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라질소셜클럽 Nov 10. 2023

피의 쿠데타

혁명가의 최후

지난 이야기:


디아스 정권 31년의 독재에 저항의 깃발을 든 야당 대표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1910년 <산 루이스 강령>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혁명이 시작됩니다.


마데로의 정신에 고무된 비야, 오로조코, 사파타와 같은 혁명가들의 투쟁 끝에, 1년도 되지 않아 디아스 정권은 붕괴하였고, 1911년 11월 혁명의 주인공 마데로는 군중의 환호와 함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퍼레이드는 끝났지만, 혁명의 가시밭길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1. 비극의 시작

목판화,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


마데로 정권의 한계는 디아스를 몰아낸 다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잘못이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혁명 정부가 한 일이란 우두머리를 쳐냈을 뿐이었고 그 밑에 있던 많은 디아스 파 정치인들은 기득권을 뺏어간 마데로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지방 호족처럼 권력을 잡고 있던 대지주들(hacendados) 역시 마데로의 혁명을 경계했습니다.


여기에 당시 주멕시코 미국 대사였던 헨리 레인 윌슨(Henry Lane Wilson)은 마데로의 행보가 미국과 미국 투자자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판단해 그를 공개적으로 적대했으며 이후 멕시코에 벌어지게 되는 비극에 일조한 장본인으로서 멕시코와 미국 양쪽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는 내정 간섭의 아이콘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1913년 2월 9일,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사촌 펠릭스 디아스(Felix Diaz)가 육군사관학교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멕시코시티 무기고(Ciudadela)를 점령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반란군은 여기서 노획한 수천정의 총과 박격포를 가지고 틀어박혔습니다. 마데로 대통령은 우에르타 장군에게 진압을 명령했고 2월 11일, 명령대로 무기고 주변에 무차별 포격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 치욕의 역사 "비극의 열흘(Decena Tragica)"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치열했던 시가전


포르피리오 시절 지어졌던 멕시코 시티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금세 포격과 기관총탄으로 벌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만에 5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무기고의 반란군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거듭된 공격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 모든 파괴와 살상은 사실 우에르타 장군이 마데로를 끌어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반란군은 일부러 허술하게 쳐놓은 포위망을 피해 보급을 계속 받고 있었고 정부군은 제대로 공격하지 않은 채 애꿎은 건물들만 부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라면 수도가 박살 나고 민간인 몇백 명쯤 죽어도 괜찮다는 소름 돋는 발상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훗날 우에르타 장군에게 역사의 심판이 돌아오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정부의 시작 단계부터 우에르타는 마데로 같은 나약한 지도자가 멕시코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데로 대통령은 그럼에도 이 호랑이 같은 장군에게 반란 진압을 맡기는 최악의 수를 두었고 우에르타는 시작부터 반란군과 내통하며 마데로를 끌어내릴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2. 마데로의 몰락

치열한 시가전의 흔적


며칠간의 무의미한 소모전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미국 대사 윌슨은 태프트 대통령에게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내는 한편, 2월 15일에는 우에르타 장군 및 타국 외교관들과 짜고 마데로에게 퇴진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건 마데로가 보아도 명백히 선을 넘는 주권 침해였기에 그는 차라리 죽어서 실려 나갈 것이라고 버텼습니다. 이때 그가 믿었던 측근 상원의원들마저 돌아서는 것을 본 마데로는 아마 끝을 예감했을 것입니다.


2월 17일, 진전이 없는 포위전을 두고 마데로는 우에르타를 불러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따졌습니다. 우에르타는 맹세컨대 자신은 절대 배신할 인간이 아니며 24시간만 주면 상황을 종결하겠다고 대통령에게 빌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마데로가 이해한 뜻과 달랐습니다.


대통령 각하, 내일이면 모든 게 정리될 것입니다.
-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1911년 2월 17일


2월 17일, 임박한 쿠데타를 앞두고 윌슨 대사는 디아스와 우에르타 둘을 초청해 무기고에서 밀실 회담(Pacto de la Ciudadela)을 가졌습니다. 이것으로 우에르타의 쿠데타는 미국의 결재도장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으며, 조약의 내용은 72시간 내 우에르타 정권의 수립과 마데로를 끌어내린다는 합의였습니다. 마데로의 처리 방안 또한 논의되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회담 내용은 1913년이 넘어서 미국 내 특별조사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미국에 거짓 보고를 해가면서 쿠데타 세력과 짜고 적극적으로 정권 교체를 꾸몄다는 보고를 들은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경악하여 윌슨 대사를 바로 해임했지만, 이미 이 사건이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뒤였습니다.


