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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Nov 25. 2023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역사가 잊은 자들

지난 이야기:


혁명의 주역들 사파타와 비야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 땅 속에 묻혔습니다. 오브레곤은 자신에게 대항할 만한 인물들에게는 조금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았고 그의 정적들이 차례로 제거된 뒤 1920년 오브레곤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집권기 동안 간만에 멕시코 땅에 평화가 찾아왔고, 1924년에는 후계자 플루타르코 카예스에게로 권력이 이양되었습니다.


많은 역사서들은 이 시점에서 멕시코 혁명이 종결된 것으로 봅니다. 카예스 집권 이후 사파타와 같은 혁명가가 패권에 도전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4년 집권기 동안에도 유혈 충돌은 계속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카예스 집권 동안 역사책에서 잘 다루지 않는 잊혀진 이야기들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1. 야키족의 최후


북부 소노라(Sonora) 땅에서 대대손손 살아왔던 야키 원주민(Los Yaquis)들은 1533년 스페인과 처음 접촉했습니다. 17세기 초부터 멕시코의 독립 선언까지 야키족은 예수회와 공존하며 자치를 해왔으나, 멕시코에 독립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야키족과 그들의 땅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정부 사이의 오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유카탄 에네켄 농장의 야키족

특히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야키족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릴 생각으로 6,500명 이상을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에 강제 이송해 버렸습니다. 미국의 한 기자가 1908년 잠입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하루에 2,000개의 에네켄 잎을 수확하지 못하면 두드려 맞았다고 하며, 여자들은 강제로 결혼시켜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1년도 안 되어 절반이 고된 노동과 학대에 못 이겨 사망했습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자, 소노라 주에 남아 있던 야키족은 자신들의 땅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들은 판초 비야의 군대에서 복무하며, 전투 전에 마리화나를 피우고 광신도처럼 돌격하기로 유명했는데, "라쿠카라차" 원문 가사에서 마리화나 얘기가 나오는 데에는 이런 비화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혁명이 끝나고도 정부는 야키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판초 비야의 군대에서 복무한 야키족, 1911년


1924년, 야키족의 땅은 카예스의 동의 하에 미국의 건설업체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에 추장이 반발해 들고일어나자 카예스는 공군을 동원해 야키족의 반란을 단 몇 주 만에 폭격으로 진압해 버렸습니다. 야키족은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뉜 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산속이나 미국으로 도망갔고, 이것이 그들의 최후의 저항이었습니다. 오늘날 야키족은 미국 애리조나 주와 멕시코 소노라 주에 나눠져서 살아가고 있으며 멕시코에는 약 30,000명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땅과 자유를 위해 100년이 넘도록 싸웠지만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차가운 총칼뿐이었습니다.




2. 카이사르의 것


멕시코 시티 성당, 1884년


오늘날 멕시코가 독실한 가톨릭 국가라는 점은 겉보기에나 통계상으로나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멕시코의 근대사를 보면 멕시코 정부와 가톨릭 교회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었습니다. 스페인을 통해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 마을마다 들어선 교회는 민중의 생로병사를 함께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무시할 수 없는 양의 재물과 토지를 축적함으로써 하나의 세력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arez)부터 시작해서 정권을 잡는 모든 멕시코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영향력과 재산 그리고 토지의 문제를 놓고 갈등했습니다.


1857년 개혁법부터 멕시코 정치에는 이미 정교분리, 종교의 자유, 교회 부동산 국유화 등의 반교권주의(Anticlericalismo) 정서가 존재했습니다. 카란사의 1917년 헌법은 더 나아가 종교인의 정치활동 금지, 공교육 세속화, 교회의 토지 소유권 불인정을 명문화했습니다. 그럼에도 큰 반발이 없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계속된 내전으로 멕시코의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법들을 강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혁명이 끝나고 카예스 집권기에 와서야 터졌습니다.


카예스는 무신론자였고 토지 개혁을 공약하고 당선되었으므로,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1926년 "카예스법"의 제정으로 교회는 부동산을 빼앗기고 야외에서 종교 활동을 금지당했습니다. 곧 믿음의 자유를 지키려던 교인들과 정부 사이에 시위와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교인들은 스스로를 크리스테로(Cristero) 즉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며 과달루페 성모의 깃발을 들고 모였습니다. 혁명을 겨우 끝낸 멕시코에 종교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3. 크리스테로 전쟁


나는 죽어도 하나님은 죽지 않으신다. 비바 크리스토 레이!
- 아나클레토 곤살레스 플로레스, 처형 직전에


크리스테로 전쟁(Guerra Cristera)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카예스 정권을 위협할 만큼의 피해는 끼치지 못했으나, 이전의 멕시코 혁명과 겹치는 점이 많았습니다. 사파타와 비야의 추종자들처럼 대부분의 크리스테로들은 시골 출신이었고, 순교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새 정부가 토지 재분배와 같은 혁명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크리스테로들은 할리스코와 미초아칸에만 20,000명이 넘게 모여 산악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에 정부군은 끝까지 진압에 애를 먹었습니다.


