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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Nov 15. 2023

석양이 진다

비야와 오브레곤의 한판 승부

지난 이야기:


멕시코 혁명을 원점으로 돌릴 뻔한 우에르타의 독재는 몰아냈지만, 비야와 사파타, 카란사 세 지도자들은 멕시코의 미래에 대하여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1914년 삼자회담을 끝으로 셋은 서로 군대를 이끌고 갈라섰으며, 북쪽을 차지한 비야와 주요 항구도시를 점령한 카란사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습니다.


비야와 사파타는 둘 다 카란사를 싫어했으나 끝내 의견 차이로 연합하지는 못하였고, 비야의 군대는 결국 사파타의 지원 없이 카란사와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1. 전쟁의 기술


1914년 비야의 북군(Division del Norte)은 세계가 공인하는 멕시코 최강군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그를 차기 멕시코의 리더로 보고 있었으며 이에 비해 카란사와 오브레곤 세력은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비야는 초인이 아니었으며, 그의 적수 오브레곤 장군 역시 보통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


이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on)이라는 인물은 예전부터 카란사가 비야의 대항마로 키웠던 지휘관이었습니다. 카리스마에 의존하며 기병 돌격에만 올인했던 비야와는 달리 오브레곤은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병법을 정식으로 공부했고 따라서 전략가로서는 훨씬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쟁터에서 무기도 없이 다니며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죽으려고 환장한 것 같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독특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우에르타를 몰아내고 그와 비야는 한번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는데, 비야가 죽고 싶냐고 협박하자 오브레곤은 편안한 목소리로 "나를 죽이면 오히려 나의 가치는 올라간다"라고 받아쳤고 비야는 말문이 막혀 돌아갔습니다. 이 외에도 오브레곤은 죽음에 관한 여러 명언을 남기며 나중에는 멕시코의 패권을 노리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경제적으로도 비야의 땅 자체는 더 컸지만 카란사와 오브레곤의 수입은 세 배 더 많았습니다. 카란사가 장악한 멕시코의 주요 항구 베라크루스와 탐피코 두 곳으로 수출하는 에네켄과 석유의 값은 세계 1차 대전이 터지면서 치솟았고, 반대로 비야가 수출하던 가축의 값은 내려갔습니다. 카란사의 우월한 자금력은 비야에게 한판 승부를 통해 빠르게 꺾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양측이 모두 예상한 대로 1915년 초 비야의 군대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를 접수하고 탐피코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탐피코를 절대 내줄 수 없었던 오브레곤은 중부 퀘레타로(Queretaro)에 진을 치고 비야가 공격해 오길 기다렸습니다.




2. 셀라야 전투


비야: 왼쪽, 오브레곤: 오른쪽


1914년 4월 4일, 오브레곤의 군대는 6,000명의 기병대와 5,000명의 보병으로 셀라야(Celaya) 마을에 도착해 진을 쳤습니다. 오브레곤의 견고한 방어선을 본 비야군 지휘관들은 섣부른 공격은 안된다고 말렸으나 비야는 듣지 않고 그의 주특기 기병 돌격을 시도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비야의 기병 돌격은 훈련 수준이 낮은 보병들에게 패닉을 유발하는 필살기였습니다. 그러나 철조망과 참호로 보호된 기관총 진지에 지원 없이 돌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사실이 후에 1차 세계 대전에서 드러났고 오브레곤은 이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셀라야의 치열한 전투 (드라마 재현)


꼬박 이틀 동안, 비야의 용맹한 기병대는 빗발치는 기관총탄을 향해 정면으로 돌격했습니다. 전장에 사람과 말의 시체가 쌓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비야군을 보고 오브레곤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비야의 운은 여기까지였습니다. 4월 7일 비야군은 맹렬한 싸움 끝에 소총탄이 모두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본 오브레곤은 준비해 둔 기병대로 결정타를 날렸고 비야군은 2,000명의 사망자를 내며 퇴각했습니다.


비야가 직접 지휘를 맡은 것은 우리에겐 다행입니다.
-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 승리 직후


셀라야 전투 기록, 1914년


4월 13일 놀랍게도 비야군은 다시 돌아와 20,000명의 병력으로 15,000명이 방어하는 셀라야를 쳤습니다. 기병대의 맹렬한 공세에 오브레곤의 방어선이 휘청거렸고 이틀 만에 총탄이 거의 바닥난 오브레곤은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14일 날 많은 비가 와 비야군은 돌격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15일 동이 트자 그는 숨겨두었던 기병대로 지친 비야군을 공격했습니다. 결과는 이전과 동일하게 비야군의 참패로 이어졌고 3,000명이 사망, 6,000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흔히들 말을 탄 기병의 시대는 1차 대전으로 끝났다고 하지만 1918년까지도 기병대는 정찰과 기습에 사용되었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기병 돌격이 효과를 보였습니다. 반면 셀라야 전투에서와 같은 "정직한" 정면 돌격은 기관총의 쉬운 표적이 될 뿐이었습니다.




