 때까지 걷자고 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그리고, 그리고... 없다. 뭐 연애랄 것도 없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국도 아니고, 이마 키스라니... 그때,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 혹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예언처럼 결혼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 해였다. 2001년 10월.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버린 지금. 그 날,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드라마틱한 일,  더욱이 사랑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그만 일에도 설레고 감동하던 내가 이제는 제법 큰 일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중년이 된 것이다. 인생은 짧고 사랑은 더 짧다고 했던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라 노래했던가.


  중년이 우울한 어느 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이수익 <우울한 샹송>)'로 시작하는 시의 구절을 떠올리며 '지하철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의 설렘을 찾을 수 있을까... '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 표지사진> 게티이미지 중 <Couple kissing in Train Station> by Bettmann. 1944년.

* 찹찹한 : 꽤 찬 느낌이 있는, 경상도 방언.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로,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해 온 작당모의가 잠시의 휴식을 가집니다. 필진의 개인 사정으로 갖는 충전의 시기일 뿐, 각자의 글쓰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동안 작당모의의 부족한 글들을 봐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며, 작당모의의 수작(手作)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모두들 건필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번,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아진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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