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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질소셜클럽 Nov 09. 2023

군웅할거

내전의 시작

지난 이야기: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80세가 넘어서도 민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권력욕에 집착했고 많은 운동가들이 재선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재선반대당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활발한 저술 활동과 순회 캠페인으로 빠르게 디아스의 대항마로 떠올랐으나, 디아스는 그를 체포하려 들었고 이에 마데로는 피신해 무장봉기를 선포했습니다.


비록 그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마데로의 고귀한 이상에 감동한 혁명가들이 전국 각지에서 무기를 들고일어났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를 위하여 멕시코에 얼마나 많은 피의 강이 흐르게 될 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 반란군의 진격


1911년 2월부터 4월까지 마데로가 고전하는 동안, 놀랍게도 마데로의 선언에 고무된 반란군들이 하나둘씩 봉기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통신 기술의 한계 때문에 서로 다른 세력끼리 합동 작전을 펼친 것은 아니었지만, 산발적으로 일어난 반란군의 진격은 디아스 정권과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빨랐습니다. 3월 중 멕시코 시티 바로 밑인 칠라파(Chilapa)가 함락되었고, 4월에는 주요 항구인 아카풀코(Acapulco)가 넘어갔습니다. 부패한 정권의 말로가 흔히 그렇듯이, 디아스 휘하의 정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아예 반란군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멕시코 1차 혁명의 3인방


마데로의 깃발 아래 모인 세력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세 명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파타와 비야는 나중에 더 심도 있게 다룰 예정입니다.

남부 모렐로스 주 농민혁명의 지도자 - 에밀리아노 사파타 (Emiliano Zapata)

북부 치와와 주 도적단의 두목 - 판초 비야 (Pancho Villa)

남부 게레로 주 반군의 대표 - 파스쿠알 오로조코 (Pascual Orozoco)


이 중 오로조코와 비야의 군대는 4월 중 마데로와 합류, 북부의 주요 요충지인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arez) 시를 포위했습니다.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디아스 정권은 마데로가 평화주의자라는 점을 이용해 휴전 제안을 했습니다. 마데로는 이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피를 볼 작정이었던 오로조코와 비야가 돌격하는 바람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판이한 성격과 목표를 가진 혁명의 지도자들끼리는 삐걱거리고 있었습니다.


시우다드 후아레스의 반군들


정부군 지휘관 나바로(Navarro) 장군은 700명으로 약 2,500명의 반란군을 막아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도시 곳곳에 쳐둔 바리케이드와 기관총 화망을 농부들 따위가 뚫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전투의 두 가지 흥미로운 점은 뜬금없게도 이탈리아 혁명가 가리발디의 손자가 외국인 용병부대 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는 것과, 미국 국경도시 엘 파소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옥상에 올라가 전쟁 구경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바로 장군의 예상과 다르게 반란군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1910년대 초, 철도와 함께 전쟁사를 바꿔놓은 신기술이었던 거치식 기관총의 발전은 잘 갖춰진 방어선에 돌격하는 것을 자살행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반란군은 정면 돌격 대신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와 정부군이 힘들게 쌓아놓은 방어선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전략을 썼습니다. 식수와 통신이 차단된 정부군은 시가전으로 고생하다가 단 이틀 만에 투항해버리고 맙니다.


시우다드 후아레스 점령 기념사진


시우다드 후아레스의 함락은 단번에 혁명의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반란군은 미국과의 무역 루트를 통해 자금과 무기를 조달할 수 있었고, 멕시코의 상황을 지켜보던 미국의 태프트 대통령은 디아즈 정권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데로 세력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는 사진, 인쇄 기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기록물이 생산되고 퍼졌습니다. 일개 도적단 따위가 보란 듯이 정규군을 격파하고 기념사진까지 남기는 것을 본 디아스 정권은 이 패배로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2. 독재자의 몰락


지난 에피소드에서 철도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 잠깐 다뤘었는데, 반란이 계속되면서 철도에 대한 의존성은 정부군을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정부군이 철도 허브를 사수하는 동안 판초 비야,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같은 반란군 지도자들은 말을 타고 평원과 산을 넘나들며 동지들을 모아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반란군의 숫자는 금세 도시 밖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철도 허브가 하나둘씩 적의 손에 넘어가자 정부군도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디아스 장군 오늘 퇴임 결정"


1911년 5월 중 멕시코의 주요 도시들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사방에서 적군이 멕시코 시티를 향해 조여오자, 기고만장했던 디아스 정권은 개전 시작 세 달 만에 백기를 들고 항복했습니다. 5월 25일,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퇴진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의 나이 81세였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주인공들 대다수가 끝이 좋지 않았는데, 디아스만은 프랑스에서 무탈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설에는 그가 멕시코를 떠나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도 합니다:


마데로가 호랑이를 풀어버렸구나.
그가 감당할 수 있는지 보자.
- 포르피리오 디아스


디아스의 긴 독재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1차 목표는 달성했지만, 디아스가 말했듯이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습니다. 새 정부는 고통받는 서민들의 삶을 예전보다 나아지게 할 의무가 있었고, 전국에서 들고일어난 도적단들은 무기를 내려놔야 했으며, 전쟁으로 인해 소모된 재정을 메꿔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의 주역이었던 마데로, 비야, 사파타, 오로조코는 독재가 타도되자마자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승리를 위해 잠시 뭉쳤지만 서로의 갈길이 달랐던 것입니다.