3. 트리니다드 전투



셀라야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비야군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4월 29일 비야군은 치와와로 퇴각하지 않고 트리니다드에서 진을 쳤습니다. 비야에게는 야속하게도, 사파타가 이 시점에 베라크루스를 공격했더라면 판도가 달라졌겠지만 그는 비야를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트리니다드 역을 놓고 비야와 오브레곤의 운명을 가른 승부가 펼쳐졌습니다.


트리니다드 전투의 참호전


독특하게도 오브레곤은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 전쟁에서나 나올법한 사각형 방진을 선택했습니다. 비야는 오브레곤 진형을 포위해 굶기는 전략으로 이길 수 있었지만 공격을 위해 태어난 그에게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양측은 서로 철도를 통해 보급을 받으며 한 달 넘게 맹렬하게 싸웠지만 오브레곤의 진형이 버텨주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오브레곤은 대포에 맞아 오른쪽 팔이 통째로 날아가는 치명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빠른 처치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오브레곤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도 작전 계획을 그의 부사령관에게 주고 갔습니다. 6월 5일 동이 트자, 오브레곤의 계획대로 인근에 배치해 둔 기병대가 지친 비야군을 덮쳤습니다. 승리는 또다시 오브레곤에게 돌아왔고 비야군은 이 전투에서 총 10,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쓸쓸히 퇴각했습니다. 오브레곤과 달리 비야는 중요한 순간에 투입할 예비대(reserve)를 편성하는 습관이 없었고 계속해서 열등한 전략과 전술 때문에 허무하게 패했습니다.




4. 지는 별, 뜨는 별


1914년 비야의 무적신화는 오브레곤이라는 호적수를 만나 1년 만에 깨졌고 그의 북군은 만신창이가 된 채 치와와 주로 돌아갔습니다. 1915년 말, 비야의 군대는 2,000명으로 줄어 있었습니다. 비야의 지휘관들은 하나둘씩 오브레곤의 회유에 넘어가 비야를 떠났습니다. 힘을 모두 잃은 비야는 당분간 잠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멕시코 혁명에서는 여자들도 총을 들고 싸웠습니다.


비야의 패배 이후 카란사의 칼끝은 이제 모렐로스 주의 사파타를 향해 돌아왔습니다. 비야가 어이없이 연패하는 것을 보던 사파타는 불안해져 공격 준비를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1916년 카란사의 군대는 비행기까지 띄워가며 사파타를 끝내버릴 기세로 모렐로스 주를 공격해 오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전투에 사파타군의 지휘관들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5월에는 주요 도시인 쿠에르나바카(Cuernavaca)가 함락당했습니다. 사파타 세력은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1916년 거점을 아예 포기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파타가 꿈꾸었던 모렐로스의 지상낙원은 그렇게 총칼에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1917년 미국은 카란사 정부를 공식 승인했습니다. 카란사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정부의 주요 직책과 주지사들을 충성심 강한 부하들로 채워 넣고 스파이를 통해 감시했습니다. 그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고, 모든 주변인들이 그를 굉장히 계산적이고 차가운 인물로 기억했습니다. 멕시코의 지도자들은 자기의 거점만 건재하면 나머지 땅은 누가 다스리던 크게 관심이 없던 특징(patria chica)이 있었는데 카란사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절대복종을 요구했습니다.


1917년 헌법 공표를 기념하는 벽화
민주주의란 다른 것이 아니라 고귀하고 깊으며 철저한 이성이 지배하는 정부이다.
-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1917년 2월 5일, 카란사는 퀘레타로에서 멕시코 헌법을 공표함으로써 우회적으로 멕시코 혁명의 종결을 선언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수정해서 사용되고 있는 이 1917년 헌법에는 기본권, 삼권분립, 세속적 무상교육을 받을 권리, 노동권, 남성참정권,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현대적 헌법 정신이 담겨 있으며,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부통령 자리를 없애버렸고, 교회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세속적" 공교육만을 인정한다고 못 박아 가톨릭 교회 세력을 실망시켰습니다. 교회와 권력의 공존은 중남미 모든 국가에서 매우 복잡한 문제였는데 멕시코는 교회를 적대하는 선택을 하였고, 이는 머지않아 멕시코 정부에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정말로 혁명은 끝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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