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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Dec 03. 2023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혁명이 남긴 것

지난 이야기:


1910년 독재의 타도를 외치며 봉기했던 혁명 영웅들은 이제 모두 산 자의 세계를 떠났습니다. 당할 자가 없어 보였던 오브레곤도 결국 그가 탄압했던 크리스테로 운동가에 의해 허무하게 끝을 맞았습니다.


멕시코에 피의 강이 흐르고서야 총성이 멎었고, 지도자들은 곧 벽화와 동상으로 혁명가들을 기념하며 그들이 흘린 피로 새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이 혁명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1. 죽음의 향연


해골들의 축제,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


1910년 혁명의 시작 전 멕시코에는 약 1,516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혁명이 끝나고 난 후, 오늘날 학자들은 200만에서 많게는 330만의 사망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10년 만에 부산광역시 하나가 통째로 증발해 없어진 셈입니다. 저 중 30만이 1918년의 판데믹,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였고 당시 멕시코에서의 독감 사망률은 100명당 2명이라는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혁명 동안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나로 즉결 처분되고 전쟁터에서 총탄에 목숨을 잃었지만, 3백만이라는 재앙에 가까운 수치가 나온 원인은 내전으로 인한 사회 시스템의 붕괴였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농업이 망가졌고, 세력마다 각자 화폐를 발행해 가며 싸웠기 때문에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습니다. 도시들은 식량난에 시달렸고 시골에서는 오염된 물을 마시다 죽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전투로 인해 쌓인 시체 때문에 역병이 돌기도 했습니다.


해골들의 질주,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총에 맞던 병에 걸리던,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정치인, 장군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생지옥을 경험한 멕시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초연한 것처럼 보인다면 차라리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혁명의 제도화


혁명(革命):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 사회의 제도, 경제의 조직을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멕시코 혁명에 대한 평가는 세계 역사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아이티 혁명처럼 노예들이 주인의 목을 치고 국가를 전복한 것도 아니었고,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처럼 정치 체계가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니었으며, 얼핏 보아서는 경제 체계도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가난한 농민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가난하였고, 멕시코 시티의 정권이 바뀌었다고 저 멀리 소노라나 유카탄의 삶이 나아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관론적으로 보면 일부 정치인과 장군들의 욕심 때문에 멕시코 전체를 10년 동안 파멸로 몰아넣은 소모적 전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멕시코 혁명의 성과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혁명 기간 등장했던 토지 개혁, 공공 자원의 개발과 같은 여러 개혁적 주장들이 나중에 빛을 발하였고, 오늘날까지 멕시코를 통치하는 제도혁명당(PRI)이 탄생하였으며, 멕시코의 국가적 정체성과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이 모든 국민들에게 퍼졌기 때문입니다.


라자로 카르데나스 대통령


오브레곤과 카예스의 독주가 끝나고, "혁명의 제도화"를 주도한 인물은 카예스의 후계자 라자로 카르데나스(Lazaro Cardenas), 멕시코의 51대 대통령이었습니다. 카란사의 밑에서 장군으로 있다가 미초아칸의 주지사를 지낸 카르데나스는 1934년 플루타르코 카예스의 지명자로서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법이 바뀌면서 멕시코에 첫 6년 집권 대통령으로 당선된 카르데나스는 6개년 계획(Plan Sexenal)이라는 야심 찬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계획은 크게 네 분야로 나뉩니다.

농업: 토지의 재분배와 원주민의 삶 개선
공업: 산업의 국유화와 국익 보호
노조: 노동조합의 권리
교육: 과학적, 세속적 공교육의 보급


이 중 가장 중요했던 토지 개혁부터 알아봅시다.




3. 토지 개혁


농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카르데나스 대통령


토지 개혁(Reforma Agraria)은 멕시코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자 누구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던 혁명의 최대 과제였는데 카르데나스는 농민들의 큰 지지를 받으며 개혁을 상당 부분 이뤄냈습니다. 대농장주(hacendado) 중심으로 돌아가던 과거의 식민지적 시스템은 해체되고 에히도(eijido), 즉 스스로 지도자를 선출하여 운영되는 협동농장 체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총 1,835만 헥타르가 분배되었고, 원주민들이 빼앗겼던 토지의 2/3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집권기 동안 분배된 땅은 멕시코 전체 면적의 9.1% 정도였습니다.


