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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Nov 11. 2023

풍운아 판초 비야

도적에서 혁명가로

지난 이야기:


1911년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독재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취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시작부터 혁명가들끼리의 의견 충돌과 기존 기득권 세력의 견제에 시달렸고, 1913년 마데로는 끝내 쿠데타에 의해 희생된 첫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다시 독재를 추진하던 우에르타 장군의 야욕에 대항해 카란사와 비야, 사파타가 뭉쳤으며 연합군은 1914년 치열한 전투 끝에 우에르타를 성공적으로 몰아냈습니다.


이제 누가 멕시코의 중원을 다스릴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1. 천하삼분

카란사, 비야, 사파타


1914년, 우에르타의 독재를 타도했으니 이제 새 정부의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마데로와 오로조코는 퇴장하였고 이제 정치인 카란사, 의적 비야, 그리고 농민의 영웅 사파타 이렇게 셋이 남았습니다. 사카테카스 전투에서도 보였듯이 비야는 카란사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카란사 역시 도적단 따위에게 정권을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914년 세력 지도: 비야(북) vs 카란사(동, 서) vs 사파타(남)


카란사는 10월 아구아스칼리엔테스(Aguascalientes)에서 세 세력을 모두 초청해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물론 본심은 좋은 말로 할 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고 비야와 사파타는 당연히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사파타는 모렐로스로 돌아갔고, 비야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 시티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카란사도 지지 않고 오브레곤을 앞세운 군대를 이끌고 베라크루스와 타마울리파스 주에 입성했습니다. 멕시코 혁명가 사이의 2차 내전이 눈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2. 판초 비야 그는 누구인가?


멕시코 내전 이야기에 앞서서, 판초 비야라는 전설적 인물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혁명사를 통틀어 현재까지도 사파타와 함께 민중에게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판초 비야는 1878년 듀랑고 주의 아시엔다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비야가 16세가 되던 해, 대지주가 비야의 여동생을 첩으로 삼으려 하자 그는 대지주를 총으로 쏘고는 산속으로 달아나 도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 판초 비야의 첫 30년간의 행적은 본인의 주장과 신화와 소문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빈후드와 같은 사회적 의적이라고 주장하며 부자들을 털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야가 항상 무고한 사람들의 편에만 서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불필요한 살상도 많이 저질렀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진짜 의적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비야는 한순간도 총에서 멀어져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 예로, 비야의 군대는 1913년 치와와를 지나며 아시엔다 “엘 카르멘”에 들렀습니다. 엘 카르멘의 지주는 농민들을 벌으로 말뚝에 묶어놓는다던지,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빚 세습을 농부의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등 악덕 지주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주민들에게 사실을 들은 비야는 지주를 잡아와 공개적으로 처형해 버린 뒤, 곳간을 열어 곡식을 모두 분배하고 서로를 잘 다스릴 것을 당부하고 떠났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이런 의적질을 몇 번 더 벌였고 곧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비야 만세!"를 외쳤습니다.


마데로나 카란사와 다르게 비야는 글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고, 선언문이나 행동강령 같은 것을 쓸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무법자로 남았을 수도 있었던 비야는 1910년, 우연히 마데로의 측근과 만나게 되면서 혁명에 눈을 떴습니다. 마데로의 정당은 그를 도적이 아닌 정의의 투사로 보아주었고 이에 감동한 비야는 북부의 동지들과 함께 멕시코 혁명에 가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3. 황야의 무법자

비야는 1914년 미국인 감독과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도 있습니다.


마데로와 사파타가 혁명의 브레인을 담당하고 철학을 정립하는 스타일이었다면, 비야는 혁명의 마초감성을 자극하는 카우보이의 표본과도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군사 교육은커녕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장군이었지만 그는 카리스마 하나로 모두를 휘어잡는 나폴레옹 같은 힘이 있었습니다.


캠프파이어에서 동지들과 노래 부르고, 약자와 여자들에겐 한없이 인자하며, 말안장 위에서 잠을 자며 정규군을 따돌리는 비야의 모습은 멕시코인들이 보기에 상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비야와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잤던 많은 병사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의 승마나 사격 실력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목숨을 건 퀵드로우 결투에서 이기기도 했습니다.


비야의 세력은 사파타나 카란사에 비해 태생부터가 유리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멕시코 북부의 척박한 땅은 100년이 넘도록 원주민들과 피 터지는 전쟁을 벌여온 덕분에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서바이벌 그라운드였기 때문입니다:

야키족 전쟁 (1531–1929)

아파치족 전쟁 (1831–1915)

코만치족 전쟁 (1821–1870)


대대로 불안정한 치안 속에서 자란 북부의 징집병들은 남부에 비해 기본적으로 말을 타고 총을 다뤄본 경험자들이 많아 일반적인 농민 징집병들과는 전투력과 기동력의 급이 달랐습니다. 비야는 그중에서도 베테랑들을 뽑아 도라도스(Dorados)라 불리는 일종의 보디가드를 만들었습니다. 100명에 달하는 이 조직은 비야가 엄선한 군마, 값비싼 5X 스텟슨 모자, 7mm 마우저 소총과 같은 A급 장비로 무장한 정예병들로, 비야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혁명군에 비해 철학은 부족했지만 일단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청년들은 앞다퉈 지원하고 어린아이들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다녔습니다. 1914년 비야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시기였습니다.




4. 동상이몽


1914년 12월, 카란사 세력은 잠시 잊어두고, 멕시코 혁명의 두 주역 비야와 사파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멕시코 시티에서 서로를 만나 회담했습니다. 서로 적은 아니었지만 딱히 친구도 아니었기에 회담은 어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야는 자신이 대통령이 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고 사파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싸움꾼이지 정치가가 아닙니다. 대통령직에 걸맞는 교육도 받지 못했습니다. 읽고 쓰는 것을 2년 전에 배운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외국의 대사들과 국회의원들과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까? 문맹이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어선 안됩니다.
- 프란시스코 비야, 1914년 회담에서


비야와 사파타의 연합 전선이 생겼다면 멕시코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었겠지만, 북부와 남부 세력의 근본적인 목표는 너무 달랐습니다. 혁명의 시작부터 사파타의 일관된 주장은 토지의 재분배였으나 이는 목축업, 상업이 주였던 북부 주민들에게 크게 와닿는 포인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회만 된다면 대지주의 저택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야도 그가 다스리는 북부 지역 외에는 크게 관심도 없어 보였습니다. 회담이 끝날 때까지 둘은 서로의 차이점만 확인한 채 각각 북쪽과 남쪽을 맡아 다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매우 어색한 비야와 사파타


회담이 끝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가 오자, 비야는 화려한 대통령 의자에 앉아 당신도 이리 와보라고 손짓했습니다. 사파타의 답변은 냉정했습니다.

난 저런 걸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토지를 돌려받기 위해 싸웠지.
권력의 상징 따위는 태워 버려야 할 것입니다.
- 에밀리아노 사파타


두 혁명의 주역들이 다 이긴 것처럼 파티를 즐기는 동안, 베라크루스에서는 카란사와 오브레곤이 병력을 모으고 여론전을 펼치며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비야는 이때 베라크루스로 쳐들어가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음에도 멕시코 시티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급품이 부족해서 그랬다는 해석부터, 미국을 믿고 자만했다던지, 사파타가 처리해 주기를 기다렸다 자기가 막타를 날리려고 그랬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지만 지금 와서 확실한 것은 그의 결정이 패배를 앞당겼다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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