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은 해야 한다
예전 글인 "인도인은 승진하고 한국인은 못 하는 이유"에서 가볍게 다루었던 내용인데, 오늘은 좀 더 직접적으로 한국 문화의 무엇이 미국 직장과 안 맞는지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다음 중 둘 이상에 해당하면서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권 국가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은 필독을 권합니다.
- 내성적이고 조용한 편이다. (INFP, INFJ 등)
- 여러 명의 사람들과 있으면 말을 잘 안 하는 편이다.
- 남이 했던 말이나 내가 한 말에 대해 자주 곱씹어보고 고민하는 편이다.
- 부모님, 선생님, 선배, 상사의 의견을 반박하거나 거슬러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럼 실전 문제풀이로 들어가 봅시다. 당신은 꿈에 그리던 미국의 대기업에 좋은 조건의 연봉과 비자, 영주권 스폰서를 받아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나이와 경력을 고려해서 직위도 신입사원, MBA들을 관리할 정도의 중견 매니저가 된 것입니다.
오늘 당신은 입사한 지 3개월이 지나 당신이 맡은 프로젝트를 중간 점검하는 미팅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보고를 받는 위치에 있는 시니어 매니저 2명은 서로 사이가 안 좋으며, 그중 한 명이 당신의 프로젝트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며 팀을 까내리는 듯한 발언을 합니다.
미팅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본능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A: 일단은 말을 최대한 아낀다. 시니어가 물어보더라도 미팅에서 직접적으로 정정하지 않고, 뒤에 조용히 따로 만나서 해명한다.
B: 시니어가 나에게 발언권을 주는지 일단 기다려보고, 기회가 돌아오지 않으면 따로 만나서 해명한다. 발언권이 주어진다면 간접적으로 시니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돌려서 표현한다.
C: 그 자리에서 손을 들고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고, 팀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없음을 해명한다.
이 문제는 실제로 아마존 같은 대기업 입사시험에서 물어보기도 하고, 미국 직장생활을 하신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일입니다. 즉 업무적인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처리하냐는 문제이고 정답이 있는 문제입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셨나요?
A나 B라고 답한 분들은 한국 회사생활에 맞는 답을 하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더 맞습니다. 상사의 감정을 건드렸다가 괜히 나 개인이나 팀에게 불이익이 갈 바에는 충돌을 피하고 기분 나쁜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기업에서는 이런 선택은 오답으로 간주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은 고등학교, 대학교부터 공개석상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자유롭게 지적하고 논박하는 토론 수업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회사의 미팅에서도 (제대로 굴러가는 회사라면) 서로에게 필요한 질문을 하고 의견에 대해서 피드백을 들으며,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반박할 것은 반박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했어야 하는 말이 있는데 굳이 공개석상에서 하지 않고 뒤에 가서 1:1로 하겠다는 것은 토론을 피하겠다는 자세로 보이며 뭔가 떳떳하지 않은 것 같은 오해를 살 수가 있습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에서는 사칙에 아예 Obligation to dissent(반대할 의무)라고 해서 아무리 신입이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못 박아놓고 있습니다. 미팅 시간을 준 이유가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낭비하지 말라는 주의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you're wrong이라던지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것도 올바른 행동은 아닙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은 적절한 뉘앙스를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평소에 회사에서 사용되는 표현들을 잘 메모해 두었다가 사용하면 좋습니다. 한 가지 팁이라면 일종의 쿠션을 사용하면 됩니다. 커뮤니케이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 긍정 + 부정 + 긍정과 같이 앞뒤로 긍정의 표현이 들어갔을 때 가장 수월하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쿠션 표현 예시)
당신이 얘기한 내용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You're not wrong, but...)
당신의 말도 일리는 있다. (You have a point / You bring up a good point...)
당신이 아까 한 말이 이런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I want to double check / align on what you mentioned earlier...)
우리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부연설명을 하고자 한다. (I want to elaborate / clarify so that we are on the same page...)
이건 어느 나라나 공통이겠지만, 아랫사람을 제대로 챙기거나 지켜주지 않는 매니저는 좋은 매니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명하복, 연공서열 문화가 존재하는 동아시아에서는 "어릴 땐 좀 깨지고 불합리하고 그럴 때가 있는 거야"라고 어느 정도 순응하는 분위기입니다. 신입이 깨지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담배 한 대 피우고 박카스 마시고 다시 일하러 들어갑니다.
반면 이직이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불경기가 아닌 이상 승진을 기다리며 버텨내는 주니어는 드물며, 내 직속 매니저가 계속해서 불합리한 상황에 항의하지 않고 당하고만 있다면 직접적으로 따지거나, 위에다가 클레임을 걸거나, 그냥 나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회사에 당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낼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매니지먼트로부터 팀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거나 되려 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행위를 "throw under the bus"라고 부르며 최악의 배신이자 무능으로 간주합니다. 버스를 막아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아랫사람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윗사람에게 어려운 얘기를 못하겠다고 내 팀을 희생시키거나 과소평가하는 일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전쟁이라면 이런 상관은 병사들이 적지에 버려두고 나와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결론: 한국인들은 미국회사에서 갈등을 최대한 회피하고 위계질서를 불필요하게 존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식 사회생활은 매니저 윗급으로 승진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며, 아래 직원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조용한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으로 전락하기 딱 좋습니다. 한두 명 감정 상하지 않게 하려다가 더 큰 일을 그르치는 사람은 좋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같이 보면 좋은 반도체 엔지니어 담낭이님의 미팅 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