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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Oct 23. 2024

[동화] 6. 마음숲(1) 치매

모든 기억과 감정은 저장되어 숲을 이룬다

제가 일반글을 정식으로 써보기가 브런치가 거이 처음인 데다가, 동화도 이번에 처음 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요.


머릿속에 재밌는 아이디어들을 글로서 체계적으로 써 내려가야 하는데, 이번주는 특히나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데, 섬세한 글로 쓰려니 시간도, 여건도 따라오질 못하네요.


아아디어가 날아갈까 봐, 틈틈이 메모하듯 써놓으니 점점 길어졌어요. 메모한 것 중 뒤에 것은 <불 프라이팬>으로 잘라서 7회에 발행할 텐데요, 정의의 실현이 그 주제일듯해요.


브런치에 연재하는 동화는, 글로 치면 초안 중에 초안이란 생각으로, 스스로 버겁지 않게 글 발행할게요. 부담이 커지면 글 발행 자체를 꺼릴까 봐, 우선 제 자신의 동기부여를 위해서라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먼 훗날 이 초안들을 이리저리 다듬는 작업을 수십 차례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가 내일부터 일이 있어요, 발행일자를 며칠 앞당겨서 올려요. 동화적 상상 아주 신비롭네요 :)










05화 [동화] 5. 허무산의 소리

다솜이는 요정 아자린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그럼 망자의 산은 투덜나라에 있으면 되는 돼, 왜 에코나라에 있어요?"

"음.. 원래는 투덜나라에 있던 산을 큰 값을 치르고 에코나라로 옮겨 온 거지.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너무 쉽게 포기해서, 허무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하려던 거였지"

"아, 그렇구나.. "

허무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과 허무를 견뎌내는 사람들을 보는데, 다솜이는 문득 '나는 어디에 속할까?' 질문이 밀려들었다.

이 땅에 삶이 덧없고 견디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 이 작은 아이는 너무도 이른 시기에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매일 커다란 돌을 이고 사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점순할머니 마음


30년 된 단독주택, 거실 격자무늬 창으로 그윽한 햇살이 따뜻하다. 포근한 이 빛이 이리 저리도록 불안한 건 왜일까. 남들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더 많이 본다는 건 단어가 모자라의미일 게다.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세월, 남들이 입어보지 못한 추억, 남들이 찢어보지 못한 심장 저 밑바닥의 뭉켜있는 감정들 말이다.


어려서, 시간은 여름철 장마처럼 느리고 오래된 거적때같았다. 빨리 이 시절이 종례시간을 맞으면 이내 찬연한 자유와 풍요로운 언덕위 정찬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 실낱 같은 묘령의 희망을 행복 삼아 견디고 또 견디며 살아냈다. 그 설레는 등불을 비추고 마음에 허다한 언어를 고이 담고 머리에 이어, 기어이 70고개를 넘어 이젠 80고개를 남기고 있다.


손주 규동이네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걸어서 20분은 족히 넘는 거리에 살고 있다. 문득 며칠 전 주말이라며 오랜만에 른 딸과 사위 그리고 규동이가 남기고 간 소란이, 월요일 오전 애처로운  그리움을 더욱 부추긴다.


좀 더 있다 가라 할걸, 그 을 디딤 삼아 마음은 고향 버스를 타고 8살 고향집에 닿아버렸다. 그립고 그립단 말만이 목구멍 가득 채워지는가 싶다가는, 극심한 외로움에 사무치는 통증이 살결 위로 돋는 듯하다.  투정 다 받아주던 어머니, 굵은 힘줄 보이며 무등 태워준 아버지, 오빠, 언니들 생각에 불현듯 회한이 사무친다.


영원할 것처럼 무심히 보내버린 소한 시간들이 아쉽고 미안하다. 삶이 극악스럽게 모진 것은 그 모든 것을  '일상'이란 이름으로 폄훼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천륜의 관계도, 정량적 시간의 촘촘한 하루도, 생명의 유한함도, 소멸의 절대성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사소하게 만들고 만다. 일상이 삼켜버린 자리엔 더 주지 못한 사랑, 효도, 우정, 인정 등 숱한 회한만 남겼다.


'인생이 이리도 속절없이 유한한 것을, 한번 가면 한 뼘 육신으로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을..'

