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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Nov 18. 2023

정의 없이 평화 없다

비야와 사파타의 귀환

지난 이야기:


1914년, 멕시코 중부를 놓고 벌어진 비야와 카란사의 전쟁은 카란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북부를 호령하던 무적의 기병대는 기관총탄 앞에 쓰러져 나갔으며 비야는 조각난 군대를 이끌고 치와와로 돌아갔습니다.


카란사는 기세를 몰아 1916년 사파타의 세력을 모렐로스에서 쫒아내고 떠돌이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두 혁명가를 모두 물리친 그는 멕시코 시티에서 대통령에 취임하고 1917년 멕시코 헌법을 공표했습니다.


카란사는 자신을 멕시코 혁명의 승자라고 믿고 행동했으나, 그것은 큰 오판이었습니다...




1. 데스페라도

뉴 멕시코를 공격하는 판초 비야와 동료들, 1916년


모두가 판초 비야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치와와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습니다. 타 혁명가들과는 달리 친미 성향이었던 비야는 자신이 미국이 선택한 멕시코의 지도자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 정부가 자신을 도와주는 대신 카란사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믿었던 양키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1916년 1월, 비야는 무법자로 돌변해 미국 열차를 털고 2월에는 국경을 넘어가 뉴 멕시코에 위치한 콜럼버스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미국인과 미국 영토에 대한 무차별 공격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왜 이런 무모한 일을 벌였는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평가는 카란사 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미국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판초 비야를 그대로 두었다간 공화당에게 참패할 게 분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카란사도 비야가 벌인 국제분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미지가 크게 실추될 것은 뻔했고, 결국 윌슨 대통령과 합의 끝에, 멕시코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미국 군대의 활동을 묵인했습니다.


고생길의 시작


3월 15일, 1차 대전 미국 원정군의 총사령관을 지냈던 존 퍼싱(John Pershing) 장군은 기병대로 구성된 세 개 여단을 이끌고 리오 그란데 강을 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914년까지도 퍼싱 장군은 비야를 아군으로 간주했었고 책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래폭풍이 몰아치는 멕시코 최대 규모의 주를 뒤져 비야를 잡아야만 했습니다.




2. 비야를 잡아라

판초 비야 소탕작전 범위, 1916-1917


"비야는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 퍼싱 장군


정규군이 보급로를 유지하면서 드넓은 멕시코 북부 땅을 뒤져 게릴라 한 부대를 잡겠다는 이 비현실적인 목표는 멕시코에 진입하자마자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멕시코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으며, 제대로 된 정보 수집은 불가능했고, 길도 닦여 있지 않은 치와와 땅에서 지내는 것은 퍼싱 장군과 군사들을 금세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비야의 반미 캠페인에 동조한 치와와 주민들이 비야를 몰래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무법자의 상징, 현상금 포스터


미군으로부터 도망다니고 카란사군과 싸우면서 비야는 부상을 입기도 했고, 그의 유능한 지휘관들 다수를 상실했습니다. 그 중 파블로 로페스(Pablo Lopez) 라는 지휘관은 포로로 잡혀 치와와 시에서 공개 처형되었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난 그저 무식한 농부였을 뿐이네. 하지만 마데로가 압제에 저항해 일어났을 때 나는 판초 비야의 군대에 첫 번째로 지원했고 그의 가장 충직한 부하였지. 판초 비야를 모르는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었어. 밤마다 우린 캠프파이어에서 그의 무용담을 들었고, 독재의 밑에서 신음하는 모두가 그를 신봉했네. 비록 전투에서 죽진 못하지만 난 비야의 정신을 받들어,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죽겠다.
- 파블로 로페즈


총살형을 묘사한 목판화,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


로페즈는 이후 시가를 문 채 웃으며 처형장에 걸어 들어갔고 눈가리개 없이 떳떳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치와와 시민들은 카란사군의 의도와는 반대로 비야에 더욱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비야의 목에 걸린 현상금 5천 달러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미군과 카란사군이 서로를 향해 총질하는 전투도 벌어졌으며 아마 1차 대전만 아니었으면 전쟁으로 번졌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비야의 계획대로 미국-비야-카란사의 삼파전으로 흘러갔습니다.


1917년 1월, 미국-멕시코 관계만 악화시킨 채 퍼싱의 미군은 조용히 철수했습니다. 이 작전은 미군에게 해외에서의 게릴라전이라는 지옥을 미리 경험하게 해 주었다는 긍정적 평가 외에는 양측에게 모두 어두운 역사로 남았습니다. 미군이 자체적으로 내린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윌슨 정권의 멕시코 침공과 멕시코 혁명에 대한 개입으로 인해 조성된 상호간의 의심과 불신을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으며, 동시에 멕시코를 포함한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 미 육군 군사연구소 보고서, 2016년


마지막으로, 이 군사작전은 세계사에 의도치 않은 나비효과를 발생시켰는데, 바로 그 유명한 치머만 전보 사건이 정확히 1917년 1월에 터졌습니다. 멕시코의 상황을 지켜보던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Arthur Zimmerman)이 대사관을 통해 카란사 정부에게 독일-멕시코 동맹에 동의한다면 텍사스, 애리조나, 뉴멕시코를 미국으로부터 되찾도록 도와주겠다는 파격 제안을 한 것입니다.


