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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옥미 Apr 01. 2023

고맙다 샛별유치원

갈 수 없지만 그래서 고마운 곳. 

  



“너 샛별 유치원 다녔잖아”

 “어떻게 그걸 기억해?”

친구가 놀라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왜 친구 유치원 이름을 오랜 세월이 지나 50이 넘은 이 나이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고등학교 1학년 내 단짝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삶에 대해 고민하는 진지함을 가진 남 다른 아이였다. 친구 집에도 자주 놀러 갔고 그 친구가 전도해서 교회도 다니게 됐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과는 결이 많이 달랐던 친구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상에서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구보다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흐르는 대로 살았을 인생이었다. 동경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로 좋아했고 자랑스러운 나의 인생 친구다. 


친구를 만난 후 생각해보지 않았던 삶의 질문이 나에게 쏟아졌다. 그때였나 보다. 세상 고민과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듯한 버거운 상념가가 된 때가. 


친구가 다녔던 유치원 이름을 왜 기억하고 있을까?     

친구와 친해지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중 어릴 적 살던 달동네에서 좀 떨어진 옆 동네에 친구가 살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친구는 자기가 다녔던 유치원 이야기를 했다. 

 "유치원이라고?"

내 또래 친구가 조카들이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란 곳을 다녔다는 것에 이질감이 들었다. 좀 과장한다면 믿기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유치원이란 곳이 있는지도 모르고 컸던 난 친구가 다녔다는 샛별 유치원이 왜 이리 부러웠는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은 유난히 강해서 가난하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유치원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유치원 다니지 못한 것이 무슨 부끄러워할 일이고, 자존심 상할 일인가 싶은데 그때는 세상의 차등한 삶에 대해 알지 못했던 어린 나이였고,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무지했다. 내가 처한 곳만 보고 사는 사람에게는 그 세상이 전부라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난 우물 안에 개구리였었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유치원이 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을까? 가보지 못한 유치원, 유일하게 알았던 유치원 이름인 샛별 유치원은 어쩌다 내 인생에 몇 번 되지 않은 거짓말에 강하게 등장한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샛별유치원에 다닌 적이 있다고 거짓말한 단 한 번의 기억이 샛별유치원을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게 했다. 


그만큼 못 배우고, 못 먹고, 잘 입지 못하는 콤플렉스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며 있는 척, 아는 척하며 지탱하게 했다. 겨울에 코트가 없어서 얇은 카디건 하나로 버틸 때도 많았고, 새 옷을 입는 일은 명절에 한두 번 정도였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뭔가 아는 척이라도 해야 했고, 고상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내 삶이 부정당하지 않은 느낌이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었다. 돌아보니 버둥거리며 많이 애쓰며 살았던 시간이 측은하다.


다행인 건 이런 애씀이 그리 내 삶을 풍요롭게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면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의 여유, 작은 것에 감사하며 행복해 할 수 있게, 그렇게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직장을 다니면서 얻는 경제적 자유와, 한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지지와 사랑이 채워지니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주 작아지는 경험을 하게 했다.

 

지금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리 부유하고 만족스러울 수 없는 삶이지만, 내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알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 흔한 명품백 하나 없다. 가벼이 뭐든 넣고 다닐 수 있는 에코백을 제일 사랑하고, 비싼 레스토랑보다 삼겹살 잔뜩 사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시끌시끌 거리며 배불리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지금은 거부할 수 없는 세월의 주름과 늘어나는 몸무게가 야속하기만 한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버렸지만 마음만이라도 우아하게 살아보자 하는 마음은 변치 않기에 자유로움 속에서 똑바로 우아하게 걸으려고 애쓰고 있다. 


뒤늦은 학구열을 불태우며 42살에 신학대학, 대학원까지 7년의 과정을 한 걸음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어느 누구도 유치원 다녔는지 묻지 않는다. 어쩌면 의미 없어 보이고 부정당하는 감정으로 소진했던 내 인생의 샛별 유치원이 나의 구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보지 않았던, 결코 갈 수 없었던 샛별 유치원이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아닐까? 


누구에게나 샛별유치원 같은 곳이 있을 것이다. 가보지 못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이름이지만 동경하는 마음과 바람을 담아 지금 이 시간을 보낸다면 새로운 나의 샛별 유치원을 만나게 되겠지? 


그래서 고맙다. 나의 샛별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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