마야인과 야키족, 그리고 한국땅에서 끌려온 이민자들의 피와 땀이 서린 유카탄 반도에도 이때 개혁이 시행되긴 했으나, 오늘날 유카탄에서의 토지 개혁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대지주들이 계속해서 개혁에 훼방을 놓았고, 결정적으로 에네켄 산업이 인공섬유의 발달로 도태되면서 대표적인 상품작물을 잃어버렸으므로, 마야인들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카르데나스도 물론 나름대로의 계획을 갖고 이런 급진적 개혁을 펼쳤는데, 바로 기존의 정권과 결탁해 있던 지주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일환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동원한 것입니다. 그는 혁명이 끝나고 불어닥칠 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내다보았습니다. 카예스는 권력을 물려주면서도 강력한 파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했고, 기존의 대농장주, 자본가들의 세상을 흔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르데나스가 공약한 세상은 대중들에게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결국 정치적 여론과 민심은 카예스파에 등을 돌렸습니다. 1936년 한때 권력의 정점에 올랐었던 카예스는 패배를 인정한 채 쓸쓸히 멕시코를 떠났습니다.




4. 석유 국유화


석유 국유화 선언, 1938년


1920년대 멕시코는 미국 다음가는 세계 2위 산유국이었지만, 석유 산업은 철저하게 외국 자본에 의해 지배되었습니다. 영국 자본가가 세운 멕시칸 이글 컴퍼니가 멕시코 전체 석유의 60%, 그리고 미국 석유회사 두 곳이 30%를 생산했습니다. 외국 회사들은 정부의 묵인과 열악한 노동 조건 하에 멕시코인들을 착취하였고, 1935년 석유노조가 결성되었음에도 성과가 없자, 2년 뒤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멕시코의 석유 생산이 하루아침에 끊겨 버린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중재에 나선 카르데나스는 파업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정당한 배상을 제시했으나 외국 회사들은 돈이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멕시코가 석유 산업을 운영할 만한 전문인력이나 지식, 장비가 없다고 판단하여 협상에서 우위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르데나스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나는 이제 전 국민에게 이 정당하고, 중요하며, 필수불가결한 결정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지지를 간곡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 라자로 카르데나스, 석유 국유화 선언


1938년 3월 18일 카르데나스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헌법 27조 하에 멕시코 국민과 주권을 위하여 모든 17개 석유회사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Expropiacion Petrolera). 혁명 이래 해외 강대국에 힘없이 휘둘리기만 하던 나라가 처음으로 카운터를 날린 이 날, 카르데나스는 국민의 영웅이 되었고 멕시코의 민족주의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소칼로 광장에만 20만 명 이상의 인파가 국유화를 축하하며 집결했습니다. 한국의 금 모으기 운동과 유사하게, 멕시코인들이 집에서 금과 보석을 들고 나오는 국채보상운동도 발생했습니다. 멕시코 대표 국영기업인 PEMEX의 시작이었습니다.


석유 국유화를 환호하는 멕시코인들


오늘날 돌이켜보면 카르데나스는 천부적 재능의 정치인인 동시에 운이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항상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고, 국유화라는 강경수를 둠으로써 수출 엠바고를 당하고 영국과 국교가 단절되는 위기에 놓였지만, 대신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버드 경영대 연구에 따르면 외국 회사들은 기업가치와 비교해 적절하거나 2배 넘는 평가를 받고 멕시코에 매각되었고, 멕시코 재정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으나, 처음으로 미국과 멕시코가 동등한 경제주체로써 협상을 성공시켰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만약 멕시코와의 석유 분쟁으로 인해 중남미와 미국 관계가 악화된다면, 멕시코에 묻힌 모든 석유보다 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 해롤드 아이크스, 내무장관


이때 미국은 석유회사들의 강력한 로비 때문에 보복 경제제재를 심각하게 고려했었으나, 루스벨트 정권이 표방한 "좋은 이웃 정책(Good Neighbor Policy)"을 깰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중남미를 적으로 돌렸다가 추축국에 붙거나 공산화되는 악재가 일어나서는 안되었기에, 멕시코의 결정을 존중하였습니다.


카르데나스는 국유화로 인해 펑크가 난 정부 예산 일부를 군 예산 삭감으로 메꾸었고 1934년부터 미국 재무부가 은구입법(Silver Purchase Act)으로 멕시코에서 다량의 은을 사주고 있던 덕분에 재정 파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선언이 그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헌법 27조(자원 주권)를 시행시켰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멕시코 혁명의 완결점을 카르데나스의 석유 국유화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로써 전쟁과 암살이 난무하던 멕시코의 야인시대는 저물고, 투표와 자본력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현대 국가가 탄생했습니다.




5. 태양의 후손들

 

멕시코 원주민을 묘사한 디에고 리베라 벽화


정치와 법은 시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하지만, 혁명이 멕시코에 남긴 불변의 유산은 사회 전반에서의 의식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900년대 포르피리오 시절의 유럽 중심적, 백인 우월주의적, 중상주의적 사고방식은 혁명 이후 논의를 거치며 멕시코적인 것(Mexicanidad)으로 발전했습니다. 


