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레곤의 시대
지난 이야기:
혁명가 비야와 사파타는 패배 후에도 카란사 정권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미국 영토를 공격한 비야를 잡기 위해 미군이 멕시코 북부에 진주했고, 사파타는 정부군이 약해진 틈을 타 모렐로스를 재탈환했습니다.
1919년 흩어진 멕시코의 세력들을 규합하려던 사파타는 다시 정부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배신자가 판 함정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비록 인간 사파타는 땅에 묻혔지만, 사파타의 혁명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정적을 물리쳤다고 생각한 카란사는 기고만장해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시작했으나, 그의 적들은 늘어만 갔습니다...
1917년 카란사의 헌법 제정이 끝나고, 비야를 물리쳤던 전쟁 영웅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on) 장군은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인 소노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2년 동안 병아리콩 농사를 지었는데 콩 가격이 2배 뛰는 바람에 오브레곤의 농장은 1,500명 규모로 불어났고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카란사와는 달리 성격도 원만하고 유머감각이 있었던 그는 고향에서 영웅담을 늘어놓으며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모두의 예상대로, 오브레곤과 같은 전쟁 영웅이 영구적으로 은퇴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는 사실 은퇴하면서 1920년 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카란사가 그를 밀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19년 6월 카란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하자 오브레곤은 자기가 뒤통수를 맞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파타를 죽이고 민심을 저버린 카란사를 비난하는 캠페인을 시작했고 이것을 본 카란사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바로 오브레곤의 체포를 명령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오로조코, 우에르타, 비야, 사파타와 맞서 이겼다.
카란사 따위는 쉽게 이길 수 있다.
- 알바로 오브레곤
카란사가 이성을 잃고 독재자의 길을 선택하자, 오브레곤도 그동안 쌓아왔던 인기를 몰아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체포를 피해 게레로로 피신한 오브레곤을 기차역에서 맞이한 것은 정부군 지휘관이었습니다. 오브레곤은 웃으며 "나를 체포하러 왔는가?"라 물었고 그에 지휘관은 경례를 하며 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1920년 4월, 오브레곤은 동지들과 함께 <아구아 프리에타 강령>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소노라의 주지사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Adolfo de la Huerta)와 소노라 출신 장군 플루타르코 카예스(Plutarco Calles)가 오브레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그의 군대는 멕시코 시티를 향했습니다.
상황이 역전된 것을 본 카란사는 5월 중 무기와 금괴를 챙겨 베라크루스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에 깔린 카란사의 적들 때문에 그의 행렬은 가는 곳마다 표적이 되었으며, 베라크루스로 가는 길도 막혀 버렸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 권력의 정점에 앉아있던 카란사는 이제 갈 곳 없는 피난민 신세가 되었습니다.
5월 21일 카란사 일행은 기진맥진한 채 틀락스칼란통고(Tlaxcalantongo)의 한 오두막집에 당도했습니다. 그가 자고 있는 동안 반군 저격수들이 쫓아와 집을 포위했습니다. "카란사에게 죽음을!" 고함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들었고 카란사는 그렇게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1920년 12월, 오브레곤은 정식으로 대통령직에 취임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혁명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우선, 그는 판초 비야에게 돈과 농장을 줄 테니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 살 것을 제의했습니다. 판초 비야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북부 카누티요(Canutillo)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카누티요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 구석구석 보초를 배치해 둔 뒤 편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다음은 카란사와 싸우던 남부의 펠리시타스 세력을 정리할 차례였습니다. 지도자 펠릭스 디아스는 돈과 미국행 편도티켓을 받고 떠났고 나머지는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사파타군의 파괴자 파블로 곤살레스 장군은 반란을 모의하다가 잡혀 미국으로 망명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파타를 배신했던 지휘관 헤수스 과야도 역시 반란을 꾸미다가 누에보 레온에서 잡혔습니다. 그의 즉결 처분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브레곤에게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1923년, 다음 해 선거를 앞두고 오브레곤이 카예스 장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자, 그와 같이 싸웠던 3인방 중 데 라 우에르타가 반기를 들고 나섰습니다. 12월부터 베라크루스와 할리스코에 20,000명이 넘는 반군들이 집결했으나 오브레곤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멕시코 공군을 동원해 하나씩 격파해 나갔습니다. 1924년 초 데 라 우에르타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반란은 종결되었고 오브레곤에 맞설 사람은 이제 없는 듯했습니다.