3. 어제의 동지


마데로의 승리를 기념한 그림, 1968년


1911년 6월,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멕시코 시티에 입성했습니다. 혁명의 과업이 끝났으니, 이제 정부를 재편해야 할 단계였습니다. 내각부터 시작해서, 장관, 주지사, 군대 등 모든 정부 요직에서 디아스의 잔재를 몰아내고 판을 완전히 새로 짜야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은 마데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는데, 일일이 사상 검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 정부가 꾸려지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마데로의 대통령직에 첫 반기를 든 것은 "농민의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였습니다. 그는 본인과 상의도 없이 모렐로스 주에 대지주 친화적인 주지사가 임명되는 것을 보고 마데로에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7월까지도 마데로와 사파타는 평화적 해법을 찾으려 하고 있었으나, 정부군의 수장이었던 빅토리아노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 장군은 4천 명이 넘는 사파타 세력을 잠재적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병력을 모렐로스에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데로 각하, 저는 사사로이 토지와 농장을 갖고자 총을 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싸운 이유는 모렐로스의 농민들이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저와 모렐로스에게 한 약속을 지키십시오.
- 에밀리아노 사파타, 1911년 대통령궁에서


사파타가 달갑지 않았던 모렐로스의 새 주지사 역시 흑색선전을 이용해 모렐로스가 도적떼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론을 조성했고, 결국 9월 정부군과 사파타군은 무력 충돌에 돌입했습니다. 양측 다 서로를 파괴할 기세로 싸웠기 때문에 논밭과 마을은 초토화되고 무고한 농민들도 죽어 나갔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3달 만에 혁명가들끼리 총을 겨누게 된 것입니다.


사파타군 모집 포스터, 1913년


모렐로스의 반란은 마데로와 신생 정부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데로는 우선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두 달 동안 인명피해만 낸 우에르타 장군을 소환해 맹비난했습니다. 이는 나중에 마데로에게 큰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데로의 내각 일부는 부정적인 여론 때문에 사임했습니다. 어수선한 와중에 1911년 11월, 마데로는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같은 달, 사파타는 자신의 철학이 담긴 <아얄라 강령>을 발표합니다.


1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선언은 멕시코의 민중이 마데로를 위해 피를 흘렸음에도 그가 혁명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대지주들과 엘리트들이 점유한 토지를 무력으로라도 압수하여 농민들에게 되돌려줄 것이며, 마데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제 7조. 멕시코의 농민들은 그들이 걷는 땅의 주인이다.


이 선언은 토지가 없이 착취당하던 멕시코의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쿠바 혁명에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땅과 자유(Tierra y Libertad)"라는 구호 아래 사파타 세력은 집권 내내 마데로 정부를 괴롭혔고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멕시코인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4. 계속되는 반란


"오로조코,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다"


1912년 3월에는 혁명의 동지였던 오로조코가 치와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마데로 정권이 들어섰지만 기존의 대지주(hacendado)들이 모두 축출된 것이 아니었고, 이들은 기득권을 계속 잡기 위해 오로조코 같은 지도자들을 꼬드겨 안티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치와와 주가 통째로 반란군에 넘어가고 멕시코 시티까지 진격할 기세였는데, 정작 우에르타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자 오로조코의 반란은 7월에 빠르게 종결되었습니다.


이 당시 우에르타 장군 밑에서 복무하고 있었던 또 다른 혁명의 주역 판초 비야는 명령 불복종을 빌미로 처형당할 뻔했으나, 사형장에 끌려간 날 극적인 마데로의 중재로 목숨은 건지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탈옥해 정부는 물론 미국과도 맞짱을 뜨는 멕시코 혁명의 의적이 됩니다.


비록 오로조코 반란은 진압했지만, 멕시코인들과 당시 멕시코에 거주하던 미국인들은 마데로 정부가 1년도 못 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제대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지 심각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주멕시코 미국 대사는 반란군에게 잡힐까 봐 패닉해서 미국으로부터 피난선을 요청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멕시코 시티 밖의 치안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사파타와 같은 잘 조직된 반란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도적떼들도 활보하였고, 대지주들은 끊임없이 마데로 정권에 대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마데로와 가족들, 1912년


1912년이 지나가면서 마데로 정권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가 했으나, 반대 세력들은 언론의 자유를 백분 이용해 계속해서 황색 선전을 시도했습니다. 매일같이 마데로의 측근에 대한 스캔들이 터져 나왔고, 아예 대놓고 퇴진을 주장하는 언론사도 있었습니다. 여론전에서 밀린 마데로 정권은 1913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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