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피리아토 시대
들어가기에 앞서 16세기 스페인의 도착부터 20세기 혁명 이전까지 멕시코의 역사를 간략하게 추려봅시다.
1519: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테스, 베라크루스에 상륙
1521: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함락
1535: 스페인 식민 통치 시작 (누에바 에스파냐)
1565: 플로리다 개척
1592: 산 루이스 포토시 은광 발견
1610: 뉴 멕시코 개척
1716: 텍사스 개척
1821: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선언 (1제국)
1836: 텍사스 독립, 이후 미국으로 편입
1862: 프랑스군, 베라크루스에 상륙, 2년 만에 멕시코 점령 (2제국)
1867: 멕시코군, 프랑스로부터 멕시코 탈환, 공화국 수립
1871: 대통령 선거에서 Benito Juarez 당선
1877: Porfirio Diaz 쿠데타 성공, 이후 장기 집권
이 간단한 리스트를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가 굉장히 신생 국가라는 점입니다. 1519년이면 한국에서는 조선의 11대 왕이 다스릴 때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훈민정음, 경복궁, 경국대전이 모두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는 1800년대까지 스페인의 자원착취와 엄격한 카스타(casta) 제도에 근거한 인종 계급사회 때문에 안정된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으며, 독립하고 나니 유럽인, 유럽인의 후손, 혼혈인, 원주민, 흑인 등을 공통된 역사의식도 없이 하나로 모아야 하는 불가능한 숙제가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멕시코의 지도자는 누구든 약한 정당성과 정통성을 가진 채로 교회와 세속, 도시와 농촌, 백인과 원주민, 지주와 농민 이 네 가지의 첨예한 갈등을 조율해야만 했으며 그 결과는 머지않아 누군가는 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시위와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와 더불어 1900년대부터 철도, 인쇄술, 전보, 신식 총기와 같은 현대 문명의 도입은 혁명군의 모집부터 전투까지, 사회의 템포를 훨씬 가속화시켰습니다. 실제로 멕시코 혁명과 내전의 진행 속도는 한두 달 만에 승부가 결정 나고 판도가 뒤집히는 현대전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지도자들은 아차 하는 순간에 왕좌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멕시코는 1821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국 남부의 거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만한 지배력, 자금력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텍사스와 같은 알짜배기 땅을 모두 상실하고 오늘날의 영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멕시코에게 남은 땅은 비록 보기에는 커 보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북부의 사막지대와 남부의 정글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때문에 대다수의 인구가 멕시코시티처럼 해발 2,000미터에 달하는 고원지대에 몰려있다는 점입니다. 즉 무언가를 옮기고 수출하려면 도로와 철도가 한라산 높이만큼을 올라갔다 내려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지리적인 단점은 멕시코의 인프라 부설을 굉장히 어렵게 하는 주범이 되었고, 지방 격차가 심하게 벌어져 반란과 게릴라전이 계속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고로, 갓 독립과 전쟁이 끝난 어수선한 상황에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iaz)가 장기 집권한 것은 처음에는 좋은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불쌍한 멕시코, 신으로부터는 너무나 멀고
미국에게는 너무나 가깝구나!
포르피리오 디아스 (1830-1915)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62년 프랑스군의 침공 당시 포로로 두 번이나 잡히면서도 끝내 1867년 프랑스군에게 항복을 받아낸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선거에서 불만을 품은 디아스는 텍사스에 잠적해 있다가 1876년 군대를 끌고 멕시코시티에 입성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디아스와 그 측근들은 처음에는 멕시코의 발전을 진정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통치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권력욕을 버리지 못하고 31년이라는 긴 시간을 혼자 해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를 평가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성과는 그가 멕시코 사회에 절실히 필요했던 안정을 가져다주었으며 철도의 부설과 산업화, 투자 유치, 무역의 진흥을 급속도로 이뤄냈다는 점입니다. 디아스는 집권 후 유럽인의 후손인 크레올과 혼혈인 메스티소들에 각각 공정한 기회를 부여했으며 1900년대 초에는 전쟁으로 인해 빚더미였던 멕시코의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는 기적을 이뤘습니다.