 

점순할머니는 점멸하는 마음의 전등을 느끼듯 몸서리치듯 자주 슬픔에 침잠되곤 한다.



요즘 부쩍 헛헛한 마음에 감기 몸살을 달고 사는듯 무기력하고 자주 침울하게 가라앉곤 한다. 집을 지척에 두고도 근 2주 만에 보게 된 딸아이 선주,  애를 임신했던 그해 작렬했던 여름처럼 지난 주말도 후덥지근했다.


딸은, 건강 어떠시냐고 묻고는 이내 부엌 싱크대에 서서 가지고 온 반찬거리를 풀었다. 아마도 재래시장 반찬가게에서 사 온 듯하다.


규동이는 엄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유튜브인지 만화인지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점순할머니는 규동이 어깨 너머에서 지긋이  말을 걸었다.


"규동아 요즘 공부는 어때?"


"응, 할머니. 힘들어. 학원 4개나 다녀. 할머니가 엄마한테 학원 좀 줄여달라고 해줘. 알겠지?"


규동이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 다. 사위는 머쓱한 얼굴로 몇 마디 건네나 이내 거실의 TV를 함께 보았다. 선주는 깔끔한 성격이라, 부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일회용 용기와 페트병을 치우며 짜증이 올라오는 게 역력했다. 그 순간 규동이가 들고 있던 딸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선주는 부엌에서 부산스럽게 거실로 건너와, 물기 젖은 손을 급한 대로 청바지에 닦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은경아. 어, 거기 알지. 나도 요즘 야근에 주말근무에 정신이 없다, 오래간만에 하루 다 비웠어. 응. 은진이도 온다지? 그래. 엄마네 잠깐 들러서 부엌일 봐주고 바로 종로로 갈게.


남편도 골프동호회 모임이 서울에 있어서, 나 데려다준다 했으니 자차로 한 40분이면 될 거야. 이럴 때는 경기도에 사는 게 참 그렇다. 알겠어. 이따 봐."


선주는 핸드폰을 규동이에게 다시 주곤, 팔목 뒤로 돌아간 손목시계의 시침을 끌어와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매사에 정확한 아이였다, 키우는 내내 손이 많이 갔지만, 이내 이루려던 일을 이뤄낸 야무진 딸이었다. 


말수가 적은 사위는 딸이 아온 사과를 먹으라며 내쪽으로 접시를 살포시 밀었다. 쟁반이나 소반바쳐올 여유도 없이 작은 거실바닥에 편하게 내온 우윳빛 유리 접시 위의 사과,  선주 아기 때 자주 만지고 입을 맞췄던 그 고사리 손이 깎아낸 작품인 것이다. 순간 점순할머니 눈가엔 옅은 눈물이 주름 따라 그렁거렸다. 무심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소매깃으로 사소하게 눈물 줄기를 막아섰다.


2주 만에 집에 온 지 2시간도 안돼, 조용한 듯 소란스럽게 예를 다해 나름 자식의 의무를 다하고 간 딸네 가족.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이리도 삶이 헛헛할 수가 없다. 시간마다 쩌릿쩌릿 통증이 올라오는 다리 관절염과 계단 오르내리기도 무서운 불안한 몸뚱이를 보며  생각한다.


'벌써 시골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들 절반이상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살아온 세월이 쌓이면, 인생이 보험처럼 안심될 줄 알았던, 그 순진한 기대가 산산조각 난 것은 이미 오래다. 이 인생이란 가혹한 무게를 견뎌야 하는 하루가 불안하다. 내어준 사랑일랑 다 받을 마음은 아니었다만, 먹고살기 바쁜 딸내미의 인생이 안쓰러우면서도 서운하다.


스스로, 내 재벌 엄마도 아니니 그 서운함도 '안 와도 게안타. 너희 잘 사는 거 보면 그걸로 족하다' 며 마음에 없는 말만 되뇌었으나 실은 하루하루 지독히 외롭다. 뭣하러 그리 열심히 자식을 키웠는, 뭣하려 그리 서방님 서방님 남편 뒷수발 했는가. 아니 뭣하러 70 넘어서까지 살아, 이젠 몸뚱이마저 나를 배신하고 날마다 말을 안 듣는 꼴을 는가 말이다.