쿠데타의 주역들: 몬드라곤, 우에르타, 디아스, 블랑켓


2월 18일 마데로와 그의 측근들은 간단하게 체포되었고 쿠데타는 종결되었습니다. 정치인이었던 마데로의 동생 구스타보(Gustavo)는 끌려가 20발이 넘는 총격을 맞고 잔인하게 처분되었습니다. 이제 혁명의 주역 마데로의 처리만이 남았습니다. 우에르타 장군과 윌슨 대사는 겉으로는 그를 투옥하는 척했지만 애초부터 살려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동생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무척 고통스러워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했습니다. 2월 20일 마데로는 옥중에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들이 과연 우릴 죽일 만큼 멍청할까? 만약 그런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죽음으로써 살아있을 때보다 더 위대해질 텐데 말이야.
- 프란시스코 마데로


2월 21일 밤중, 마데로는 결국 감옥으로 옮겨지던 중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공식 발표는 탈옥 시도를 저지하려다 터진 사건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근거리에서 권총 두 발으로 처형된 것이었습니다. 소식을 접한 마데로 추종자들은 우에르타 정권의 잔악무도함을 보고 복수를 다짐하게 됩니다. 죽기 하루 전 마데로의 예언대로, 그는 적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진정한 멕시코의 순교자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3. 철권 통치

악의 축,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


우에르타의 통치는 시작부터 마데로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반혁명체제를 추구하면서, 반대하는 세력은 누구든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습니다. 1913년 3월 치와와 주지사가 우에르타 정권을 승인하지 않자, 그는 부하들을 보내 총알 한 방으로 간단하게 해결했습니다. 심지어 동지였던 펠릭스 디아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재선에 출마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를 일본으로 파견 보내버렸습니다. 아마 가지 않았으면 그도 소리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멕시코에게는 다행히도, 베테랑 혁명가들이 가만히 앉아서 우에르타에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북부 코아윌라(Coahuila) 주지사였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가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멕시코 혁명의 주역들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판초 비야도 합류했습니다. 알바로 오브레곤(Alvaro Obregon) 장군을 필두로 한 북군은 치와와, 듀랑고, 시나로아를 점령하며 1년도 안되어 우에르타 정권의 존속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우에르타 휘하에는 50,000명의 정규군이 있었지만,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아 전투가 시작되면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때문에 지휘관들은 도망가지 못하는 방어전에만 주력해야 했습니다.




4. 사카테카스의 결전

El Grillo와 La Bufa 고지에 설치된 포대가 핵심 방어선이었습니다.


1914년 6월, 카란사가 지휘하는 20,000명의 군대가 사카테카스(Zacatecas)에 당도했습니다. 이 도시는 멕시코 시티로 가는 철도 관문이었기에 잘 훈련된 12,000명의 정부군이 고지에 포대를 설치하고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카란사는 커져 가는 비야의 인기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비야를 빼놓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후퇴하고 맙니다. 이에 열받은 비야가 카란사의 명령 없이 기병대를 이끌고 고지에 돌격하면서 사카테카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반란군은 이 전투에서 보병과 포병의 훌륭한 협동 전술을 보여주면서 차례로 북쪽의 Loreto, La Sierpe 고지를 탈환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의 포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쏟아지는 포탄에도 반란군 병사들은 La Sierpe 고지에 포대를 설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오후 1시, El Grillo 고지가 비야의 수중에 떨어졌고 오후 5시경 치열한 싸움 끝에 La Bufa 고지에 반군의 깃발이 걸렸습니다. 이제 사카테카스 방어군은 언덕에서의 포격에 완전히 노출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텐트에 들어가지 못한 병사들은 광장에 주저앉아 영원히 잠든 패배자들 옆에서 곯아떨어졌다. 별이 희미하게 빛나는 승리의 밤 아래, 삶과 죽음은 이 섬뜩한 꿈 속에서 서로 손잡았다. 나는 이날 밤 간만에 깊게 잠들었다.
- 펠리페 앙헬레스 장군, 사카테카스 전투 회고록


인접한 과달루페로 후퇴하는 도중 정부군은 기다리고 있던 반란군 소총수들의 표적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9,000명의 사상자라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시체가 너무 많이 쌓여서 나중에는 모아놓고 불로 태워야만 했습니다.


사카테카스 전투를 기념한 그림


사카테카스 전투의 완패로 인해 우에르타 정권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우에르타 장군은 1914년 7월 15일 사임 후 망명했습니다. 그는 후에 미국으로 들어와 재집권을 노리고 독일과 내통하던 중 발각되어, 투옥 중 텍사스에서 사망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파스쿠알 오로조코도 미국에서 망명 중 사망했습니다. 멕시코 혁명의 주역들은 이렇게 또 한 명의 독재자와 한 명의 혁명가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렸으나,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 04화 군웅할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