비교적 안정기였던 이 시절에 멕시코의 건축과 예술이 크게 발전했고 주로 유럽풍을 따라서 지었기 때문에, 약간의 황금기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멕시코를 다니다가 웬 프랑스 궁전 같은 건축물이 보인다면 거의 이때 지은 것입니다. 음악 역시 프랑스 유학파였던 마누엘 퐁세와 같은 뛰어난 작곡가들에 의해 유럽의 사조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때까지 멕시코의 문화적 지향점은 아즈텍이나 마야가 아니라 프랑스였습니다. 다른 남미의 독립국가들도 물론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
독재를 하면서도 31년간 크게 문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수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디아스 정권은 비록 보여주기에 불과했지만 의회, 법정, 선거, 언론과 같은 민주적 틀은 보장하였고, 비밀경찰이라던가 살해 같은 강압적인 독재는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반대 세력끼리 서로 키워서 견제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디아스의 통치를 두고 "빵 아니면 막대기(Pan o Palo)" 라는 표현이 만들어졌습니다.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개는 짖지도 물지도 않는다.
- 포르피리오 디아스
말년에는 반대 정당들이 대놓고 활동하는 것도 크게 문제삼지 않을 정도로 대인배인 척을 했으나, 30년이 넘게 옥좌에 올라있던 그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였고 결국 산불처럼 멕시코 전역으로 번지는 혁명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 불리는 이 멕시코 근대사의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멕시코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수면으로 드러났습니다. 겉보기엔 파리를 옮겨놓은 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멕시코 시티를 벗어나면 완전히 곪아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로, 유럽인 혈통이었던 디아스와 집권 엘리트들은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원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했고 농업의 발전이나 토지 개혁 등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시골의 원주민들은 대지주 농장(hacienda)의 노예처럼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산업화와 부의 재분배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습니다. 이들의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 중국의 국공내전에서와 유사하게 농민들이 대거 혁명에 가담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산업화를 위해서 외국인, 특히 미국인 자본을 대거 들여오는 과정에서, 외국인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어 "양키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 이라는 비판이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수의 멕시코인과 외국인들만이 풍족한 삶을 누렸고, 1908년에는 66개의 상장 회사 중 36개의 이사진에 같은 13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극소수만이 산업화의 모든 부를 독점했던 것입니다. 이 엘리트들은 "과학자들(Cientificos)" 이라 불리며 나중에는 아예 정식 정당으로 활동했고, 독재란 국민성이 떨어지는 민중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발언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혁명이 시작되자 분노의 죽창을 피해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셋째로,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임금과 노동 환경을 전혀 개선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힘으로 찍어 눌렀습니다. 이는 1900년대 초 광산과 탄광에서 정부군이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하는 유혈 시위로 이어졌고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같은 혁명가들이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대하여 각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아스가 임명한 관료들과 사업가들이 고착, 세습화되면서 부패한 관리자들로 전락했습니다. 31년간의 독재는 줄만 잘 서면 되는 사회를 만들었고 능력주의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이 무능한 엘리트들은 장부 조작과 무리한 투자로 인해 멕시코의 성장 신화를 모두 깎아먹게 됩니다. 1910년이 되어서는 경제성장은 커녕 유럽으로부터 돈을 빌려오는 상황이 되었으며, 인플레이션은 50%에서 400%까지 달하는 수준으로 치솟았음에도 임금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나마 살 만했던 예전과 다르게 민생이 급격하게 나빠지자, 디아스의 통치에 불만을 제기하는 세력들이 급증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디아스의 측근들도 70세가 넘은 예스맨들로만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디아스의 귀에는 좋은 말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1908년이 되면서 민심은 점점 디아스를 떠나갔으나, 백발의 노인이었던 디아스는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대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나이 때문에 후계자의 지명에 대해서도 많은 추측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2월 디아스는 피어슨스 매거진이라는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합니다. 여기서 그는 갑작스런 중대 선언을 하게 되는데...
나는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다른 정당의 출마를 환영하며,
이번 임기가 끝나면 재선에는 나오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하겠다.
디아스 반대 세력들은 이 인터뷰 내용을 읽고 나서 혹시 고도의 전략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스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은퇴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인터뷰 내용을 흘린 다음 반대 세력을 일망타진하려는 전략이었다면 몸을 사리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달 간의 침묵이 흐르고 아니나 다를까 디아스는 재선에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의 민낯이 드러나자 반대 세력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디아스는 30년이 넘도록 지속된 그의 체제에 금이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했으나, 역사의 톱니바퀴는 이미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