딸아이가 시집가기 전엔, 인생이 버거워도 남편도 있고 촉망받는 아이와 더불어 호사스러운 미래에 마음이 탱글탱글 했었건만, 헛된 기대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찬란했던 추억이 도리어 더 가슴 시리게 아프다. 정 주지 말고 곁을 내주지 않았으면, 자주 오지 않는 발걸음 탓하거나 외롭게 궁상떨지도 않으련만, 이 말짱한 추억의 기억들마저 원망스럽다. 과거 없이 덩그러니 이 현실을 마주하는 편이 나을까. 그냥 산소탱크에 의지해 숨만 쉬는 기계 같은 삶이 차라리 나을까.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나마 남은 생의 에너지마저 착취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점순할머니 곁 요정들



웽웽웽.

점순할머니 주위를 날아다니는 요정들은, 할머니의 헛헛한 감정들 중에 무엇이 좋은 감정이고 나쁜 감정인지 분리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그리움은 좋은 감정일까, 나쁜 감정일까.


평소 수다가 낙인 요정들이건만 잠시나마 웽웽거리는 날갯짓 소리만 가득했고 엄숙하게 고요했다. 설명충 요정들은 이내 너나없이 성토하듯 말을 토해냈다.


"(요정) 이천일. 점순할머니 얼마잖아 또 허무산에 오시겠어"


"그러게 말이야. 저번에 왔을 때도 자기 생명 1년을 비용으로 지불하고 1년 치 기억을 삭제하고 갔잖아"


"내 말이. 그것도 딸아이와 가장 행복했던 신혼시절 기억을. 심지어 최근에 손주 규동이가 상 받았던 날 기억도 지웠잖아."


"그야, 그날 딸이 할머니가 자꾸 깜박거리고,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해만 세 번째 태워먹으니 언성 높이고 짜증을 크게 내서 그랬지."


"아니, 인간들은 왜 그런 거야? 나이 들어 지들은 노화가 안 올까 봐 그래. 왜 직장 상사에게 혼난 걸 혼자 사는 어머니한테 화풀이를 하냐고"


"그러게. 또 할머니가 좀 착해? 속상해도 대꾸도 못 하고, 그날도 밤새 끙끙 앓다 몸살까지 왔잖아"


"진짜 생각 같아선 불효녀, 불효자들은 다들 불 프라이팬에 올려 몇 바퀴씩 돌리고 싶다니깐"


"(요정)오억 일. 쉿! 그건 요정 답지 못한 단어 선택이야. 불 프라이팬은 투덜나라에서도 악질적인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인데, 악담도 참."


"할머니가 기억 삭제를 많이 요청해 이젠 치매가 꽤 심해지고 있지. 딸네 가족도 치매 간병하며 마음 고생하다 보면 그간 자신이 소홀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교정되지 않을까?"


"그래, 그걸 기대하는 거지. 인간이란 고통 없이는 자신이 경솔하게 하는 말과 행동, 부족한 감정을 돌아보기 힘들 테니깐. 할머니가 좋은 기억까지 포기하며 기억을 과도하게 삭제 

하는 게, 너무 안타까워."


"노년에 이런 대접 받으려고 그리 고생했다는 게 얼마나 억울하고 한탄스럽겠어.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됐는데, 아무리 바빠도 자주 대화 나눠주고 그러면 좀 좋아"


"에고, 30~40년 후엔 자식인 그들도 동일한 길을 걸을 텐데. 자주 보는 인간들의 삶의 궤적이건만 매번 마음이 슬프고 어렵다. 빨리 작업 끝내고 돌아갑시다. 힘내요!"


요정들과 난쟁이들은 작업을 마치고 늘 그렇듯 벽면에 손을 대고 1000 광년의 속도로 에코나라로 건너갔다. 빛의 속도와는 비교 불가인 빠른 공간이동인 것이다. 얼핏 보기엔 마치 벽면을 사이에 두고 차원이 다른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2차원의 면이 있는 곳은 요정과 난쟁이들에겐 모두 입구이며, 출구인 것이다. 모두 떠나고 요정 일천구만이 바닥에 떨어뜨린 물건을 치우고 있었다.


