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일하는 곳의 높은 누군가가 자신을 경멸한다고 했다. 칠흑빛 머리칼과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경멸했고, 예민한 성격과 조용한 말투도 못마땅해한다고 했다. 거기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갈하고 예쁜 손톱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함께 있는 것뿐이에요.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사랑해 줘요. 그럼 당신에게도, 저에게도 된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이 연한 색 카펫에 흘린 와인의 얼룩 같았다. 수긍을 하면서도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사랑이 뭐 별 건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확신이 없으면 불안이 등위로 타고 올랐다.
전문가가 와서 카펫에 묻은 와인의 얼룩을 지웠어도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얼룩이란 그렇다. 마음속 얼룩이 된 그녀의 말은 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손을, 손가락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가슴이 뛰었다. 그녀 없이 생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혔다. 꽈배기를 만원 어치나 사 왔다. 물도 샀다.
나에게는 모험과 같은 일이었다. 우리가 갔던 시장에 꽈배기가 팔지 않아서 시장을 벗어나 다른 지역까지 갔다 왔다.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퀵 보드와 오토바이는 인간의 생명을 보다 좀 더 단축시키기 위한 수단 같았다. 사람들은 물론 나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지만 나는 그들이 신경 쓰였다. 이러다가 혹시?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스페이스를 눌렀다. 다음 장이 되었다. 나는 잠이 들었나 보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잠에서 깨어나서 그런지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 초인종의 소리는 마치 비디오드롬 속 욕망이 만들어낸 기묘한 환영 같았다. 나는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스페이스는 또 다른 스페이스인 것이다. 하나는 스페이스바이며, 하나는 말 그대로 스페이스다. 기기묘묘한 공간.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나 역시 초인종을 누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초인종 소리를 나는 처음 들었다. 돌고래가 아프다고 내는 소리 같았다.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녀를 알고 있는 첫 남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다 안다는 표정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서 나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자연스러운 적막이 덮쳤고 고요로 이어졌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왔겠지만, 아직 그 말을 꺼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긴 적요가 불편했다. 나는 꽈배기를 그에게 권했다.
[그렇잖아도 배가 고픈 것 같군]라고 하더니 꽈배기를 한 입 베어 물고 우직 우직 씹어 먹었다.
턱 근처가 말의 뒷다리 근육처럼 움직였다. 정말 배가 고픈 것이다. 하나를 먹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두 개, 세 개를 먹었다. 꽈배기 여섯 개 중에 반이나 남자가 먹었다. 하나는 서비스로 받은 것이었다. 먹은 자리에는 설탕가루가 떨어졌다. 걸레로 닦아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머지 꽈배기 세 개는 당신이 먹어야 할 거요. 아닌가? 먹지 못할지도 모르겠군]라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에게서 평범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감지되었다. 그건 불행과 비슷하다. 모르는 남자가 그녀의 집으로 불숙 들어왔다는 것부터 불행의 시작과 같은 것이다. 다행이라면 나와 그녀처럼 비번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다, 어쩌면 비번을 알지만 내가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초인종을 눌렀을지도 모른다.
너 같은 뭘 모르는 녀석에게 초인종의 소리를 들려주마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불운한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불운하지만은 않은 확고함도 있었다. 낮은 톤의 목소리에는 유리조각이 긁히는 듯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꽈배기를 먹기 전에 비해서는 좀 나아진 목소리였다.
[리사가 사라졌소]
남자가 말했지만, 사라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 말을 하기 위해 여기까지 기묘한 남성은 온 것이다. 그렇다는 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것보다 그녀의 이름이 리사? [사라졌다는 말은 말 그대로 사라졌다는 거요. 이 집에서 나가서 다른 곳으로 가버린 아니라,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완벽하게 사라졌다는 말이오] 말을 들을수록 미궁으로 빠졌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는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그녀는 항상 나에게 표정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에게 나는 여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나는 표정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꽤나 눈치가 없군요. 리사가 평소보다 늦어진다는 걸 느끼지 못했소?]
남자의 말투는 요즘에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말투다. 그러고 보니 잠이 들었지만, 그 사이에 리사는 벌써 집으로 와야 했다. 그녀의 이름도 몰랐는데 리사라는 이름이 조금 이질감이 들었다. 리사의 얼굴은 리사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았다. 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소. 그저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이름이지. 리사도 받아들이고 말이야] [사라졌다는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나는 물었다.