오브레곤과 카예스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데 라 우에르타가 제거되고 나자, 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판초 비야에게 쏠렸습니다. 비록 현재는 시골에서 소나 치는 농장주였지만 그의 대중적 인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카예스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비야와 오브레곤은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지만 1923년 그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원하면 당장이라도 40,000명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다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오브레곤과 카예스는 이 발언을 듣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프란시스코 비야는 카누티요로 돌아간 후 호위 병력이 없이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카누티요를 요새화해 모든 암살 위협에 철저하게 대비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7월 자신의 애인을 방문하기 위해 파랄(Parral)로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비야는 평소의 호위 병력 대신 다섯 명만 데리고 파랄에서 쉬다가 7월 20일 다시 카누티요로 떠났습니다. 그날따라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고 경찰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파랄을 나가는 길목에서, 한 길거리 장사꾼이 비야를 알아보고는 "비야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신호였습니다. 길가의 집에 숨어 있던 저격수들이 비야의 차량을 향해 40발이 넘는 총탄을 퍼부었고 가까스로 도망친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자리에서 벌집이 되어 사망했습니다. 비야의 시체는 차 안에서 축 늘어진 채, 오른손은 권총집을 향해 있었습니다. 살인자들은 그의 시체 옆에서 사진까지 찍는 여유를 부리고는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다음 날 수천 명이 통곡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당시에도 비야의 허망한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일 파랄의 치안유지 병력은 다른 곳으로 파견 나가 있었고, 45분이 넘게 살인범을 쫒으려는 시도도 없었으며, 전보는 먹통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말은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것이고 실상은 치밀하게 계획된 암살이었습니다.
비야는 카누티요에 들어오고 1923년이 되어서야 전 건물주였던 멜리톤 로조야(Meliton Lozoya)가 돈과 물건을 빼돌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한 달 안에 부족분을 메꿔 오라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로조야는 평소 비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을 모아 비야를 살해할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으며, 무기 구매와 파랄에서의 숙박비, 보상금까지 7천 페소가 소모되었습니다.
이 당시 최저임금으로 제시된 액수가 하루 4페소였으니 상당한 거금이었고 주동자들도 이 돈이 "높은 데서 왔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파랄의 지휘관에게도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돈이 지급되었습니다. 오브레곤과 카예스는 비야 살해 계획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본인들에게 화살이 돌아오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하청을 사용하고 희생양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당시 멕시코 국민들에게는 이러한 정보가 모두 공개되진 않았지만 다들 어느 정도까지는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한편 비야는 죽어서도 평화를 찾지 못했는데, 1926년 누군가가 그의 무덤을 파헤쳐 목을 자른 뒤 해외로 팔아넘겼습니다. 이 목은 미국의 부유한 수집가에게 팔렸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디로 갔는지는 현재까지 불명입니다.
1924년, 비야와 데 라 우에르타가 모두 퇴장하고, 계획대로 오브레곤의 후계자 플루타르코 카예스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이것으로 10년이 넘게 지속된 쿠데타와 내전은 막을 내리고 멕시코에 안정기가 찾아왔습니다. 최후의 1인, 오브레곤을 제외하고 멕시코 혁명사를 장식했던 수많은 정치가, 장군, 지도자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총탄에 암살당하거나 셋 중 하나였습니다. 오브레곤을 향한 암살 시도도 있었지만 경계심 많은 그는 쉽게 약점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카예스의 정권을 위협할 만한 적은 없었으나, 그의 집권기도 마냥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