동일한 시공간에, 전혀 다른 생명체와 전혀 다른 인생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에코나라 백성들에겐 늘 애잔한 신비를 남겨 주곤 한다.





다솜이와 노신사


한편 허무산을 다시 찾은 다솜이는 이번엔 구름을 타곤지 요정 덕분인지, 어느 숲 속에 도착했다. 나무마다 액자 크기의 미니 TV 들이 붙어 있었다. 이 나무들은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양분으로 자란다고 한다.  중에서도 좋은 기억, 좋은 감정만을 흡수한다고 했다.


나쁜 기억은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요정 아자린 옆에 따라붙은 하얀 생쥐가 말했다. 


"그건 다른 곳으로 포장해서 택배로 보내면 돼요!"


다솜이는 자신이 아이지만 너무 어린이 같은 답변에 실소할 뻔했다. 어떻게 감정과 기억을 포장해서 택배를 보낸다는 거지,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은 척 숲을 거닐었다. 


아자린은 하얀 생쥐가 무안할까, 조심스레 소개했다.


"다솜아. 에코나라의 택배청 국장 윌리엄이야. 피어링족이라고 세계와 세계를 잇는 모든 역할을 한단다."  


"아, 엄청난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 다솜이예요"


인사를 나누고 다시 한참을 가는데, 마더스 가든(어머니의 정원)이란 곳이 보였다. 그곳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수집해서 기념하는 곳 같았다. 마더스가든을 지나 오솔길이 나있었다. 그 길은 허무산의 망각샘으로 빨리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인간은 나이 들고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억이 지워진다 했다. 다만 허무감에 깊이 빠져있는 이들 곧 허무산에 오르는 이들에게 하나의 특혜가 있는데, 자신의 기억들을 하루 단위로 삭제요청을 할 수 있다 점이다.


요정 이자린은 이 대목에서 난감하고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게 치매야!"


다솜이는 눈을 땡그랗게 뜨며 물었다.


"기억을 인간이 요청해서 삭제할 수 있다고요? 그게 치매라고요?"


다솜이 할머니도 요즘 들어 기억이 깜박깜박했던 터라 숨을 몰아쉬며, 아자린과 윌리엄의 대화를 더 파고들었다.


"고체족속들은 매정하고 이기적이지. '바쁘다'를 외치면서도 자기들 할 일은 다 . 부모님들이 나이 들어 마음이 헛헛하고 서러움과 삶의 짐에 짓눌려 병이 들 때 즈음 더 바쁘다고 소란이지"


"그러게. 연애한다, 결혼 후엔 애들과 해외여행이니 놀이동산 간다느니. 심지어 부모님들이 너무 노쇠해 병이 들면 도리어 방문도 잘 안 하는 이들도 있어."


"맞아, 맞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느끼는 고독과 허무의 고통, 실망의 고통은 굉장히 무거운데 말이야. 요즘은 나이 들어도 사업 망한 자식, 손자와 손녀 교육비를 위해 리어카를 끌어야 하는 폐지 줍는 어르신들도 많지."


"그런 분들은 실은 하루하루 빨리 죽고 싶어 하잖아. 죽고 싶지만 살아내야 하는데, 옛날의 좋은 추억을 생각하면 현재가 더 서글픈 거야. 자주 찾아오지 않는 자녀들과 손녀들이 야속하면서도 삶을 견뎌야 하는 , 어떤 서글픔인지 모를거야."


"그러니깐, 최근 들어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 둘 지워달라는 노인들이 폭증하는 거잖아. 자식들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면 자식들 기다리는 그리움이 덜 생길 것 같단 생각이겠지. 아니 여전히 삶이 고통인 인생을 참고 살아내기가 힘든 거야"


다솜이는 순간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머니가 그간 한숨을 쉬던 순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할머니도 허무산에 올라가, 다솜이 자신과의 소중한 추억도 삭제하면서까지, 힘겨운 현재의 삶을 버티고 있는 게 아닐까 가슴이 아파왔다. 


다솜이는 따지듯이 더듬거리기까지 하며 물었다


"그렇다고 왜 좋은 추억까지 삭제해요?"