카란사는 세계대전에 말려들어갈 여유가 없었기에 제안을 거절했으나, 그와 별개로 영국이 이 전보를 중간에서 가로채 미국에게 넘기는 바람에 미국이라는 잠자는 사자를 깨워버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미국은 중립을 깨고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때부터 적성국이 멕시코를 이용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3. 사파타의 귀환

사파타와 동지들


한편, 모렐로스에서 쫒겨난 사파타는 산 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6년부터 그는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서 발전소나 공장 같은 주요 기반시설만 부수고 도망가는 전략으로 카란사군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파타 소탕군의 대장이었던 파블로 곤살레스(Pablo Gonzalez)는 누구든 사파타에 협력하는 사람은 즉결 처분하겠다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곤살레스의 군대는 풍토병으로 약화되어 있었으며 사파타는 이를 보고 1917년 1월 총공세를 펼쳤습니다. 반격에 성공한 사파타군은 드디어 정부군을 몰아내고 모렐로스에 당당하게 돌아왔습니다.


1917-1918년 멕시코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계속된 내전으로 인해 철도와 인프라가 부서져 나갔고 식량 수급도 불안정했으며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이 아메리카대륙을 강타해 멕시코인 3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게다가 비야와 사파타도 모자라 이제는 제 3의 반란이 카란사 정부를 위협했습니다. 외국으로 망명해 있었던 독재자 디아스의 조카, 펠릭스 디아스(Felix Diaz)가 귀국해 1917년 남부 치아파스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들은 단일 철학이 있었다기보다는 카란사 정권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연합에 가까웠는데, 카란사의 대미정책을 탐탁치 않아한 미국 정부는 몰래 디아스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펠릭스 디아스의 이름을 따 펠리시타스(Felicitas)라 불린 이 세력은 20,000명 가까이 불어나 카란사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이를 본 사파타는 디아스와 손을 잡을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혁명 내내 모렐로스의 자치에만 집중하던 사파타는 1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멕시코에 대한 야욕이 멕시코 전체를 망칠 것이라 보고, 내부의 단합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비야와 디아스를 포함한 모든 카란사 반대 세력에게 화친을 제의하고 프랑스와 외교 활동도 펼쳤습니다. 사파타의 대외 활동은 빛을 발해 미국에서도 그의 철학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사파타에게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4. 비바 사파타!

혁명은 계속된다


1919년 곤살레스 장군은 11,000명의 군대로 모렐로스를 재침공했습니다. 그는 이제 카란사에게 "어떤 수를 써서든 1920년이 오기 전에 사파타를 제거하라"는 지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곤살레스가 무력으로 그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모렐로스를 통째로 불태워야 했을 테지만,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3월중 곤살레스는 그의 지휘관 중 한 명인 헤수스 과야도(Jesus Guajardo)가 사파타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이를 본 곤살레스는 그에게 지금 당장 반역죄로 처형되던가 이중 첩자가 되라고 협박하였고 겁이 난 과야도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곧 사파타에게는 곤살레스가 대필한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투항할 테니 근처 아시엔다에서 접선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4월 10일 사파타는 열 명의 경호를 대동하고 아시엔다에 들어섰습니다. 투항하러 온 병사들은 받들어 총 자세로 사파타에 예를 표했고 그는 선물받은 갈색 말을 타고 정문을 지났습니다. 환영의 트럼펫 소리가 끝나자마자, 그것을 신호로 숨어 있던 저격수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사파타와 그의 동지들은 그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곤살레스는 기뻐하며 과야도에게 계급 특진을 포상하였고 죽은 사파타의 사진을 찍어 카란사에게 보냈습니다.


링컨과 예수를 봐라,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결국 살해당하지 않는가.
- 에밀리아노 사파타


사파타의 갑작스럽고 비참한 죽음은 그가 살아생전 예언했던 대로 사파타를 전설로 만들었습니다.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마찬가지로, 죽음으로써 사파타는 멕시코 혁명의 성전에 영원히 안치되었습니다. 모렐로스의 농민들은 큰 충격에 휩싸여 사파타가 사실 죽지 않고 어딘가로 도망갔다고 믿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카란사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고 오히려 그의 끝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꿈꾸는 자들의 군대는 무적이다

사파타를 기념하는 축제


사파타의 구호였던 "땅과 자유(Tierra y Libertad)"는 혁명이 끝나고 나서도 농민들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1994년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협정(NAFTA)이 발효되던 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사회에 부활했습니다. 이들은 뼈빠지게 가난했던 치아파스 주 농민들과 원주민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급진적 재분배와 자치를 요구하면서, 서민의 삶을 파괴한 글로벌리즘과 신자유주의, 멕시코 정부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부군과 무력 충돌하는 강경파였다가, 현재는 테러단보다는 자치 정부의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파티스타 반군 지역에 들어와 있다.
이곳에서는 민중이 말하고 정부가 복종한다.
- 사파티스타 자치령 표지판

EZLN, 2022년


사파타의 추종자들에게 멕시코 혁명은 끝난 적 없는 미완의 혁명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아직도 남부의 농민들은 멕시코 평균에도 한참 못 미치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고, 식수나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심각한 지역 격차를 해결하지 못한 정부는 혁명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파타가 활동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 멀어 보입니다.




같이 보면 좋은 자료:

여행 유투버가 녹화한 사파티스타 마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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