행진하는 여성들


이 전쟁에서는 혁명에서 잊혀진 또 하나의 세력이 활약했는데 바로 여성들이었습니다. 나이를 막론하고 25,0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잔다르크 여단이라는 명칭으로 크리스테로 병사들을 도왔고 음식과 치료 말고도 앞치마에 탄약을 숨겨서 배달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정부군은 가정주부와 어머니들이 몰래 이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멕시코 혁명 당시 비야와 사파타의 군대에 여성들도 참여한 기록이 있지만, 당대의 기준으로는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었습니다. 반면 크리스테로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은 가정 밖으로 나가서라도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는 멕시코 전통적 여성성의 종교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크리스테로들은 굳건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혁명군들에 비해 명백한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통합된 하나의 리더나 체계적인 조직이 없었고 전투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투쟁의 목표가 멕시코 시티의 점령은 아니었기 때문에 모여서 공세를 가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상자는 양측 모두 40,000명을 넘겼습니다.


1928년이 넘어가자 바티칸과 가톨릭 교회도 중재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소식이 미국의 가톨릭 교도들에게 퍼져 미국 정부에도 압력이 들어갔습니다. 카예스 다음으로 취임한 에밀리오 포르테스 힐(Emilio Portes Gil) 대통령은 미국 대사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1929년 6월 카예스법 일부를 폐지하기로 하고 적대 행위를 종결했습니다.


크리스테로 반란군


이 전쟁이 도합 10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도 "잊혀진 반란"이라 불리는 이유는 첫째로 비밀 게릴라 조직이라는 특성상 1차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멕시코 정부와 교회의 상호 불신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아 기념하려는 시도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1940년까지 정부와 교회는 서로 대립했고, 교회에 대한 법적 제약은 1991년이 되어서야 폐기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정치인들은 아마 가톨릭과의 복잡한 역사를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교회를 견제하는 법안이 일부 남았기 때문에, 멕시코의 성직자들은 신규 건축과 야외에서 행해지는 종교 활동, 라디오와 TV 방송에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4. 무기여 잘 있거라


오브레곤과 카예스


혁명사에서 보았듯이 멕시코 시티의 대통령좌에 한번 앉아본 사람들은 한결같게도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특징이 있었는데, 전쟁 영웅 오브레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927년 의회가 "연달아 재선은 안되지만, 한 번 건너뛰고는 가능하다"라고 해석하자 카예스 다음 대권을 노리기로 합니다. 이것을 본 대권주자 아눌포 고메즈(Arnulfo Gomez) 장군과 프란시스코 세라노(Francisco Serrano) 장군 둘은 오브레곤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며 비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오브레곤을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오브레곤이 한발 빨랐습니다.


"좋소, 오브레곤 대표, 사나이답게 승부를 내봅시다."
"세라노, 난 자네가 그보다는 똑똑하다 믿었네. 멕시코에서 사나이의 승부 따위는 없어. 한 명은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한 명은 벽 앞에 끌려갈 뿐이네."
- 세라노와 오브레곤의 대화, 1927년


오브레곤이 세라노에게 한 저 말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10월 중 병사들은 세라노를 체포해 총살대 앞에 세우고 처형해 버렸습니다. 한 달 뒤, 고메즈 장군도 달아나던 중 붙잡혀 처형당했습니다. 효율적이게도 그의 총살형은 묘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오브레곤에 대적하는 모두에게 숙청의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몰아낸 독재자보다 더 철저한 독재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1928년 7월 멕시코의 총선은 오브레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살아 있는 후보가 한 명이었기 때문에 개표 과정은 간단했습니다. 멕시코인들은 이제 나라가 오브레곤과 카예스가 번갈아 통치하는 독재로 치닫고 있다는 걸 실감했으나, 오브레곤에게 덤빌 사람은 남아 있지 않는 듯했습니다. 적어도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승자의 만찬
작은 레몬, 작은 레몬아
날 꼭 안아주고 트럼펫으로 뽀뽀해 줘
- El Limoncito, 민요


7월 17일, 오브레곤은 멕시코 시티 근방에서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만찬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치 악단이 흥겨운 민요 Limoncito를 연주하는 동안 한 화가가 오브레곤에게 직접 그린 초상화를 보여주러 다가왔습니다. 그림을 본 오브레곤은 호탕하게 웃었고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화가의 옷에서 권총이 튀어나왔습니다. 이내 총성이 울리며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다섯 발의 총탄을 바로 앞에서 맞은 오브레곤은 테이블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취임 16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살해범은 호세 데 레온 토랄(Jose de Leon Toral)이라는 젊은이로 밝혀졌으며, 그는 크리스테로 전쟁의 추종자로서 오브레곤이 죽어야만 평화가 찾아온다고 믿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오브레곤의 죽음을 둘러싸고도 여러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구경의 총탄이 발견되었다는 부검 기록이 있으며, 삼엄한 경비의 대통령 만찬에 어떻게 살해범이 이토록 쉽게 접근했냐는 의문점이 듭니다. 그래서 일각에는 카예스라던지 그의 독주를 견제한 누군가가 사주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오브레곤은 비야와 사파타, 카란사를 비롯한 모든 정적을 의지와 전략으로 꺾어버리며 한때는 국민 영웅의 대접을 받았으나, 재선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멕시코 정치에 또다시 피를 흘렸다는 씁쓸한 오명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퇴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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