아자린은 순간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나쁜 기억을 삭제해야 하는데, 기억은 하루 단위로만 삭제가 허용되거든. 즉 어느 날 나쁜 기억이 20분이었다면 그것을 삭제하기 위해 그날의 23시 40분의 일상 심지어 좋은 기억도 버려야 하는 거야."


윌리암도 설명을 거들었다


"그게 참 서글픈 일이지. 나쁜 기억을 잘 해석해서 현자의 방에 보관하면 되는데, 이 현자의 방을 얻는 이들이 적어. 많은 사색과 묵상, 독서가 필요하거든. 


애꿎게 좋은 순간까지 인위적으로 기억에서 사라지니. 고체족속들은 그걸 치매, 가끔 기억상실증이라고도 하더군."


그래서일까. 마더스 가든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눈물범벅이었다. 요정 아자린은 귀띔을 해주었다.


"이렇게 울고도, 망각수를 마시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면, 사람들은 이곳에서의 일을 잊고 일상에 무디어 가지. 아주 가끔 이곳에서의 일을 꿈으로 변형해서 소포로 싸갖고 가는 사람들도 있어."


윌리엄은 다솜이 귀에 대고 비밀이라고 덧붙이며 속삭였다.


"허무산과 마음숲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자 꿈으로나마 가져가는 이들, 그들은 원래 살기로 한 수명에서 그 기간만큼 생명이 단축돼. 일찍 돌아가시는 분들 중엔 그 꿈 포장을 너무 많이 해가신 분들도 있었지."


그때 멀리 한 노신사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다솜이가 걷는 오솔길을 향해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눈물에 시야가 가려서인지, 균형을 잡기 힘들 만큼 감정이 격양된 것인지, 길 한중간에서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다솜이는 얼떨결에 소리를 내질렀다.


"어, 할아버지.. 어.."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외침은 노신사의 귀에 예리하게 꽂혔다. 노신사는 어딘가 많이 익숙한 음량에 아늑함마저 느껴졌지만 그런 생각에 머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코.. 괜찮아요, 괜찮아"


이 소란스러운 상황에 설명충 아자린은 하던 말이 끊긴 난감함을 애써 웃음으로 감춘 채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다솜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에코나라는 모든 물질들이 마치 고체족속들이 즐겨 먹는 마시멜로우 같단다. 도로의 재질도 스펀지나 마시멜로우 같아 아무리 세게 넘어져도 다치지 않아. 실은 이곳 요정이나 난쟁이들의 피부나 뼈 등도 말랑말랑해서 다쳐서 상처 입고 부러지고 깨지는 일이 없단다. 상함도, 해함도 없고 당연히 이곳에선 죽음이란 없단다"


"어, 그거 대개 안심되네요. 심하게 장난쳐도 혼내는 사람이 없겠네요. 그럼 높은 산에서 떨어져도 다치거나 죽지 않아요?"


다솜이는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마시멜로우로 만들어진 에코나라와 마음숲을 상상했다. 그 푹신푹신한 숲에서 날마다 튀어 오르는 자신을 상상하니 직전의 눈물이 무색하리만치 깨알 웃음이 스며 나왔다.


다솜이의 상상 속 마시멜로우 마음숲


요정 아자린은 다솜이의 입가의 미소를 읽지 못하고 방금 질문에 답하느라 자못 교수님 같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럼, 다치거나 죽는 일이 없지. 기본적으로 요정들은 다들 날개가 있고 난쟁이들도 지구의 벼룩처럼 자기 몸의 100배, 많게는 1000배까지 뛰어올랐다 내려와도 전혀 끄덕 없단다."


윌리엄은 검지손가락으로 턱을 개는 포즈를 취하며, 꽤 개구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 번은 미쿡이란 나라에서 어떤 아저씨가 에코나라의 이런 말랑한 분위기를 놀라워하더니 자기 생명 수명을 무려 10년을 줄여서, 이곳에서 기억을 영감으로 모두 포장해서 갔단다. 그리고 몇 년 안돼 디저니랜드라나 그런 놀이동산을 만들었지. 만화도 만들고 말이야. 그거 에코나라에서 본 것들을 모티브로 한 거란다. "


"진짜요? 근데 여기서 미키마우찌나 인어공주 그런 거 본 적 없는데요?"


