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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Feb 01. 2024

따뜻한 말 한마디

 오래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가 있다.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제목의 이 드라마는, 제목과 달리 불륜을 소재로 한 드라마였다. 한참 불륜, 출생의 비밀, 재벌가의 횡포 등 막장 코드의 드라마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올 때 이 드라마는 다른 길을 택했다. 불륜을 합리화하거나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불륜남녀와 주변인들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주인공 남녀는 어떤 사람들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떤 가족들과 어떻게 일상을 살아가는지... 이 드라마의 진가는 주인공 남녀의 불륜이 밝혀지고 나서 나타나는데, 기존의 불륜드라마들이 불륜이 밝혀진 후에  당사자들의 배우자가 나타나 드잡이 하고 소리 지르고 깨부수는 모습을 공식처럼 보여준 데 반해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불륜의 후폭풍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두 사람의 불륜으로 인해 불륜의 당사자들은 물론 주변인들의 일상과 마음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요즘 흔히 말하듯 '마라맛'이 아니라 담백하게 묘사해서 지켜보는 마음이 더 아팠다. 감정이 흔들렸고, 배우자와 자식이 있으니 억누르고 감추고 지나가야 했건만 두 사람 다 그렇게 하지 않았고, 함께 호텔까지 갔지만 둘 다 서로를 배려해서 선을 지켰고,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마음의 크기가 컸기에 그걸 알게 된 배우자와 가족들의 일상과 마음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고조되고 날 선 대화들이 오가는 가운데, 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이 드라마의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나온다.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됐다고. 누구의 대사였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남녀는 불륜을 저지르기 전부터 이미 배우자에 대한 마음이 식어 있었고 배우자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거나 입만 열면 싸우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와중에 우연히 서로를 만나고 끌리게 되었다. 두 부부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상대방을 배려했다면, 상대방의 가시 돋친 말에 나는 더 큰 가시를 던지는 게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작가의 의도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러나저러나 불륜은 나쁜 거고 정말 훌륭한 배우자와 살면서도 불륜을 저지르는 인간도 있지만, 적어도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에 대해서는 나도 깊이 동감한다. 

 부모와 자식, 부부, 친구 등 그 어떠한 관계에서도 상대방이 못마땅하고 미운 순간은 생길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찰나를 참지 못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힌다. 사람의 본성이란 게 얼마나 악한 지, 상대방이 내게 상처를 주면 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아니라 더 아프고 깊게 상처를 내주고 싶다. 상대방이 못마땅하고 미워지던 바로 그 순간에  혹은 이미 상대방이 내 마음을 상하게 했거나 내가 상대방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라도, 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던 가시를 꿀꺽 삼키고 따뜻한 말을 건넨다면 상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쉽고 간단하면 이 세상은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울 텐데, 쉽지 않으니 곳곳에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나고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겠지. 내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고 난 후에까지 미워한 것도, 그 미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괴로움의 시간을 길게 보낸 것도, 결국은 '아버지의 말'이 이유였다. 자식을 칭찬하거나 격려할 줄 모르던,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실수나 잘못은 호되게 혼을 내서 고치는 게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하시던 분. 다시는 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맞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자식에게 휘두르는 폭언과 폭력을 교육이라고 굳게 믿으셨던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아버지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깊은 분이었지만, 그런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어렸을 때는 내가 못나고 가치 없는 사람이어서 그 모든 것을 견디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고, 나이 들어서는 왜 어리고 미숙한 게 당연한 나이에 그렇게 모진 말을 듣고 맞으며 자라야 했나, 왜 내가 나를 미워하고 주눅들며 자라야 했나, 너무나도 화가 나서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다. 다정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밥을 먹다가 흘리거나 성적이 떨어지거나 화분을 깨뜨리는 등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에 너는 왜 이렇게 매사에 시원찮아!!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래!! 가 아니라 다음부터 조심하자, 응? 하는 따뜻한 말을 건네주셨다면, 내가 그렇게나 긴긴밤을 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아버지를 미워하며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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