[드디어 말을 하는군. 리사가 말한 대로야]라며 껄껄하며 남자는 웃었다. 하지만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다.
[리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지. 나의 역할은 그것이니까]
결론적으로 리사는 출근하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로 사라졌다. 남자는 결론부터 시작했다. 리사가 일하는 곳은 남자들의 해우소 같은 곳이다. 출근을 하면 선택을 받아서 작은 방에서 일처리를 해준다. 주로 손을 사용한다. 그곳에 오는 손님들은 거의 백 프로 남자이지만 어쩐 일인지 가끔 여자가 오는 경우가 있다. 여자도 여자에게 서비스를 받기를 원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회사(라고 해서 미안하지만)에서는 생각했다. 가끔 오던 여자 손님은 항상 리사를 지명했다.
리사는 타고난 손 덕분에 인기가 좋다. 얼굴을 보는 손님도 있지만, 그런 손님은 대체로 젊은 남자들에 속한다. 시각적으로 흥분이 되어야 하는 남자들 말이다. 하지만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고 나이가 든 남자들은 그렇지 않다. 보통 직원(은 전부 여자다)이 출근하면 18시간 정도 상주한다. 퇴근하면 이틀 정도 쉬고 출근을 해서 18시간 정도 근무를 한다. 물론 지명이 많으면 돈도 많이 번다. 하지만 그만큼 힘들다.
리사는 쉬는 시간에 주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리사가 집에서 16시간씩 잠을 자는 이유가 일이 힘들어서다. 리사가 힘든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최고 매니저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매니저는 리사를 경멸하고 있었다. 경멸이 불러일으킨 리사에 대한 미움은 확대되고 확대되어서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리사는 조용했고 시키는 일이 힘들어도 묵묵히 했다. 리사는 테크닉이 있었다.
괴롭힘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때 리사는 손님으로 온 여자를 알게 되었다. 아마 리사가 사라지는 것에 도움을 준 사람이 손님으로 온 여자일 가망성이 높다. 이 부분은 남자의 추측이다. 그러던 중 매니저가 리사에게 함께 지내는 남자까지(이 남자가 나를 말한다) 괴롭히겠다고 언포를 놓았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나를 처치하러 온 사람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 앞의 이 남자는 리사 편이었다.
남자는 리사가 오기 전부터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담당이었다. 리사는 남자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고, 리사는 얼마 전부터 이 세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리사에게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리사를 믿는 사람이었다. 남자에게는 딸이 있었다. 엄마가 없고 초등학생 때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리사가 돌봐 준 적이 있었다. 그때 딸이 리사를 잘 따랐다.
남자는 그 덕분에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나는 지금 현재 이 집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 리사가 말도 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자에게 대신 전하게 한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리사는 누군가(여자 손님)의 도움으로 다른 세계로 사라졌기에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단지 매니저가 리사를 경멸하는 것 이외에 회사에 대한 거대한 음모를 리사가 알고 있다.
그걸 리사가 끌어안고 사라졌다. 다시 한번 사라진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 아니라, 이 세게에서 사라졌다는 말이다. 남자는 나에게 폰을 하나 건넸다. 내가 가지고 있는 폰은 없애라고 했다. 회사는 보기보다 조직이 탄탄하니, 폰 도청 같은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
[어딘가로 가서 나의 연락을 기다리시오] 남자는 말했다.
[그렇게 하면 리사를 다시 만날 수 있나요?]
[그건 내 입으로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아. 리사가 당신에게 주라고 한 물건이 있소. 이걸 잘 간직하라고 했소]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주었다. 열쇠는 일반 열쇠보다 조금 컸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르오. 나도 연락을 기다릴 뿐이오]
남자는 해야 하는 말을 다 한 것 같더니 그대로 일어나서 문으로 나가버렸다. 남자는 나에게 빨리 이 집을 나가라고 했다. 남자가 나가고 나니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남자를 따라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남자의 터무니없는 말을 무시하고 집에서 리사를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본격적으로 고독해졌다. 나는 혼자가 된 것이다.
그동안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들어맞았다. 그녀의 정갈하고 예쁜 손톱을 보고 싶었다. 일어나서 가자. 그녀를 다시 봐야 한다. 그녀도 내가 찾아주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도 나를 나 못지않게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리사를 찾자,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