"여긴 에코나라 중에서도 마음숲에 불과하단다. 지구의 천문학자들이 허벌 망원경으로 발견해 내는 것들 그 모두가 에코나라의 확장판이라 보면 된단다. 이거 설명하려면 너무 오래 걸리니, 그건 나중에 차츰 알아보기로 하자꾸나"


그때 노신사가 다솜이 쪽으로 다가오더니 싱긋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 말했다.


"꼬마야. 고마워!"


노신사는 요정 아자린과 다솜이 대화에 방해되면 안 되겠단 생각으로 가던 길을 마저 가다,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근데 이름이 다솜이라고 했지.. 다솜이라 참 이름 좋다'


다솜이는 노신사가 스치듯 지나가자 아자린에게 말했다.


"근데 저 할아버지는 왜 눈이 빨개?"


"음, 저분 사연이 많지. 10살 때 전쟁통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거든. 고아로 살다가 미국에 입양돼 갔는데, 몇 번 죽을 생각을 했었지. 그때 허무산을 거처 마더스가든에 왔던 게 벌써 70년 전이네."


다솜이가 순간 호기심이 증폭되어 귀를 쫑긋했다.


"다솜아. 우리 저 할아버지가 에코나라에 왔던 날의 기억들을 보러 갈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제가 볼 수 있어요? 어른들은 남의 물건 만지지 말라, 남의 것을 뭐든 몰래 보는 것은 나쁜 거라 했거든요"


"에코나라에서는 100% 완전공개야. 이걸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지. 가령 어른들 몰래 이상한 걸 봤다던지, 몰래 나쁜 생각이나 행동을 했던 것 모두 기억으로 녹화돼거든. 누구든 열람 가능하고. 이 사실 알고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하는 고체족속들도 꽤 있어 왔단다."


"근데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다 기록할 수 있어요. 사진으로 찍거나 영화로 만들면 그것만도 한 산 가득할 것 같아요"


"저장공간을 말하는구나? 저장공간은 동전 한 개 크기의 메모리 카드이면 충분해. 참, 이걸 본따  어떤 인간 박사 나부랭이가 자기 수명을 15년이나 팔아서 아이디어로 사서 싸들고 갔지 뭐야. 지구에 가서는 그 영감으로 플로피 디스크인가를 만들더니, 메모리 카드 년전부턴 클라우드를 만들었지. 다 에코나라의 기억 저장장치를 흉내낸거야."


윌리엄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거들었다


"그 뿐이겠어. 마더스가든 나무들의 벽면 화면을 본떠 얇은 TV를 만들지 않나, 우리가 들고 다니는 요정봉을 본떠 핸드폰인가 뭐 그런 것도 만들더라고."


"요정봉이 핸드폰이에요?"


아자린이 마저 말을 이어갔다.


"우리 요정봉으론 많을 것을 볼 수 있지. 고체족속들이 핸드폰으로 지구촌 사람들과 소통하고 인터넷 하는 그런 거, 우린 수만 년 전부터 하고 다녔거든. 비밀이랄 순 없지만 고체족속들이 이걸 또 본떠 만들 줄이야. 하여간 인간들은 극성스럽고 욕심 가득한 족속이야."


"어, 이거 완전 뉴스 감이네요. 인간들의 영감이나 아이디어가 실은 무의식 속에서 저장된 에코나라의 경험이 많나 봐요"


"그럼! 근데 에코나라에서는 선용되는 모든 것들, 그 고체족속들 손에만 들어가면 악용이 되더라고. 핸드폰으로 온갖 나쁜 짓을 할 뿐 아니라 각종 중독에 걸리고 인생의 여백이 사라져 버렸지.


인간들은 시간의 여백이 있어야 좋은 감정과 좋은 기억을 재생산할 수 있는데, 발명품들이 인간 손에 들어가자 더 망가졌어. 도체 이 고체족속들은 뭐든 돈 벌 생각만 하고 참 골치 아파."


다솜이는 골치 아파 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아자린 얼굴 보기가 민망했다. 대신 넙죽 사죄를 드려야 할것만 같아 모기 소리로 말했다.


"아... 인간들이 에코나라에서는 애저녁우주적 문제아들로 낙인 찍혔군요. 대신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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