오늘날 멕시코 시티의 차풀테펙 공원에 가면 "멕시코가 생각하는 멕시코의 모습"을 담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1938년 카르데나스의 지시로 탄생한 이 장소는 다음의 주제들을 유물과 벽화를 통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발견: 원주민과 유럽인의 융합으로 탄생한 멕시코의 고유한 문화

시작: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유를 획득한 신생 국가의 독립

위기: 탐욕스러운 엘리트들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혁명 그리고 계속된 내전

미래: 농민과 노동자, 원주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


이 네 가지 테마는 카르데나스가 원했던 이상적인 멕시코의 모습이었고 유럽, 미국, 대자본가를 악으로 묘사함으로써 두고두고 멕시코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정치를 정의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2023년 드라마화된 판초 비야


혁명을 기념하는 과정에서 프란시스코 마데로, 판초 비야, 그리고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자연스럽게 새 나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모두에게 사랑받는 멕시코의 간판 캐릭터가 되어 수많은 창작물과 굿즈를 탄생시켰습니다. 아마 국회의원들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사파타, 비야를 모르는 멕시코인은 없을 것입니다.


왜 그 많은 혁명가들 중 정부의 공식 마스코트가 판초 비야일까 하고 생각해 보면, 우선 오브레곤이나 카란사 같은 지도자들의 마지막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사파타에 비해 철학이 약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부담 없이 기념할 수가 있고, 결정적으로 총을 들고 미국을 쳐들어간다는 패기 넘치는 그의 행보가 세대를 넘어 멕시코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많은 철학적 선언문과 강령이 발표된 멕시코 혁명이었지만 오늘날 멕시코인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남은 문장은 비야가 남긴 이 한 마디입니다.


¡Viva México, Cabrones!
(씨바 멕시코 만세!)


오늘날 정부와 민간의 꾸준한 기념사업들은 멕시코 혁명을 단순히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그 이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계적으로 혁명에 자부심을 갖고 기념하는 국가들 중 공산주의나 독재 국가가 제법 있는데, 퍼레이드와 매스게임을 통한 권위주의적인 기념이 아닌,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외세와 독재자를 몰아낸 데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기념한다는 점에서 멕시코 혁명은 타 20세기 혁명과 차별되는 역동성을 가집니다.


멕시코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격동의 20세기를 살았던 혁명가, 대통령, 장군, 사상가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2023년 11월 20일 혁명의 날을 기념해 소칼로 광장에 비야의 얼굴이 걸렸습니다.


무기를 들기에 한 시도 주저함이 없이,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자유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으며, 우리의 조상들이 남긴 영광의 유산을 더럽힐 수 없음을 기억하라. 그들이 그러했듯이, 전쟁에서는 불굴을, 승리해서는 관용을!
- 프란시스코 마데로, 산 루이스 선언(1910)




이것으로 10화에 걸친 멕시코 혁명사를 완결합니다.


역사가의 시점보다는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 중심의 서사를 이어가고자 노력하다 보니,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 같은 일부 사건들이 누락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혁명사를 읽고 멕시코의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이라도 풀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역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한국인들도 후한말 역사서를 읽는 사람은 없지만 삼국지는 누구나 읽는 것처럼, 멕시코에서 실제 기억되고 소비되는 모습에 가깝게 묘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요 인용 저서:

The Mexican Revolution - Hourly History
Cristero War - Hourly History
Mexican Revolution, Genesis under Madero - Charles C. Cumberland
Villa and Zapata - Frank McLynn


주요 인용 사이트:

Gobierno de Mexico - Archivo General de la Nacion (멕시코 정부 공식 사이트)
INEHRM Secretaria de Cultura (멕시코 역사교육부)


주요 인용 논문:

Rails to Revolution: Railroads, railroad workers and the geographies of the Mexican Revolution - Hector Agredano
Mexico: The Cardenas Years - Standlee Greening
The Empire Struck Back: Sanctions and compensation in the Mexican oil expropriation of 1938 - Noel Maurer
The Revolution, the Stat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Mexico - Steven Topik
The Cristero Rebellion 1926-1929: Mexican women, mothers, and Marianismo - Janette Gallardo
The Mexican Expedition 1916-1917 - Julie Irene Prieto
Yaquis: Pueblos Indigenas del Mexico Contemporaneo - Jose Luis Moctezuma Zamarron
Guerra é prejudicial à sua saúde: fotografias e testemunhos sobre morte, ferimentos, doenças e cuidados médicos durante a Revolução Mexicana - John Mr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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