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모처럼 개운하게 볼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며칠 동안 고대하던 일이라 아주 상쾌한 기분으로 나오는데, 열린 화장실 문 틈으로 들려오는 한 학생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랬다. “나, 소아암이야.”
엥? 내가 잘못 들었나? 열린 문 안에 세 명의 학생들이 보였고 그중의 한 명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소아암이야.” 그러자 나머지 두 학생이 그 학생을 끌어안으며 “히잉, 죽지 마!”라고 하는 것이다. 심각하고 슬픈 말투가 아닌, 친밀함과 어리광이 섞인 말투로... 아하, 이것들 장난치는 것이로구나, 근데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어디 암을 가지고!!! 몇 년 전에 ‘암세포도 생명’이라던 드라마 대사가 논란이 되었던 게 함께 떠오르면서 조금 화가 났다가, 그래, 겪어봐야 알지, 겪어 보지 않았으면 저럴 수도 있는 거야. 하고 맘을 가라앉히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나 또한 암을 내가 직접 겪어 보지는 않았다. 단지, 암 환자의 가족으로 10년을 살면서 암이란 것이 환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얼마나 크게 뒤흔드는 지를 경험했을 뿐이다.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 건 나였다. 아빠는 내가 일하고 있는 의료기관에서 종합검진을 받았었는데, 위내시경을 하면서 조직검사도 했다는 말을 들었었지만 설마 ‘암’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내시경실 간호사로부터 아버지 조직검사 결과 악성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전화를 받고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지만, 내시경실 안에 있는 진료실에서 진료의뢰서를 쓰고 있는 의사를 보니 그때부터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내시경을 했던 의사는 건조한 말투로 뭘 울어, 수술하면 되는 건데,라고 말하며 진료의뢰서를 툭 던지듯이 건넸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진료실 밖에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아빠와 그다지 친하지도 아빠를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하지도 않는 딸이었지만, 내 가족의 암 진단이라는 것이 주는 불안과 슬픔의 무게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나가더니 울면서 돌아온 나를 보고 부서장은 길게 묻지도 않고 내 손에 들린 진료의뢰서를 가져가더니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병원의 소화기외과 진료예약을 대신해 주었다. 내가 일하는 의료기관과 해당 대학병원이 협력관계인 덕에 진료는 꽤 빠른 날짜로 순조롭게 예약되었다. 아빠가 운이 좋았던 건지, 협력의료기관의 직원 가족이라고 혜택을 받은 건지, 아빠의 진료와 검사, 수술 등 그 이후의 과정들도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수술 경과도 좋았고 추가로 항암이나 방사선 치료를 할 필요도 없었다. 위를 반 정도 잘라내고 나서 아빠는 눈에 띄게 마르고 기력이 없어졌지만, 우리 가족은 그만하면 다행이다, 감사하다, 를 연발했다.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이 끝나고 항암치료 없이 추적검사만 하면 된다는 소견을 받기까지 소요된 고작 4,5주였지만, 그동안 우리는 하루하루 피가 마른다는 게 뭔지 땅 속으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었으니까. 진료나 검사를 받고 나면 다음 진료 예약일 전까지 잠을 못 이루고, 수술 전날 주의사항을 들으면서, 수술 당일에는 아빠가 수술실에 들어간 후 전광판에 수술 후 회복실로 옮겨졌다는 문구와 아빠의 이름이 함께 뜰 때까지, 그리고 수술하면서 실시된 조직검사의 결과를 기다리는 그 모든 순간들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괴로움과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수술이 끝나고 약간의 요양 기간을 거쳐 아빠와 우리 가족들은 모두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완전하게 암 진단받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수술을 통해 암이 발생한 조직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도, 추적검사라고 해서 3개월이나 6개월에 한 번, 그러다가 경과가 계속 좋으면 1년에 한 번 병원에 방문하고 검사나 진료를 받아야 한다. 암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은 늘 우리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가, 아빠의 추적검사 일자가 가까워질수록 슬그머니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아무 일 없이 잘 살다가, 어떠한 징후나 증상도 없다가 그냥 받은 종합검진에서 암이 발견됐는데, 이미 암이 한 번 생겼던 장기에 다시 생기지 말란 법은 없지 않나. 추적검사를 받으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맘 졸이다가, ‘아무 이상 없단다.’라는 아빠의 연락을 받으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다음 추적검사 일자가 다가오면 다시 불안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던 불안의 실체는, 다소 엉뚱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빠가 사는 지역 의료기관에서 혈액검사를 받았는데, 아빠의 전립선 혈액검사 수치에 이상이 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아빠는 급히 서울로 올라와 비뇨기과 전문병원에서 조직검사를 받았고, 전립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위암으로 수술받은 지 불과 3개월 정도밖에 안 된 시점에서 또 다른 장기에 암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 60이 훨씬 넘은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우셨고, 나는 내가 믿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 이후로 아빠의 힘겨운 싸움은 더 치열한 전쟁이 되었다. 아빠는 위암을 수술한 병원에서 다시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고, 소화기 외과와 비뇨기과의 진료를 번갈아 받느라 더욱 자주 병원에 오가야 했다. 아빠가 병원에 자주 가다 보니, 우리 가족들에게는 행여 나쁜 소식을 들을까 봐 맘 졸이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위암도 전립선암도 생존율이 좋은 암이고 아빠가 항암치료를 받지 않다 보니, 주변에서는 “수술받으면 괜찮아지는 암이라 다행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한 두 달에 한 번 대학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그때마다 불안에 떨어야 하는 아빠와 그걸 지켜보는 우리 가족에게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잔인한 말이었다. 항암치료를 안 해서 다행이다, 수술받고 이만큼 회복한 게 다행이다,라는 말은 그걸 직접 겪어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말 아닌가, 그걸 왜 주변 사람들이 멋대로 판단한단 말인가.
아빠는 첫 암 진단을 받은 지 10년 정도가 지나서 돌아가셨다. 사인은 엉뚱하게도, 암이 아닌 폐렴이었다. 아빠의 암은 결국 한 번 더 재발했었고,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10년 동안 꾸준히 한 두 달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치료 경과를 판단하기 위한 검사를 받고, 또 그 검사의 결과를 듣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야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 아빠를 괴롭히던 두 개의 암 모두가 아빠의 몸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10년 동안 치료의 과정들을 견뎌내고 마음속 불안과 싸우며 아빠의 몸도 마음도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샌가부터 아빠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입맛이 없어 음식을 드시기 힘들어했다. 갑작스럽게 신부전을 판정받고 다시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고 일반 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겼다가 합병증으로 폐렴이 와서 돌아가시기까지,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인은 폐렴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지금도 아빠가 암과 치열하게 싸우느라 그 생명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다가 어느 순간 훅 꺼진 게 아닐까, 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암 암(癌) 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암의 한자는 어두울 암(暗)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암이 주는 육체적인 고통만큼이나,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을 둘러싸는 어두움의 깊이 또한 상당함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그 고통과 어두움 속에 갇혀 살던 아빠가 영원한 쉼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모두는 평안해졌다. 아빠가 암 진단을 받은 후로 나는, 누군가가 아프다고 할 때 그 병의 경중과 상관없이 위로를 건네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단지, 그와 그의 가족들이 우리 가족보다는 덜 고통스럽게 그 시간을 치뤄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우리 가족은 염원하던 기적-아빠의 소생-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기적이 있기를, 어두움의 시간이 조금 더 짧게 조금 더 빨리 지나가길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