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에서 무장혁명으로
지난 이야기:
30년이 넘는 디아스의 독재 기간 동안, 낙후되었던 멕시코 땅에 철도와 전기, 석유가 개발되었고 미국과 유럽의 자본이 대거 들어와 외국인 투자자들과 멕시코의 엘리트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멕시코 시티의 프랑스풍 저택들에서 샴페인이 서빙되고 왈츠가 흘러나오는 동안, 시골의 농민들과 원주민들, 그리고 탄광의 노동자들은 지주와 사장의 압제 속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된 디아스는 민생에 신경쓰지 않으면서 끝까지 재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의식 있는 운동가들은 하나둘씩 디아스의 퇴진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도 멕시코 혁명의 지배적인 이미지라 함은 모자 쓴 콧수염 아저씨들이 탄띠를 X자로 두르고 서로에게 윈체스터 라이플을 난사하는 웨스턴의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혁명의 초기 지향점은 무장투쟁이 아니라 평화적 선거운동이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정신적 지주 프란시스코 마데로 역시 총보다는 평생 펜을 잡았던 운동가였습니다.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1873년 멕시코 북부의 부유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프랑스에서 유학했는데, 대부분 엘리트들이 유럽을 무작정 동경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멕시코의 상대적 빈곤에 상실감을 느꼈고, 멕시코로 돌아와서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고 크게 동요했습니다. 1903년 몬테레이에서 행진하던 시위대에 정부가 발포하는 것을 보고서 그는 디아스 정권을 본격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디아스의 권력은 공고했고 마데로는 일개 이름 없는 청년일 뿐이었습니다.
마데로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특출 나게 카리스마가 있었다거나, 언변이 좋았다는 평가는 없습니다. 멕시코의 기준에서도 마초적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는 데다,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평생 급진파와 거리를 두었고 혁명의 성공 이후에도 양 극단을 모두 실망시키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데로가 혁명 내내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평소 영혼의 세계에 심취해 있었던 그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활동했다는 점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말릴 때도 그는 신념을 잃지 않고 디아스 정권의 평화적인 실권을 꿈꾸며 멕시코 전역을 돌았습니다. 선거 자금은 집안의 자산을 처분해 가며 마련했습니다. 마데로는 1904년부터 신문과 잡지 기고를 통해 "실질 참정권, 재선 반대(Sufragio efectivo, no reeleccion)"를 외치며 동지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마데로는 디아스 정권의 부패를 저격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의 소책자 <La sucesion presidencial en 1910>를 발간합니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3천 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마데로를 대스타로 만들었고 그가 정식으로 창당한 재선반대당(Anti-reeleccionista)은 1910년 선거를 앞두고 민중의 지지를 얻기 시작합니다. 이때까지도 마데로의 계획은 정당한 선거를 통한 당선이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공식적인 시작일은 마데로가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 에서 공표한 1910년 11월 20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의 도화선은 이미 1910년 6월 유카탄 반도 바야돌리드(Valladolid) 시에서 뜻하지 않게 먼저 타올랐습니다. 마데로가 직접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땡볕이 내리쬐는 유카탄 반도의 농장에서 고통받던 마야 원주민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했습니다.
지금은 칸쿤처럼 해외에서 관광하러 오는 휴양지가 되었지만, 20세기 초 유카탄 주의 핵심 산업은 선인장의 일종인 에네켄(Hennequen)을 수확 가공하는 노동 집약적 산업이었습니다. 에네켄 섬유는 굉장히 질겼기 때문에 폭발적인 수요가 있었고 곧 "초록색 금"이라 불리며 유카탄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곳은 1905년 멕시코의 첫 한국인 이민자들이 일했던 한이 맺힌 지역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도착하고 나서야 원주민들이 워낙 많이 죽어나가서 자신들을 데려온 것임을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나중에 멕시코 혁명이 진행되면서 한국인들도 아시엔다에서 해방되었다는 정도입니다.
비록 1910년 무장봉기는 실패하고 주동자들은 메리다(Merida) 시에서 처형당했으나, 이 사건은 인종차별과 노동 학대가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유카탄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디아스 정권은 이를 마데로 일당의 소행으로 확신하고 마데로 체포 명령을 내립니다. 마데로는 잡혀 들어간 지 얼마 후 가석방되었지만, 그와 동지들은 더 이상 디아스 정권의 평화적 해결을 기대하지 못하리라 판단했습니다. 이에 마데로는 작업복으로 변장하고서 기차를 타고 산 루이스 포토시에서 텍사스로 도주, 1910년 10월 5일에 그 유명한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 을 발표합니다. 텍사스 선언이 아닌 이유는 국제관계상 마찰을 우려해서 일부러 그렇게 지었습니다. 도입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국가의 민중은 때때로 역사의 변곡점에서, 자유와 정의의 승리를 향한 노력 가운데, 최고의 희생을 강요받는 순간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은 바로 지금 그 시점에 도달하였습니다: 독립 이래 우리 멕시코인들이 겪어 본 적 없던 압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때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독재와 맞바꾼 평화를 받아들였으나, 그 평화의 바탕은 법이 아닌 권력이었으며, 멕시코 민중의 수치로 남았습니다...
- 프란시스코 마데로, 산 루이스 포토시 강령 (1910)
이 문서는 사실상 멕시코 제 2의 독립선언문과 같은 역사적인 위치에 있는 선언문이며, 민중에 대한 도리를 저버린 디아스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마지막 문장에서 "본인은 민중의 뜻을 받들어, 디아스 장군을 무력을 통해서 국민의 뜻에 굴복시킬 것"을 맹세했습니다. 무장 혁명의 주사위가 던져진 순간이었습니다.
몇 달 사이에 야당 대표에서 반란군의 수장이 되어버린 마데로는 일단 싸우기로 했으니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시우다드 후아레스 시(Ciudad Juarez)의 점령을 목표로 정했습니다. 그는 1911년 2월, 7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 북부에 위치한 카사스 그란데스(Casas Grandes) 시를 치러 갔는데 예상치 못하게 기차로 증원군이 도착하는 바람에 혁명의 첫 전투를 패전으로 기록하고 맙니다.
이 작은 전투에서 승패를 가른 철도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철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당시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았을 정도로 강력했고 멕시코 혁명에서도 마찬가지로 공격과 방어의 주요 목표가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현대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혁명 발발 당시 멕시코 땅에는 포르피라오 디아스 시절 건설된 20,000km 이상의 철도가 놓여 있었고 1차적으로는 사람과 물자의 수송을 위한 것이었지만, 전략적으로는 군사력의 즉각적인 투사를 이용해 반란을 진압하려는 목적 또한 존재했습니다.
반란군의 입장에서는 마찬가지로 철도를 확보해야만 돈과 무기를 받을 수 있었고 특히 엘 파소 - 시우다드 후아레스 경로가 미국 철도와 연결된다는 점을 이용해 무기를 계속 밀수했습니다. 그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데로의 정치인 시절 멕시코 순회공연을 가능케 했던 것도 바로 철도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혁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도에 의해 시작되고 끝난 현대적 혁명인 셈입니다.
비록 마데로 세력은 반란 직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가 1910년 쏘아 올린 선언은 조금씩 멕시코의 민중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